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792찬미받으소서 (제1판 11쇄)
재난이 가르쳐 준 첫 번째 교훈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사실이다. 실제로 재난은 연결의 충돌 과정이다. 1989년 미국샌프란시스코 지진부터 9.11 테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크고 작은재난에 대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점이다. 엄청난 변화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뿐 아니라 생태계 시스템까지도 더 명확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 안에 들은 강한 것과 약한 것, 썩어 버린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알아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은 보수주의자들에게모욕적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개척자들이 가진 ‘각자도생‘ 이라는 환상을 따르기 때문이다.
멈춰진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시 바쁘게 여기저기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적이 흐르는 지금세상의 분위기가 더 지속될 수도 있다. 의약품, 의료 장비와같은 필수 방역품들이 다른 대륙에서 생산되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제때 물건이 도달하지 않는불안정한 공급 체계도 다시 따져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민영화 물결은 인간이 더 이기적이 되고 공동체의식과 사회적 유대감에서 멀어지면서 시작됐다. 다함께 코로나와 맞선 경험이 민영화의 물결도 바꾸길 바란다. 각자가어떻게 이 세상에 속하고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새롭게깨닫게 되면, 기후 위기를 막을 의미 있는 행동이 더 강하게나타날 수 있다. 갑작스럽고 엄청난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배웠기 때문이다.
민감해질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겪은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좌파 성향이며 환경 문제를 의식하는 내친구들은 기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을 향한 인신공격을 당연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기후 학자들을 공격하는 내용은 뻔하다. 과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을 갖거나, 큰 정부biggovernment에서 연구 자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후데이터를 조작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간단히 말해서, 증거를 갖고 따지기보다는 개인을 비방한다.
기후 학자 공격을 비판하는 내 친구들은 동료 경제학자들을 공격할 때 위와 비슷한 유형의 전략을 받아들이고 더욱확장시킨다. 경제학자들이 정치적인 편향성 때문에, 또는 대기업들에게 돈을 받아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나는 평소 이성적인 지인에게기후 과학자 공격과 경제학자 공격의 비슷한 점을 이해시키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지인은 내 얘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가능은 하겠으나, 이런 지인의 태도를 이중 잣대로 부르는 건 정당하지 않다. 이중 잣대에는 고의적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합리화‘는 타인에게서는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스스로 깨닫기는 매우 어려운 무의식적인 편견이다.
그렇다고 절망해선 안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은 배울 수 있다. 성장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첫 번째 간단한 단계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통계를 근거로 한 주장을 접하면, 반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만약 격분, 환희, 부정 등의 기분을 느낀다면, 판단을 잠시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한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 될 필요는 없지만, 느낌만큼 생각을해야만 한다. 할 수 있다.
대신에 모든 사람은 인터넷이 정신을 끊임없이 산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감정과 당파성에 휩쓸린다. 하지만 잠시 멈춰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수많은 거짓 정보를 걸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모두가할 수 있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습관을 갖는 것뿐이다.
수많은 논조들은 욕망과 동정심, 분노를 끌어 올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도널드 트럼프가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 차분히 생각하게 유도하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었던가.그린피스Greenpeace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멈춰서 생각해 보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다급함을 느끼기를 원한다. 그러니 서두르면 안 된다.
지금의 세계는 끔찍할 정도로 낯설다. 단순히 코로나 19 확산 때문은 아니다.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아무리 거대한 무언가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불안하면서도 해방감을 주는 이 단순한 진실은 쉽게 잊힐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머리방향 세포가 어떻게 방향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는지 더 상세하게 들여다보면, 나침반에 비유한 것은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머리방향 세포는 지구의 자기장이나 기본 방향(동서남북)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대신 랜드마크에 자신을 맞춘다. 에든버러에 도착했을 때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국립미술관이었다면 머리방향 세포의 일부는국립미술관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세포들이 상대적으로 특정 각도에서 활성화하는 것을 보장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전체 ‘나침반‘이신속하게 설정된다(사실상 미술관을 나침반의 ‘북쪽‘으로 삼는다).
싯다르타는 왜 가섭을 깨달은 자, 즉 삶의 주인이라고 판단했을까? 아니 거꾸로 물어보자. 싯다르타가 꽃을 들었을 때 가섭만 얼굴에 미소가 번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가섭의 몸과 마음은 오직 꽃으로 향했던 것이다. 나머지 제자들의 몸, 즉 눈은 꽃을 향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싯다르타의 속내를 더듬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속내를 읽으려는 제자들의 눈에 꽃이 들어올 리 없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맹자(孟子)」의 「공손추(公孫丑)」 상편에는 누군가를 아끼는 사람의 좌우명이 될 만한 ‘물망물조장(勿忘勿助長)’ 일화가 등장한다. "마음으로는 잊지도 말고[勿忘], 억지로 자라나게 도와주지도 말라[勿助長], 송나라 사람처럼 되지 말라. 어떤 송나라 사람이 벼의 싹이 자라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논바닥에 박힌 벼의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려주었다. 피곤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오늘 대단히피곤하구나! 나는 벼의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들이 논에 달려가보니 벼의 싹은 말라죽었다. 세상에는벼의 싹이 자라는 것을 돕지 않는 이가 드물다. 돕는 것이 무익하다.
‘물망물조장‘은 맹자(孟子, BC 372?~BC 289?)가 그 유명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으로 제안했던 것이다. 사실 ‘물망물조장’의방법은 벼를 기르는 농부의 경험과 지혜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물망물조장‘이라는 문장에서 ‘물(勿)‘은 ‘하지 말라‘는 뜻이고, ‘망(忘)’은 ‘잊다‘라는 의미이고, 조장(助長)’은 ‘자라나게 돕는다‘는 뜻이다.그러니까 ‘물망(勿忘)‘이 ‘잊지 말라‘는 요구라면, ‘물조장(勿助長)‘은 ‘자라나게 돕지 말라‘는 요구인 셈이다. 그러니 물망물조장은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뜻이 된다.
이런 참담한 경험으로부터 농부는 이상한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돕는 것이 무익하다 생각한 농부는 벼들을 그냥 논에 방치할수도 있다. 조장의 비극을 보았기에 이제 더 이상 조장하지 않겠다는 결의다. 바로 이것이 ‘망(忘)‘이다. 벼들이 저절로 자랄 때까지 방임하자는 전략이다. 그렇지만 이번 전략도 비극을 낳는다. 벼들 주변의 잡초를 제거하지 않아서 벼들이 잘 자라지 못하거나 시들시들 말라버렸다. ‘망‘의 전략도 사실 들여다보면 ‘조장‘의 전략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이 경우에도 농부는 ‘벼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벼가 원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벼에게 적용했다.그렇지만 벼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양분을 빼앗아 먹는 잡초를 제거해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무언가를 아끼는 일은 힘든 일이다. 조장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고, 조장하지 않고 완전히 방임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지니 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잊지도 말고 조장도 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이다. 아끼는 대상을 방치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잘되라고 아끼는 대상에 직접 개입하지도 말라!‘는 아낌의 좌우명이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여자친구, 내 남자친구, 내 아들, 내 딸,내 반려견, 내 반려묘, 그리고 내 화초에게도 마찬가지다. 어떻게하면 내가 아끼는 것들이 더 근사해지고 더 행복해질까? 바로 이때맹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준다.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 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불교에는 ‘현애철수(懸崖撤手)‘라는 말이 있다.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뜻이다. 매달려 있는절벽에서 손을 떼라니? 죽으라는 말인가? 생각해보라. 지금 엄청난 높이의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아 살려고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들은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비와 사랑을 강조하는 스님의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고 심지어 쉽게 납득되지도 않는 말이다.그런데 그러한 의구심은 간단히 해소될 수 있다.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없다면 못 살 것 같고 죽을 것 같다면, 이미 그 사람은 매달린 절벽의 노예일 뿐이다. 놓으면 죽을 것 같은데도 놓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다. 예를 들어 돌멩이를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돌멩이를 잡고 있으면 그는 돌멩이 말고 자신이 잡을 수 있는수많은 것들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자. 돌멩이를 놓는것은 빈손을 유지하겠다는, 혹은 아무것도 잡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멩이를 다시 잡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잡을 수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여행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여정 전체가 시간 단위로 계산되는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이다. 비행기 왕복 티켓, 묵을 숙소들,돌아봐야 할 주요 관광지들, 귀국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줄 선물 목록 등.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의 특징은 여정 중간쯤 되면이미 귀국을 생각하며 잠을 청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여행은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여행할 때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출발할 날을 헤아릴 때 더 설렌다는 점이고, 동시에 여행할 때보다는 집에 도착한 뒤여행을 회상할 때 더 행복하다는 점이다.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이 여러모로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에서 김선우 시인이 말한 가출‘과 닮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선우 시인은 가출을 하는 사람은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 라고 말한다. 그러니 ‘돌아올 날이 예정된 여행’은 줄여서 가출자의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가출자의 여행‘은 아이러니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음은 이미여행지에 가 있다. 여행지에 도착해서는 마음이 집에 가 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마음이 다시 여행지나 여행지 인증 사진에 가 있다.
집이라는 매달린 절벽에손을 떼어낸 자다. 몸이 어디에 있든 마음도 그곳에 있다. 인증 사진을 찍을 일도 없다. 그저 마음과 몸에 담아두면 그만이니까. ‘자유‘란 별것 아니다. 몸이 있으면 마음도 같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몸도 같이 있는 것이다. 지금 머문 곳을 몸이 싫어하면 떠날 뿐이고, 지금 머문 곳을 마음이 좋아하면 더 머물 뿐이다.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는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cynischen Vernunft)』(에코리브르, 2005)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곽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노"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있다. 한마디로 말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임제(臨濟, ?~867)는 『임제어록(臨濟語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에 일 없이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쉬는 것일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똥을 제대로 누는 경우, 소변을 제대로 보는 경우, 옷을 제대로 입는 경우, 밥을 제대로 먹는 경우, 피곤할누워 제대로 쉬는 경우, 몸과 마음이 함께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면, 이미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부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시원하게 대변과 소변을 보고,정성스레 옷을 입고, 맛나게 음식을 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사람이다. 반대로 평범한 사람은 대변과 소변을 볼 때 스마트폰을보거나 딴생각을 하고, 바쁘다고 옷을 서둘러 입고, 음식을 먹는 둥마는 둥 하고, 피곤하지만 잡념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몸과마음이 떨어져 있는 사람이 바로 평범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러니 항상스스로 몸을 체크해보면 된다.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면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갈 것이다. 반면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면, 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지않고,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은 가지 않을 것이다.
『임제어록』에서 임제는 삶의 주인이 되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새겨야 하는 여덟 자의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바로"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이를 ‘수(隨)‘, 곳 ‘처(處)‘,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 ‘진(眞)’, 이 여덟 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번역하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