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 한때 도발적인 선언이었던 이 말은이제 좀 낡게 들린다. 원한다고 다 사이보그가 되는 것도 아니며, 기계와 매끄럽게 결합할 수 있다는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대중의 환호를 받는 사이보그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손상된몸이 기계와 결합해 있다는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초엽과 김원영은 각자의 몸을 둘러싼 테크놀로지와 세계를 관찰하면서 과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사이보그가 되는지 묻는다.
이들은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테크놀로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테크놀로지와 사회가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지 상상하고 제안한다. 그 재설계는 깜짝 놀랄 만한 테크놀로지가 나올 50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장애인의 삶을 중심에 두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괴물이 한겨울 누군가의 집 창문밖에 서 있다. 그는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찬 저녁 식사 광경을 바라본다. 그 응시는 쓰라리고 원통한 어딘가를 늘 건드린다. 내가저 정상성‘의 세계에 속할 수 있을까. 소수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질문한다. 자신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사회가 보는 시선으로 자기 밖에서 자기를 바라본다. 이 이중 삼중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괴물‘ 그리고 사이보그‘ 이다. 그러나 ‘괴물들은 또한 안다. ‘괴물‘이 되는 일은 종종 불편하고 화나지만, 그 괴물 됨‘의 경험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사유하고 질문하게 함을,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으며 상상한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일어나고, 걷고, 듣고, 보고, 말하고 춤추는 장관을,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상태에 따라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는 영토를, 결여‘가 아닌 ‘압도적인 고유성‘을 가진 이 아름다운 ‘괴물들‘의 시끌벅적한 축제를!

펼쳐지는 시위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사람들은 성경의 한 구절에서 예수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라" 라고 말하는 순간을기대하듯 황우석 교수와 그의 연구 성과에 희망을 걸었다. 어린시절 여름성경학교에서 저 구절을 배울 때 나는 ‘앉은뱅이‘라는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예수님이 정말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성인이 된 2006년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예수님이 "일어나 걸어라" 라고 말하지 않고, "걷지 않아도 좋으니 (네 방식대로) 당당히 일어나라"라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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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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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레스토랑 예쁘지? 저기가 주제페가 운영하는 시칠리아 식당의 정원이야. 야외 테이블에서 저녁 먹으면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나중에 좋아하는사람과 저기에 가게 되면, 내가 소개해서 왔다고 쥬제뻬에게꼭 말해. 아마 더 맛있는 음식을 해줄 거야."
의도를 지닌 이야기였다. 그렇게 짐작되었다. 소년의 마음에 ‘하고 싶은 일‘ 하나 만들어주고 싶은 의도. 하고 싶은 일이있는 사람은 자신을 무작정 방치하지 않는다. 그 일을 이루기위해서 돈을 모으는 공부를 하든, 어떤 노력이건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길 안의 삶을 살게 된다. 박찬일 작가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그저 슬쩍, 작은 일 하나 보여주고 "이거 하고 싶지 않니?"라는 말을 가만히 건넨다. 그 일 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돌보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이 마음이 소년들에게 맑은 물로 스미고 있었다.

어른의 역할은 무엇일까. 세상과 삶의 이야기를 어린 영혼들에게 들려주는 것도 어른의 일 중 하나가 아닐까. 몸도 생각도 덜 여문 사람들을 곁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
오늘 나는 따뜻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잠깐 만나서 인사만 나누는 나를위해 도운이는 방에서 펜을 들고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는 소년의 시간을 떠올렸다. 사람에게 사람은 어떤 의미인가. 아이들과 나는, 그러니까 우리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관계는 아니게 되었다. 누가 일방적으로 무엇을 베푸는 관계도 아니다.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얼마만큼이든, 우리는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요란한 색, 강력한힘은 아닐지언정,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물들이고 있다

도운이가 ‘환대‘라는 말을 정확하게 쓴 것을 보고, 팔뚝에약하게 소름이 끼쳤다. 특정한 말을 공유한다는 것은 말에 붙어서 오는 마음도 함께한다는 뜻이다. 도운이는 환대라는 말을 배웠다. 사람이 사람을 반갑게 맞고 정성껏 대하는 마음을배웠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영혼이라면 아무렇게나 살지않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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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할 것 없는 몇 번의 납작한 건넴이었지만, 소년은 나에게 바윗덩이만큼 육중한 신뢰를 보냈다. 당신 덕분에 책을좋아하게 되었고,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많은 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세상에 나가서도 책을 계속 읽고 싶다는 말들이었다. 어디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절대적인 신뢰이자 지지의말들이었다. 소년이 나에게 선물한, 내가 소년에게 필요한 사람이자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에 기대어 일 년을 살아냈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사람‘이다.

"선생님, 힘드시죠? 오늘 어쩐지 어수선하네요."
오늘은 소년원의 소년이 나의 표정과 마음을 살펴주었다.
작년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올해의 내가 소통할 동료 없이살아가리라는 것을, 소년에게 위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어떤 시절에 누구로부터 이해의 마음을 받을지 미리 알수 없다. 위로는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으로부터 찾아오기도 하더라. 나의 마음을 살펴준 소년의 마음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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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이 명작들은 각기 자신의 시대에 중요했던 사회문화적 이슈들을 그 시대에 재미있다고 여겨졌던 방식에 따라 풀어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히도 그 작품들의 줄거리가, 온갖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내러티브에 익숙해진 오늘날 한국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명작들은 그 재미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내러티브로서가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은 글로서의 고전문학은 여전히 커다란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도구들을 손에 쥐고만 있으면 고전문학을 읽는 것도 지극히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당연히 오늘날의 흥미진진한 영화나 TV드라마,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웹소설 등이 줄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즐거움과 재미이지만...

수없이 많은 젊은 영혼들이 『데미안』에 빠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떤 것이 가치가 있고 어떤 것이 가치가 없는지, 삶과 가치의 모든 기준이 불분명한 방황의 시기에,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만큼 멋진 위로의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아끼고, 당신 자신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세요. 당신 안에 세계가 있으며, 그런 당신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예요.
우리는 모두가 서로 다른 위치에 서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우리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따르는 한,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한, 결국 모두 같은 길을 가고 있어요.

『데미안』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모두 이렇게, 비록 한순간일 뿐일지라도, 우리 내면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가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의 중심임을느낀다. 바로 그것이 『데미안』을 통해 헤세가 보여준,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얼마나오해를 했든 『데미안이 우리에게 남겨준 감동과 위안은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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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들은 나를 무겁게 짓눌렀고, 어떤 죽음들은 몹시 가슴 아프게 했으며, 어떤 삶은 나를 겸허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것을복기하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틈날 때마다 기록을 남겨왔다. 거기에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고, 적어 놓기라도 하지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과정을복기하고 글로 남기는 과정에서 내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렸던,
혹은 찾고 있었던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환자들은 때로는 살아서 때로는 죽어서 나를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에 남아서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되짚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 그래서 때때로 ‘죽음‘이라 쓰고 ‘삶‘이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을 잊어가는 나에게 누군가는 계속 의미를 물어왔으므로,

누군가의 어제는 우리의 오늘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오늘은또 다른 이의 내일에 영향을 미친다. 삶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의 삶에 작은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진 빚을 비로소 갚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삶을 얼마나 의미 있게 살아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태어난다. 일종의 숙제라면 숙제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 나름의 숙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인생의 숙제를 풀든 풀지 않든, 어떻게 풀든 결국 죽는 순간 그 결과는 자신이 안아 드는 것일 테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기대여명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조금 달리 보면 특별한 보너스와 같을지도 모른다. 보통은 자기가 얼마나 더 살지모르는 채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남은 날은 OO 입니다.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시겠습니까?" 물론 이 문제를 다 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빈칸으로 남겨두기에는 아쉬운 일이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라는 첫 문장은 옳다고. 누군가에게 가족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때때로 누군가에게는 짐이자 삶을 옥죄는 족쇄에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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