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라는 게 그랬다.
지루하리만치 느리게 다가와도
일단 마음에 꽂히면 확 퍼진다.
내가 찾은 게 아니라 진리가 날 발견한 거다.
순식간에 내 마음 물들인 거다.
의미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나의 희로애락은 사라질 것들에 묶여 있었다.
없어질 것들 때문에 염려했다.
있는 것은 사라질까봐, 없는 것은 나타날까봐 두려워했다.
사라져가는 존재로서 사라져갈 많은 것들을 사랑한 거다.
아아, 그게 내 마음의 사슬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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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사제의 밤 - 불확실한 시대의 신앙
토마시 할리크 지음, 최문희 옮김 / 분도출판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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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고 ‘굳건해 보이는 신앙이 사실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굳어 있으며 부풀려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신앙에서 유일하게 위대하고 굳건한 것은 절망의 불안을 감추는 방탄 갑옷‘뿐이다. 물러서지 않고 십자가의 불길을 통과한 신앙은 어쩌면 자신의신원이라 여기는 것 또는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을 상당 부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 신앙이 새로 무르익게 되었음은 그것이 더 이상 갑옷‘
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신비가들이 말하는 벌거벗은 신앙‘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 신앙은 공격적이거나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조바심 낼 일은 더더욱 없다. 물론 ‘위대하고 ‘굳건한 신앙에 비교하면 그것은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것이다. 어쩌면 겨자씨 한 알처럼 무無에 가까워 보일 수도 있다.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방식이 바로 그러하다고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존재들의 세상에서 ‘무‘無이시다. 하느님은 존재들 가운데 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만나기를 바란다면 우리도 ‘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가 되고자 한다면, 곧 무언가를의미하고, 무언가를 소유하며, 무언가를 알고자 하며, 한마디로, 사물들의 세계와 각각의 존재들에 집착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만나는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신앙도 무언가의 속성을 지닌 많은 것들, 곧 우리의 개인적 개념들과 투영들과 바람들,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기대들, 우리가 만든 정의들과 이론들, 우리의 이야기들과 신화들의 세계, 우리의 ‘가벼운 믿음‘ 등에 짓눌려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 우리는 아직 그 모든 것에서 우리 양을 한껏 채우지 못해 더 많이 바랄지도 모른다. "이복잡한 삶에서 우리에게 더 많은 신앙, 더 많은 확신과 약속을 주십시오!" 하고 말이다.

세속적 낙관주의(‘진보’를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계몽주의 신앙)의 순진함과 그 실패에 관한 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나는 그보다는 ‘종교적 낙관주의’에 더욱 반대하는 견해다. 속임수 같은 ‘하느님과의 흥정’ 가능성과 사람들의 불안을 활용하여 복잡한 문제들에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실한’ 대답들을 제시하는 안일한 신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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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길에 들어서려면 우리 자신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는 법을안다는 것은 도망치거나 자신을 소외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탈출을 감행하는 사람은 공간보다 시간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시간은 자신을 열어 영원이라는 지평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시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속 여행에도 함정이 없진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공간과 시간을 혼동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차원에서 자신에게서 ‘탈출‘했다고 믿습니다. 물론시간은 언제나 하느님께 속해있지만 말입니다.

시간을 ‘하느님의 메신저‘라고 한 성 피에르 파브르saint Pierre Favre, 1506-154626가 떠오르는군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에도 소유의 영역을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순간을 절대적이고 무언가 결정적인 것인 양살아냅니다. 그럼으로써 시간은 공간이 되어버립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우리만 있습니다. 이것은 순례자의 길을 가장한 행정 사무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동하지만, 결국 우리의 왕국 속에 정착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앞을 향해 걷고 있다고 생각한 공간은 사실은 우리를 가두는 미로일 뿐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리아드네가 언젠가 우리를 풀어주기를 막연히 기다리면서 목적 없이 우리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것입니다.

롯은 좀 더 나은 땅을 차지했지만, 땅과 더불어 좋지 않은 것도 물려받았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창세 13,13 롯의 부인도 공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부인은 ‘떠나법을 몰랐기에 뒤를 돌아보았고, 결국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19,26

뒤를 돌아보는 것은 기억을 통해 ‘정착‘하려는 또 다른 시도입니다. 사실 기억은 악하게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은총으로 뽑아주신 것을 끊임없이 기억하지신명5.15; 8,2-5; 32,7 않거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일상에서 기념하지루카22,19; 1코린 11,24-25 않는다면, 기억은 뒤로 돌아보게 유혹하는 그리움으로 변질됩니다. 그리고 이 뒤돌아봄은 주님 안에서 유목민이 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수많은 불평이 생겨나는 근원이 됩니다.

우리 마음을 건드립니다. 기도를 통해 바뀌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순종하고 포기하면서 변화하니까요.

기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하던 하느님이 아니라 ‘참 하느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말없이 성장해 하느님의 신비 앞에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무엘기 하권 15 16장이 서술하는 망명자 다윗의 모습을 보며우리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께 내맡긴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 중인 다윗이지만왕인 그의 겸손이 눈에 띕니다. 특히 그의 도망에 시종일관 동반되는거룩한 분위기에서 그의 권위가 느껴집니다. 그는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포로들처럼 하느님의 계획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 채 마치 예배행렬에 참여라도 하는 양 침착하게 행동했습니다.

이 망명은 도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충직한 신하들의 충성파,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지 않는 임금의 품위가 드러나는 속죄와 예배의 길입니다. 다윗은 백성을 인도합니다. 백성 가운데 어떤 이들은그를 따르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자유의사로 집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런 행동은 통제‘가 아니라 지휘입니다.

다윗의 망명은 신중했습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고, 자신이 처한상황의 한계를 인식하고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현실화 되도록 애를 썼습니다. "그대들이 나에게 소식을 보낼 때까지 나는 광야의 길목에서 기다리겠으니 그리 아시오."15.28 필요한 만큼만 후퇴합니다. 그는 하느님 안에서 물러날 줄 알았고, 하느님께 자리를 내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의 전략은 예수님이 자신의 ‘때‘가 시시각각 다가오던 바로그 순간 취하신 전략과 비슷했습니다.

유혹이 어떻게 자신을 공격했는지, 외적 힘이 자신을 얼마나 속박했는지를 말합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외적인 방해에만 정신이 팔려 기도는 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의 종이 아니라 희생자의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순교 성인으로 들어높여 우리의 한계를 시성식의 향 연기로 가리는 법을 배웁니다. 곧 우리 자신의 거룩함의 향내로 우리의 나약함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자유란 아버지의 계획넘겨짐을 받아들여 그분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위엄은 ‘자유와 ‘포기‘라는 바탕 위에 세워집니다. 얼핏 보면이 두 개념은 서로 상반되어 보입니다. 자유는 결정 능력을 뜻하고, 포기는 결정을 상대방의 손에 맡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유의깊은 뿌리는 자발적인 포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패는 이러한 역학의 일부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곁에아무도 없는 그때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마태 26,31)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활의 힘으로 개입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아닙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절망의 나락에떨어졌을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아버지의 권능이 드러나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실패의 길을 받아들인사람을 주님으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개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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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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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어른이 주는 선물‘로 주고 싶다. 이건 네 책이야.
사회의 어른들이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이런 다정한 마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만 갖춘 소년원 방 사물함에 ‘너만의책꽂이’를 만들어주고 싶다. 자신이 열심히 읽은 책들로 채워진 ‘나만의 서가가 주는 잔잔한 기쁨을 소년에게 선물하고 싶다. 집에 갈 때 책을 가지고 가는 친구들에게 주고 가든 그것은 아이의 선택이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지만, 마음에 아로새겨질 즐거움과뿌듯함을 선물하고 싶다.

이런 마음은 차갑다. 사람의 온기보다 얼음의 냉기가 느껴진다. 쉽고 좋은 책을 소년의 손에 자꾸 쥐여주고 싶다. 그것은 결국 ‘책‘이 아니게 될 것이다. 책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화化할 것이다. 우리는 소년에게 책을 주지만 소년이 손에 받은 것은 자신을 돌보며 사는 마음 아닐까. 다른 사람과 어울려살 수 있는 마음 아닐까.

독서동아리의 본래 영혼은 강제 아닌 자유, 학습이 아닌 놀이다. 그래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에 집착하지 않는다.
수준 있는 책, 점차 심화하는 독서를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그러면? ‘또 놀고 싶은가‘가 관건이다. 오늘 재미있게 놀아야내일 또 놀고 싶다. 체계적으로 놀아야 해. 꾸준히 놀아야 해.
이런 강요는 놀이에 조화롭지 않다. 독서동아리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들은 놀 때 꾸준함과 체계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놀이는 그저 오늘 재미있게 놀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 아닌가. 내일을 기약하지 않는다.

요상하기도 하지. 나의 ‘미친 신남이 멈칫거릴 때, 마음의온도가 미지근해질 때, 그래서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이런 녀석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유성이는 오늘 내 마음이 미지근해질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내 마음의 애愛 위에 증이스멀스멀 덮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것도 ‘쎈’ 약. 처방전에 쓰여진 말은 이렇다.

누군가는 별다른 의식 없이 이어나가는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끈이 끊어지기도 이어지기도 하는 힘겨운 것일 수 있다. 잘난 척하던 내 마음이 납작해진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같이 웃을 때 한 뼘 좁혀진다.
같이 열 받을 때 또 한 뼘 좁혀지고, 같이 안타까워할 때 곁으로 바짝 다가온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우리는 거리가 좁혀질 일이 많을 리 없다. 그래서 소설 한 편, 그림책 한 권 보면서함께 웃고 속상한 순간이 찾아오면 기쁘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 그냥 이 시간과 공간의 빈틈이 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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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신수련 묵상 길잡이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지음, 김현균.김정아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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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은 덕행의 축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부단히 살아가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성소와 교회에 대해서, 십자가와 은총에 대해서, 그리고 죄와 충실성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나누고 있습니다.
교회의 현재화aggiornamento는 외적인 탈바꿈으로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초연해져서 하느님의 뜻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선의만으로는 이 세상이 선해지지 않는다는것을 뼈저리게 통찰하고 일상에서 수련을 실천하십니다. 악과 죄는곳곳에서 우리 영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작은 일에도 자신의 몸을 부리고 정신을 수련하십니다. 가방을 손수들고 다니고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격식을 한사코 피하십니다. 그분에게는 겸손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최종 목적을늘 의식하며 매순간을 살아가는 분이십니다.

‘가장 큰 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장 작은 것 안에 담기는 자유로운 영혼, 작은 일들을 큰 지평 안에서, 곧 하느님 나라의 지평 안에서행하는 교황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니코데모3.1-21와 사마리아 여인4.1-42에 관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들도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께 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본질적인 것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대화의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합니다. 곧 남편들에 대한 것은 놔두고신학적인 문제를 건드립니다. 니코데모의 경우는 다르지만 그 역시 조건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예수님은 그가 준비되지 않은 것을 아시고 상념에 사로잡히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왜냐하면 상념은 그에게 요구되는 충실함을 회피하기 위한도피처였기 때문입니다.

사제와 직업적 종교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둘은 질적으로다릅니다. 슬픈 일이지만 사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직업적 종교인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제직은 더 이상 ‘다리‘가되지 못하고 그저 이행해야 하는 진부한 기능이 되어버립니다. 조정자가 아니라 중개인으로 전락합니다. 어느 누구도 제 스스로 사제의 길을 택하지 못합니다.

교황을 뜻하는 스페인어 ‘pontifice‘는 ‘pons‘(다리)와 ‘facere (만들다)의 합성어인 라틴어 ‘pontifex‘에서 유래했다. 결국,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거룩함이란 ‘하느님의현존 안에서 걷고 완전해지는 것이며, 부단히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 만남을 기다리며 깨어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각자의 마음상태에 따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깨어있기 위해 노력할때 우리는 식별력을 지녀 그분을 알아 뵙고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주님이 우리 곁을 지나가시는데도 보지 못하고, 그분을 잘 알면서도알아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가던 길을 계속 가시려는 듯이 보일 때 가지 못하시도록 붙잡을 수 있습니다. 마르 6,48; 루카 24,28-29

하지만 슬픔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희망과 반대되는 죄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베르나노스GeorgeBernanos,1888-1948는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이에 대해 잘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에 반하는 죄 …모든 죄를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죄, 그럼에도 가장 빠지기 쉬운 죄, 한껏 우쭐해하는 죄.
그 죄를 인지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그 죄를 알리고 그 죄에 앞서 오는 슬픔은 얼마나 달콤한가! 악마의묘약, 악마의 진미 중에서도 으뜸이다."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랍니다. 우리의 소박한 사명은, 어쩌면 가라지 수확은 천사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정신 차려 밀을 보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유혹은 ‘마음의 가치보다 두뇌의 가치에 손을 들어주려는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마음만이 하나로 모으고 통합시킬 수 있습니다. 자비로움 없는 지성은 갈라놓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은 관념과현실,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과 영원을 하나로 결합시킵니다. 유혹은지성을 우리 주 하느님께서 애초에 놓아두신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인간에게 지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명확히 이해하도록 인간에게 지성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온갖 것을 심판하라고 인간의 예지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빌려주신 빛이요 반사광일 뿐입니다. 우리의 지성은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우리 믿음을비추기 위한 섬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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