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우에는내가 이 세상 앞에서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 이문재)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도 우리는그런 방식으로 배워왔다. 결국 우리는 생소한 것에 대해 선의와 인내, 공정함과 온후함을 베푼 보상을 받게 된다. 생소한 것이 천천히 자신의 베일을 벗고 말할 수 없이 새롭고 아름다운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친절에 대해그것이 보내는 감사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런 길을 거쳐 사랑을 배웠을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전혀 없기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도 배워야만 한다.

피천득 시인은 『인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한 테크닉이 필요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 요컨대, 인간관계에서 꼭 마음에 새겨둬야 할 원칙이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꼭 진실이고 팩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바닷가에 대하여」라는 시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마음이 답답하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경청은 무섭다. 귀 열고 허리 펴고 상체를 조금 상대방 쪽으로 기울인 채 듣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열린다. 상대의 말이 내마음을 삼킨다. 그날이 꼭 그랬다.

나는 인간이란 커다란 여행 가방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로 채워지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동댕이쳐지고 덜컹거리며 보내지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지고 갑자기 반쯤 비워지거나 아니면 더 꽉꽉 채워지다가 마침내 궁극의 짐꾼이 궁극의 기차에 핵 올려놓으면 덜그럭거리며 사라져버린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집 『가든파티』에 수록된 단편「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에서는 인간을 가방에 비유하는…

우리의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 번뿐, 다시 돌아오의 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한 구절입니다.

갑자기 나는 비둘기들을 지켜보면서 배고픈 것을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에 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배고픔은 단지 치통 정도의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주의를 다른곳으로 돌리면 그걸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갑자기 나는 몸이 가벼워짐과 동시에 자유로움을 느꼈다. 마치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 -

인생의 문제들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게 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만약 지금 큰 어려움에처해 있거나 스트레스에 파묻혀 계신다면, 잠시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자기 모습을 지켜보세요. 아니면 다른일에 몰두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어보는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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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반쪽을 만나야겠다는 바람은 더 좋은 반쪽이 되고싶다는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희망하게 되었어요. 나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

남편이 화가인데 아내가 미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면그 가정생활은 다소 절름발이 격이 되지 않을까. 부부란 서로의 호흡을 공감하는 데서 완전한 일심동체가 되는 것인 줄로안다. 자기가 전공한 것이 미술이 아니라도 미술가와 결혼을하게 되었다면 미술에 대한 기본 공부를 해보는 것이 남편의세계를 이해하게 되기도 하려니와 자기 자신의 정신생활 또한그만큼 폭넓게 하는 길이 될 거다.

밤을 새워 얘기를 나누거나 같이 자거나 여행을 하지 않아도, 매일 조금씩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서로를 배려하는것만으로도 굳건한 신뢰의 성이 생긴다는 것을, 너무 젊어 기운이 넘쳤던 시절에는 그렇게 담담한 인간관계를 알지 못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스위트 히어애프터』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꼭 뜨겁게 열정을 불태우지 않아도 소중한관계일 수 있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또 한 번 느낍니다.
여러분은 "매일 조금씩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서로를 배려하는 것만으로도, 굳건한 신뢰의 성이 생긴다"라는 말에 공감하시나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

저 역시 그런 적이 있습니다. 특히 몹시 노력했던 일이 형편없는 결과로 돌아왔을 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더 이상 열심히 살 필요가 있는지 회의감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책장을 덮을 때쯤
‘무의미의 축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이무의미하다는 것은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반대죠. 이 세상 모든 것에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는 것, 무의미한 것들에 내가 의미를 부여해 축제‘로 만들수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상실과 슬픔마저도요.

사탕 더미의 무게인 79.3킬로그램은 바로 작가의 연인의 체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것 같아요. 시간이 연인을 갈라놓을 순 있다(작품이 전시되는 동안 사탕이 사라지는 것).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 회복되고영원히 기억되고 이어지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매일 아침사탕의 무게가 다시 회복되어 채워지는 것). 작가는 연인을 잃은슬픔에 빠져 자신을 해치는 대신, 상실마저도 예술로 승화시켜 자신들의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빛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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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는 군대 간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쓰셨다. "때론 시련이 큰 그릇을 만든다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은 작은 그릇마저 찌그러뜨리기 일쑤란다." ‘찌그러진 작은 그릇으로 민주주의를 일굴 수는 없다.

마르크그라프 알브레히트가는 베를린의 번화가인 쿠어퓌르스텐담과 맞닿아 있는 중산층 거주 지역이다. 100미터 남짓한 이아담한 거리에 유태인을 추모하는 황동판이 무려 36개나 심어져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이 아름답고 평온한 거리가 아우슈비츠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일상에 불현듯 틈입한 역사에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거리에 황동판을 심는 일을 시작한 이는 군터 뎀니히라는 예술가다. 그의 목적은 "번호로 불리며 살해당한 희생자들이 자유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거처에 그들의 이름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 10센티미터의 돌 위에 황동판을 붙여놓은이 작은 추모석을 그는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말로는 ‘걸림돌이다. 아직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다는사람은 없다. 땅을 파고 박아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독일인도 없으리라. 그들의 끔찍한 과거를매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허리를 굽히고 앉아 ‘걸림돌을 보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름답지 않아요? 이렇게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 더욱이 희생자의 과거를 잊지 않고 매일같이 만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에요."

매일 집 앞에서 아우슈비츠를 만나야 하는 독일인의 심정이궁금해, 한 중년 여성에게 걸림돌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에 대해물었다.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부담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걸림돌은 이제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6만 5천 개넘게 심어졌다. 공적 역사에 묻혀온 개인적 역사가 집 앞에 되살아나고, 익명의 희생자들이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고 있다. 독일인들은 아침마다 과거의 걸림돌에 걸려 비틀거릴 테지만, 바로 그렇게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새롭게 배우고, 결국 과거를 넘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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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더 좋아요.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걸요." 저 역시 그런 시간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괴로운 고립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누군가 내 편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혼자있을 때는 산더미처럼 불어났던 불행과 걱정도, 친구나 연인과 수다를 떨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겁니다. 해결하기 힘들 것 같던 문제의 해결책을 너무 쉽게 찾기도 하죠. 인간은 결코 ‘개인‘ 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과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즉 ‘우리‘로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람에게 사람이, 우리’ 에게 우리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면서 둘도 없이 특별한 존재다. 세계의 모든 일은 그 안에서 오직 한 번씩만 교차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이 판결문을 읽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욕을 하고 상처를 주는 일보다 그 사람이 혼잣말만 하도록, 즉 계속 고립된 상태에 있도록 방치하는 게 더 나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혼자가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사회와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이라면, 그 고독은 좋은 것일 수 없습니다. ‘나는 혼자여도 괜찮다‘는 자기 위안은소한의 사회적, 심리적 관계가 바탕이 되었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고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불과하다는 사실을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항상 반대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둠과 빛, 빛과 어둠, 그림에는 이 둘이 있어야만 하죠. 빛에다 빛을 더해도 아무 의미가없습니다. 어둠에 어둠을 더해도 마찬가지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슬픔이 있어야 행복이 찾아올 때, 그걸느낄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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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승자의 발자취‘라는 역사가의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깊은 의미에서역사는 잘 진 싸움의 궤적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역사는 이상주의자의 좌절을통해 발전해 온 것" 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는 싸움도 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완전한 지옥이 되지 않은 것은 지는 싸움을 해온 사람들 덕분이다. 진 싸움이 만든 역사가 희망을 지켜주었다.
이러한 믿음을 품고 우리는 함께 환멸의 땅을 건너가야 한다. 넘어지고 부서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꿈꾸던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세기 이 나라, 이민족은 너무도 큰 고통과 희생을 치렀다. 역사에 빚진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없다. 쉬이 희망을 말하지 않되 가벼이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 유토피아와 멜랑콜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 - 이것이 이 환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안이 극단적이고 편재적인 것은 그것이 실존적, 철학적 불안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불안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극단적 불안사회로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시작되는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제 권력이 무소불위의 전횡을 행사하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졸지에 ‘구조조정‘, ‘정리해고, ‘노동의 유연화라는 경제적 테러를 일상적으로 겪게 되었고,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조정‘, ‘정리‘, 유연화의 대상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비정규직, 정규직에 이어 ‘엘리트 직장인까지도 생존의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불안사회를 극복할 처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면한 과제는불안을 생산하고 지배의 도구로 악용하는 경제 권력을 제어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고용 관행을 변혁할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경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한정치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리하여 ‘조정‘하고, 정리하고,유연화 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닌 경제라는 인식하에 인간적인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무례사회는 돈만 벌 수 있다면 인격 모독쯤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인간을 경시하는 사회다. 성형 광고의 주체인 의사 선생님들의 경우에서 보듯,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

대중들 또한 무례에 둔감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대중이 이용하는 지하철에 저런 파렴치한 광고가 버젓이 걸릴 수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촘촘한 경쟁의 그물로 조직된 사회에서일상적으로 너무도 많은 모멸과 무례를 겪어온지라 대중에게 남아 있는 자존감의 영토는 그리 넓지 않은 것 같다. 때로 대중은경멸과 조롱에 모멸감을 느끼거나 저항하기보다는, 이를 자조적으로 즐기는 집단적 마조히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한다. TV에서 방영하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라, 소재의 절반 이상이 외모에 대한 조롱이다.

한국 사회는 방관사회다. 시민들은 참여하지 않고 방관한다. 방관은 군대 내무반이나 세월호 선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그것은 우리네 일상이다.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것이 ‘나만 빼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공적 정의를 위해 참여하는 시민은 극소수다. 대학의 학생회든, 기업의 노조든, 시민단체든 공적 이해를 위한 기구에 참여하는 시민의 수가 우리처럼 적은 나라는 드물다.

특히 정치의 경우 시민들의 ‘방관은 극단적이다. 모두가 정치에관심을 보이지만, 아무도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 정치평론가는넘쳐나지만, 정치 활동가는 보이지 않는다. 소수의 진보정당을 제외하면 한국 정당의 본색은 ‘당원 없는 정당‘이다. 이는 매력 없는정당 탓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관하는 시민 탓이기도 하다. 모두 곁에서 훈수만 둘 뿐 참여하지 않는 사회, 정치 혐오를 좀 더세련된 정치적 취향인 양 조장하는 방관사회에서 민주공화국의이념이 실현될 수는 없다.

광화문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헬조선의 현실은 변한 게 없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제 광장 민주주의가 현장 민주주의로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실천하고, 실현해야 한다. 내 마음속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촛불이 타올라야 한다. 촛불이 나를 변화시키고, 일상을 변화시키고, 현장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마침내국가를 변화시켜야 한다. ‘내 안의 최순실을 불태우고, ‘내 안의박근혜‘를 몰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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