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남은 스물다섯 번의 계절
슈테판 셰퍼 지음, 전은경 옮김 / 서삼독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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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수영과 맑은 공기, 그리고 훌륭한 음식 중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식욕이 좋았는지, 무엇보다도 언제 이렇게 편하고 맛있게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게다가 나사 빠진 사람처럼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낮부터 포도주 한 잔을 즐기다니.

나도 지난 몇 년 동안 영양을 종교처럼 신봉해 왔다. 아침은 아몬드에 오트밀, 점심은 퀴노아 샐러드, 간식으로는 기껏해야 견과류 또는 사과 한 알, 저녁으로는 채소와 생선을자주 먹었다. 이른바 현대인의 메뉴였다. 즐거움 대신 건강,
칼로리 대신 통제. 나 자신이 직접 지은 박물관의 소중한 전시품인 몸. 이 모든 것은 미식가의 방탕함을 싹부터 잘라 내

악천후 속에서 열흘 동안 아이슬란드 토종말을타고, 오두막에서 밤을 보내고, 끝없이 펼쳐진 자연 속에서 가이드와 두 친구하고만 지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모험을 위해 5년 전부터 동전 한 푼이라도 생기면 여행을 위해따로 마련한 계좌에 넣고, 다른 의미 없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며칠만 기다리면 뜨거운 온천물에서 수영할 수 있는데,
새 청바지가 왜 필요하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전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요. 오랫동안 소홀히 했던 근육을 쓸 때처럼 인내와절약과 결핍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면서요. 모든 것이 언제나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 같은 요즘 세상에서는 금방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특히나 소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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줍는 순간 - 안희연의 여행 2005~2025
안희연 지음 / 난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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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묘지의 이름이 ‘해변의 묘지‘라는 사실이 내게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라는 시를 쓸 때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해변의 묘지‘에 묻힐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이건 계획된 일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려나 좋았다. 내가 두 발 딛고 있는 이곳이 ‘시와 삶이 합일되는 장소‘라는 것이 나의 심장을 뛰게 했으니까. 발레리가 태어난 곳과 그가 죽어 묻힌 곳이 동일하다는점도 좋았다. 그는 내게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시와 삶이하나인 것처럼, 삶과 죽음도 하나라는 사실을.

나는 다시 그녀의 책을 펼쳐들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작은 우연이 일생을 결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유리알처럼 맑게, 성실하고 무관심하게 살기에는 슬픔,
약함, 그리움, 향수를 너무 많이 그의 영혼 속에 담고 있다."비릿한 감정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왔다. 결국 인간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것은 온갖 종류의 그리움이지 않겠느냐고, 먼 시간속의 그녀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여행에서 만난 스라바스티의 대인스님은 "인도인들마음에는 전쟁(다툼)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매일같이 강가에 나와 몸을 씻고, 사원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죽으면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 했다. 이번 생의 행복과 슬픔은 이번 생으로끝난다는 것. 그래서 더 나은 삶, 더 크고 좋은 집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오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지속해나갈 뿐이라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을 어려운 대로 지켜보면서 나는 "살아 있으라, 누구든살아 있으라"던 기형도의 아름다운 문장을 떠올렸다.

그래서 네 릭샤를 탄 건데 이제 와서 사기칠 생각 마라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따져봐도 소용없었다. 자기는 분명fifty‘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큰 소리가 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한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기에사정을 설명했다. 얘기를 다 들은 할아버지는 너의 억울함은이해하지만 이 사람은 너보다 가난하니 네가 그냥 오십 루피를지불하는 게 좋겠다는 거였다. 나는 분통이 터져서 삼십 루피를 내밀며 이 이상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매몰차게 돌아서는내 뒤통수에 대고 릭샤꾼은 소리쳤다. "Are you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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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유럽의 다정한 책장들 - 24개 나라를 여행하며 관찰한 책과 사람들
모모 파밀리아 외 지음 / 효형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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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 이후 회사의 속도는 더 빠르게 다가왔다.AI 기술이 업무에 급속도로 반영되고 있었고, 안 그래도 첨단이던 반도체는 최첨단 기술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책의 본질을 살폈듯, 일에서도 본질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는 거다. 성과보단 왜 일하는지 이유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기술보다 우선해야 할 건 사람(동료)이란 마음가짐도 분명해졌다. 왜 하는지 알고 하는 일은 덜 난해하고, 왜 고마운지 알고 바라보는 사람들은 더 다정할 수밖에 없다. 책처럼 기술에도 그 본질엔 사람을 위한 선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이전과 같은 일을 하면서도 모든 게 수월해졌다.

-알라딘 eBook <유럽의 다정한 책장들> (모모 파밀리아 외 지음) 중에서

기록된 공간은 책이다. 공간이 기록된다는 건 그 안에 인물, 사건, 서사가 존재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록되는 순간 공간은 이야기꾼이 되어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러 복작거릴 관광지나 유적지에 늘 사람이 몰리는 까닭이다. 고전을 읽듯 역사 유적지에 가고, 신작 수필을 읽듯 근교 관광지로 나들이를 떠나기도 한다. 책장을 펼치듯 공간에 발을 들이고, 본문을 읽듯 공간을 누비며, 문장을 탐닉하듯 공간 하나하나를 훑는다.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공간 기록을 남기는 일은 책을 읽고 느낀 바를 독후감으로 옮겨 적는 일과 닮았다. 기록된 공간은 책 중에서도 몰입하여 읽게 되는 다분히 남다른 존재감이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유럽의 다정한 책장들> (모모 파밀리아 외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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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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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의 서자 환웅이 하늘 아래에 뜻을 자주 두고 인간 세상을욕망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서 삼위태백 지역을내려다보니, ‘홍익인간‘ 할 만하였다." 이처럼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겠다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하늘신의 목소리다. 그리고 하늘신 환인의 아들은 실제로 부하들을 데리고세상에 내려와서 문명 세계를 건설한다. 마치 발리나 미국의건국신화가 외부 문명인들이 이주해 와서 정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듯이, 한국의 건국신화 역시 외부(하늘)의 존재가이주해 와서 정착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뒤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다들 알고 있다. 곰은 어두운 곳에서 마늘을 먹고 견딘 끝에 마침내 웅녀가 되었고, 환웅과 짝을 지어 단군왕검을 낳는다. 이 단군왕검은 어떻게 되었나? 무려 15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는데, 중국으로부터기자()라는 이가 조선 땅으로 건너오자 자리를 피해 결국산신(山神)이 된다. 이처럼 한국의 정체성에는 아주 일찍부터이주, 식민, 제국의 시선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의 정체성은 바로 그런 시선들과 길항하며 전개되었다. 단군신화는제국을 의식한 정치신학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고달픈 길을 가려는 이
‘슬픈‘ 자기 재창조 작업이 바로 우리가 아는 단군신화의심이다. 단군신화에서 가장 놀라운 이는 환인이나 환웅 같은 신적 존재들이 아니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그건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들은 아직 인간 세상이 얼마나 개판인지 모르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느 시대나 약간 이상하고 야심적인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정말 놀라운 점은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결심이 가능한 동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결심이 가능하다는 것은 자신의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을 나눈 뒤,
사뭇 다른 미래의 자신을 창조해내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는것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바로 그 놀라운 자기 재창조의 결심을 해낸다.

미래의 목표를 위해 부자연스러운 일을 감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명이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겪는 고추는 자연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려는 존재의 몸부림이다. 문명화된 존재로 자신을 탈바꿈하려는 존재의 통과의례다.
알다시피 호랑이는 실패하고 곰은 성공한다. 그러나 호랑이가 과연 실패한 걸까. 우리는 단군신화가 호랑이가 아닌곰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호랑이의 관점에서 쓰인 단군신화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인간이뭐라고 이 개고생을 감수해야 하나! 유레카! 깨달음이 온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나간다. 호랑이가 이렇게 문명을 거부했기에, 신화의 주인공 역할은 문명화의 길을 간 곰에게 넘어갔다.
끝내 버텨 인간이 된 곰, 정말 ‘징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곰이 그 고초를 견디고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단군신화의 인간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단군신화의 인간관은 홍익인간이 아니다. 홍익인간은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정도의 일반적인 언술에 가깝다

단군신화의 진짜 인간관은 웅녀에게 응축되어 있다. 바로 문명화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인간,미래의 새로운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인내할 수 있는 인간,변화를 위한 자기 통제를 해내는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타율에 의해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었다면 곰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것이다. 자기통제를 통해서 그 과정을 완수 했을 때 곰은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제법 나이 든 인간으로서 나는 시간이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따라서 부질없는 집착들로부터 놓여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올해 안에 무엇을 기어이 끝내겠다는 결심 같은 건 되도록 하지 않을것이다. …어떤 일들은 그 시절에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게 되곤 한다. 그런 것들 말고는 나의 일상을수호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변함없이 달걀을 삶을 것이며, 달걀을 다 먹은 뒤에는 그날의 글을 쓰고, 오후가 되면 오랜 시간 걸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산책길 커피숍에서 그날의 커피를 마시고, 과묵한 점장이 지키고 있는 작은 책방에들러 책을 살 것이다. 나는 왜 나일까 같은 질문은 그만하고 사랑이라는 기적에 대해 과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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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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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좋아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약간의 재산을 눈에 보이지 않는자산에 투자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완고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기술이나 노동을 돈벌이 수단으로 거래하지 않고부탁받은 모든 일을 당연한 듯 흔쾌히 처리한 후 즉각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빚을 진 기분을 느낄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전갈을 보낼 수가 없어요. 당장 머물 수 있는 곳에 묵기 때문에 사는 곳이 계속 바뀌거든요." 요리사가 대답했다. "그러니 편지를 보낼 수도 없지요. 하지만 그가 알 수 있게 말해둘게요.

나는 그 특이한 사람에 대해 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집도 없고 주소도 없는 진정한 철새였다. 하지만 그보다더 연락하기 쉬운 사람도 없었다. 일종의 무선전화가 그를 도시 전체와 연결해 주었다. 길에서 만나는 아무에게나 "안톤이필요해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다음 사람에게 말하고 그렇게 계속 이어져 결국 안톤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정말로, 그날 오후에 그가 우리 집에 왔다. 그는 초롱초롱 맑은 눈으로 집안 곳곳을 살폈고, 정원을 지나면서 덤불을 베어내고 어린나무를 이쪽으로 옮겨 심으라고 조언했다

"이게 좋겠어."
그는 보석상에서 반지 하나를 고른 백만장자처럼 말했다.
그리고 어떤 물건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아니라, 매장에 전시된 물건을 가격도 묻지 않고 사는 신사처럼 품격 있게 말을이었다.
"그래, 이거야." 그는 흡족해하며 말했고, 다른 물건들도 꼼꼼히 살폈다. "저기 등산화는 잘제르가센에 사는 프리츠에게줘. 저런 게 필요하다고 했거든. 그리고 셔츠들은 플라츨에사는 요제프에게 주면 직접 수선해서 입을 거야. 원한다면 내가 가져다줄게."

때때로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나는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이 남자를 떠올린다.

"분명 내 작품을 보고 싶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여기에는보다시피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일요일에 뫼동에 있는 우리 집에 저녁 먹으러 오세요. 거기라면 식사 후에 몇 가지를보여줄 수 있어요."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 항상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과하게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관대하다. 이것이 첫 번째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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