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매일 ‘판에 박은 듯한 일과‘를 반복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려면 그 이외의 일은 가능한 한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편이 좋으니까요. 계절 변화를 감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싹튼 꽃, 바람에 날리는 마른 잎, 모퉁이를 돌았을 때 뺨에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 차 같은 것으로 사계의 변화를 느끼는 겁니다. 다른 조건을 모두 똑같이해 두지 않으면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과학 실험도똑같습니다.

그러니 의미는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술술 읽을 수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음독音讀, 즉 소리내어 읽기를 감당할 수 있게 써야 합니다. 쉬엄쉬엄 중간에 한숨 돌리며 읽어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글이나 리듬이 나쁘거나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 파열음이 많은문장은 음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음독할 수 있는 문장은 독자의 머리(뇌)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갑니다. 몸으로 스며들어 독자의 신체 일부가 됩니다.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글이 이미 독자의 몸의한 부분이 된 시점에 독자는 무심코 과거에 읽었던 책의한 구절을 입에 담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심코‘입니다. 몸 깊숙한 곳에서 그 말이 떠오르는 겁니다.
작가로서 최고 영예는 자기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몸에 스며들어서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어느 날 그사람의 말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저의 뇌 안에 존재하는, 한없이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는 제대로 씹어 삼키지 못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 있던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작은 조각들은거기 처음 저장되었을 때부터 제게 쭉 "빨리 설명해 봐" 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몇십 년째 그러고 있는 조각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제가 가진 이해의 틀에는 아무래도 수납할 수 없었던 ‘반증 사례들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예컨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중에 "아! 이게 그건가?!" 하며 무릎을 치게 되는 때가 찾아옵니다. 몇십 년이나 제대로씹어 삼킬 수 없어서 목구멍에 걸려 있던 작은 가시를 쏙하고 씹어 삼킬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는 거죠. 바로 이 "이게 그거잖아"의 납득 방식을 저는 매우 좋아합니다.

이때 ‘이것‘과 ‘그것‘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더 좋습니다. 철학 명제와 문학의 한 구절이 일치한다거나 최근 정치 이론의 한문장이 노가쿠‘의 문구와 똑같다거나 종교의 계율과 구기운동 규칙에서 정하는 금기가 같은 것을 발견한 순간 "아! 이게 그걸 말하는 거구나 하며 느끼는 상쾌함은 글로 담아 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저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큰 목소리로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쩌면 자기가 이전에 입에 한번 담았던 말에 주저앉는 것이나매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성숙해진다는 것은 연속적인 ‘자기 쇄신‘을 이루는 일입니다. 쇄신, 즉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워지려면 이전까지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사념과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을 품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겠지요. 그런데 그런 새로운 사념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휘꾸러미 안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를 손수 찾으면서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당연히 확실하고

"士別三日, 即更利目相待"(사별삼일, 즉갱괄목상대)라는오래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모름지기 사흘을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성숙관‘입니다. 사흘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될 정도로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이루는 것이 목표라는 겁니다. ‘진정한 자기‘ 같은것에 주저앉고 매달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배운다‘는 식의 화법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배움이 정말로 일어나면 ‘나‘라는 주어는 더 이상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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