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어린아이라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과 어른이라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일이 있다.
_야마모토 사호, 정은서 옮김, [오카자키에게 바친다11 (미우, 201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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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가온 잠잠한 마음은 오늘의 단어가 될 것이다. 그 단어들을 모아보면 그제서야 펼쳐지는 지난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그 이야기들을 책을대하듯이 어루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 또한아는 단어, 아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추게 만드는 단어 하나가 있다면 읽기를 멈춰도 좋다. 대신 읽게 될 내 이야기가 내안에서 펼쳐질 때, 나는 나에게 숙인다.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순간 책은 그저 고마운 존재가 된다.

어떤 시작은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 순간을만나기 위해 몰랐던 세계로 고개를 숙인다. 어쩌면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겪은 일보다도 내 안에 선명하게 남을지도 모른다. 그 자국이 언젠가의 나를 만들기도 하면서, 우리의 어떤 면은 느지막이 자라나지 않을까. 그렇기에 오래오래 읽으며 지내고 싶다.

계속된다는 말은 반복된다는 말과 달라서, 계속되는 동안에 찾아오는 봄은 매번 다른 봄이다. 그렇지만 아름답다는 점에서는또 같고, 이런 아름다움에는 면역이 되지 않으므로 어김없이 감탄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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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그 끝나지 않는 고통을 향해서 다시걸어 내려올 수 있다. 거기에 인간 실존의 위대함이 있다.

21세기가 되었어도 시시포스 신화는 계속된다. 끝을모르는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연장되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을 노역으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킬지도 모른다. 늘어난 여가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는 사회를 창출하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모른다. 인간은마침내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위를 산정에 올려다 놓고 시야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감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없어진 인간에게는권태가 엄습하기 마련.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 시시포스는 자기가 알아서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기 시작한다. 권태를 견디기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공부하는 삶이 괴로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관직에서 쫓겨나서 은둔할 때 지은『운주사기(雲住寺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얽매이지 않는 존재라면 구름만 한 것이 없는데, 구름마저도 마음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구름마저도 산정에 머물기를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구름의 마음이다. 사물에 고유한 경향이 존재하는 한, 얽매임이 있을 수밖에없다는 것이다. 정말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구름 같은 사물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인간이다. 마음을 잘 비워낼 수만 있다면, "만물과 서로를을 뿐만 아니라 천지와 서로를 잊고, 천지를 서로 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잊을 것이다. 구름은 있었다 없었다를 반복하며 산정에 얽매일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만큼은노력 여하에 따라 훨훨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난 지옥을 아주 잘 알아요. …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가까운 사람을 잃은지옥 같은 마음 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넓은 시야를 찾아 언덕을 찾아갈 계획이다. 언덕을 넘어 높은 산을 찾아갈 계획이다. 육신의 고단함 이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침범할 수 없도록 숨을헐떡이며 아주 높은 산에 오를 계획이다. 계곡과 산마루를 지나 마침내 산정에 다다르면, 시집 『여름언덕에서 배운 것』에 실린 ‘시인의 말‘을 떠올릴 계획이다. 시인 안희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러한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왜일까?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건, 내가 여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것은 삶의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바깥으로 나간 이는 모두 죽었다. 우리가 자기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밖으로 완전히 나간 이는 모두 미쳤다.

사람들은 여우를 비웃지만, 나는 여우에게 공감한다.
저렇게 정신승리를 하지 않고 진짜 포도를 따 먹으려면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고도의 트레이닝을 통해 점프력을키워서 따 먹거나, 다른 여우와 합작하여 나무에 기어올라 포도를 따 먹어야 한다. 둘 다 힘들다. 어느 세월에 트레이닝을 해서 몸짱이 되고, 어느 틈에 다른 여우를 섭외한단 말인가. 그에 비해 정신승리는 ‘가성비’가 좋다. 저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라는 정신승리를 통해 여우는 안정을 되찾는다.정신승리에 맛 들이면 승리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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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올리버는 말한다. 그 검은곰을 생각하다 보면, 남는 질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이 광활한 우주는 마음이 없다. 조물주는 모든 것을만물에 맡길 뿐, 사사로이 간섭하지 않는다. 이 무심한 세상에서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 희귀한 존재로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묻는다. 나무의 침묵에 대고 발톱을 날카롭게가다듬은 뒤,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하러 갈 칠흑처럼 검은곰을 생각하며 묻는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세상에는 악이 버섯처럼 창궐하고, 마음에는 번민이 해일처럼 넘치고, 모든 것은 늦봄처럼 사라지는데, 어떻게 이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가.

내내 <벌새>는 한국의 건물이나 교량 안전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벌새〉는 성수대교붕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왜 일어나야만 했는지를 탐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살아온 일상이 일견 깔끔해 보여도 사실 폐허임을 꼼꼼히 증명한다. 상처받은자존심으로 일그러진 가장, 폭력으로 얼룩진 남매, 거짓과 관성 속에서 나날을 이어가는 부부, 교육목표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학교, 그 모든 삶의 국면에서 버티고 있는사람들의 표정마저 모두 폐허임을 상기시키는 긴 여정을거쳐, 성수대교는 비로소 무너진다. 그리하여 관객들은성수대교가 하나의 부실한 물리적 구조물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상징하는 폐허임을 납득하게 된다. <벌새>를 본다는 것은 이 사회가 폐허가 되는 과정을추적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폐허였는데, 아 폐허였구나하고 새삼 깨치는 과정에 가깝다.

부서진 성수대교는 말한다. 삶은 온전하지 않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고, 과거에 무엇인가 돌이킬수 없이 부서져버렸다고, 현재는 상처 없이 주어진 말끔한 시간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의 잔해라고, 그러나 그 현재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폐허를 돌이킬 수는 없으나 폐허를 응시할 수는 있다고, 폐허를 응시했을 때 인간은 관성에서 벗어나 간신히 한 뼘 더 성장할지 모른다고, 성장이란 폐허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폐허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일이라고. 마치 W. G. 제발트의 소설이그러한 것처럼, 〈벌새〉는 우리를 폐허 속으로 데려가고,
그 폐허 속에서 우리는 영지 선생님이 태우는 담배 연기처럼 고양된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영화의 주인공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산다. 패터슨은 패터슨시 출신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좋아한다. 버스 드라이버인 패터슨을영화배우 애덤 드라이버가 연기한다. 이러한 반복이 이 영화에서는 중요하다. 반복이 패턴을 만들고, 패턴이 패터슨의 일상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든다.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그 규칙적으로 작동되는 세계 속에서 당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전해온다. 그 신호에 반응하는 마음이야말로 일상의 어둠에서 인간을 잠시 구원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정처 없이 무너져내릴 때, 졸렬함과 조바심이 인간을 갉아먹을때, 목표 없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자기 확신이 그만무너져내릴 때, 인간을 좀 더 버티게 해줄 것이다.

나도 패터슨처럼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잠자리에 들기 전 산책을 하고, 샤워를 한 뒤, 페이스북에 그날밤에 들을 음악을 올리고, 그날 갈무리한 책과 영상을 보다 잠든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달걀을 삶는다.
타원형의 껍질 안에 액체가 곱게 담겨 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정도로 달걀을 잘 익힐 수 있다. 오래도록 이 일상을 지속할 수있기를 바란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오는 초조함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오는 허탈감도 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사라질 내 삶의 시를 쓸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패터슨은, 아침 6시 조금 넘어 일어나,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옷을 입고, 출근하고, 근무하고, 퇴근하고, 동네 바에 들러 한잔한다.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씻고, 잠자리에 든다. 그 일상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흔히영화라고 하면, 대개 이러한 일상 활동 끝에 발생하는 극적인 일이나 과잉된 감정을 다루기 마련이지만, <패터슨>은 일상의 반복 그 자체를 다룬다. 그 반복되는 일상은 어떤 절정으로도 시청자를 인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상은 조용히 진행되는 예식처럼 잔잔히 아름답기에, 시청자는 몰입해서 영화를 볼 수 있다. 일상에의 몰입감, 그것이 이 영화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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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환기시키는 이 그래픽 서사에서저자는 나치 독일의 무거운 역사와자신의 가족사를 둘러싸고 분투한다."
"이 작품에는 ‘기억하고‘ ‘되돌아보고‘ ‘바로잡고‘ ‘바로 세우려는‘ 쉼 없는 노력,역사의 전모를 파악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다."

"잠들지 못하는 양심"
세계 속에서 독일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놀라운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전후 2세대 독일인의 내면 풍경을 처음 엿볼 수 있었다. 전후 2세대의 내면세계가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이 세대가 68혁명 이후 이루어진 교육개혁에 의해 탄생한 첫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우슈비츠 교육‘이라고 불리는 과거청산 교육을 받은 최초 세대에게 나치 과거가 어떻게 이해되고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전후 2세대 독일인에게 ‘독일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작품은 새로운 세대 독일인의 정체성 문제를 깊이 탐색하고 있다. 정신적 고향을 상실하고 과거의 시간을 부정해야 하는 독일의 젊은 세대의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오늘을 사는 독일인에게 가장 예민한 정체성 문제를 이 작품은 추적한다. 그리고독일인으로서 부정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프게 묻고 있다. 단아한 다의성의 언어가 주는 깊고 처연한 여운이 독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머문다."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독일의경우 68혁명 이후 과거청산이 상당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우리의 경우 지난 한 세기동안 과거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는 ‘기이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식민시대의과거와 냉전시대의 과거라는 이 ‘이중의 과거청산‘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어찌 보면 독일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책이다.
세계 어느 나라 독자보다 한국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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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에 따르면 "과거청산"이란 "과거에 종결점을 찍고 가능하면 그것 자체를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을 진지하게 정리하고, 밝은 의식으로 과거의 미몽을깨부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과거청산에충실한 작품이다. ‘진지한 정리‘를 통해 ‘밝은 의식‘으로 ‘과거의 미몽‘을 깨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의 반복을 막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이라고 본다. 그는 "주체로의전환"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그러한 비행을 저지를 수 있도록 만든 메커니즘을 인식해야하고,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메커니즘을 보여주어야 하며,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일깨움으로써 또다시 그렇게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죄는 살해당한 자에게있지 않다. 죄가 있는 것은 오직 아무런 소신 없이 증오와 공격적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낸사람들이다. 그러한 무소신은 극복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외부로 돌리지말아야 한다. 교육은 비판적인 자기성찰을 위한 교육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나는 독일인입니다』는 아도르노의 이러한 교육담론에 의해 1970년대에 이루어진 교육개혁의열매라고도 볼 수 있다. 노라 크루크가 가족사를 통해 과거와 만나는 태도는 바로 아도르노적의미의 ‘과거청산‘의 모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라 크루크가 자신과 가족의 역사를 진지하게돌아보는 과정은 그 자체가 독일의 과거청산 교육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반증하고 있다.

진실에 대한 집요한 추구가 이 책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작고 사소한 것‘
에 있다. 역사를 지배자들의 ‘정의 권력‘(Definitionsmacht)에 내맡기지 않겠다는 것, 사적진실을 통해 공적 해석의 폭력에 맞서겠다는 강한 의지가 이 아름다운 책에는 있다.

정체성은 잡으려 하면 할수록 달아나는 그림자와 같다. 과거로의 여정을 통해 정체성의 근원에접근할 수록 노라 크루크의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점 더 희미해진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만존재하는 나라, 국기도 국가도 없고, 국민이라고는 단 한 사람뿐인 나라에서 온 스파이 같다."
크루크는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게 된다.
독일인으로서 부정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작품은 아프게 묻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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