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그 끝나지 않는 고통을 향해서 다시걸어 내려올 수 있다. 거기에 인간 실존의 위대함이 있다.
21세기가 되었어도 시시포스 신화는 계속된다. 끝을모르는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연장되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을 노역으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킬지도 모른다. 늘어난 여가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는 사회를 창출하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모른다. 인간은마침내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위를 산정에 올려다 놓고 시야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감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없어진 인간에게는권태가 엄습하기 마련.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 시시포스는 자기가 알아서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기 시작한다. 권태를 견디기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야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 있다. 공부하는 삶이 괴로운가?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관직에서 쫓겨나서 은둔할 때 지은『운주사기(雲住寺記)』에서 이렇게 말한다. "얽매이지 않는 존재라면 구름만 한 것이 없는데, 구름마저도 마음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구름마저도 산정에 머물기를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바로 구름의 마음이다. 사물에 고유한 경향이 존재하는 한, 얽매임이 있을 수밖에없다는 것이다. 정말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구름 같은 사물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인간이다. 마음을 잘 비워낼 수만 있다면, "만물과 서로를을 뿐만 아니라 천지와 서로를 잊고, 천지를 서로 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잊을 것이다. 구름은 있었다 없었다를 반복하며 산정에 얽매일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만큼은노력 여하에 따라 훨훨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난 지옥을 아주 잘 알아요. … 사람들이 지옥을 장소라고여기는 이유는 단테를 읽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난 지옥을 상태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가까운 사람을 잃은지옥 같은 마음 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넓은 시야를 찾아 언덕을 찾아갈 계획이다. 언덕을 넘어 높은 산을 찾아갈 계획이다. 육신의 고단함 이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침범할 수 없도록 숨을헐떡이며 아주 높은 산에 오를 계획이다. 계곡과 산마루를 지나 마침내 산정에 다다르면, 시집 『여름언덕에서 배운 것』에 실린 ‘시인의 말‘을 떠올릴 계획이다. 시인 안희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이 시집이 당신에게도 그러한 언덕이 되어주기를.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
왜일까?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건, 내가 여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것은 삶의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바깥으로 나간 이는 모두 죽었다. 우리가 자기 진면목을 알기 어려운 것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밖으로 완전히 나간 이는 모두 미쳤다.
사람들은 여우를 비웃지만, 나는 여우에게 공감한다. 저렇게 정신승리를 하지 않고 진짜 포도를 따 먹으려면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고도의 트레이닝을 통해 점프력을키워서 따 먹거나, 다른 여우와 합작하여 나무에 기어올라 포도를 따 먹어야 한다. 둘 다 힘들다. 어느 세월에 트레이닝을 해서 몸짱이 되고, 어느 틈에 다른 여우를 섭외한단 말인가. 그에 비해 정신승리는 ‘가성비’가 좋다. 저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라는 정신승리를 통해 여우는 안정을 되찾는다.정신승리에 맛 들이면 승리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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