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의 멘션s
탁현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매스미디어의 반대편에 자리한 소셜미디어는 어떠한가? 가장 큰 차이는 정보의 전달이 수평적이라는 점이다. 매스미디어가 정보를 전달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려버리는 것과는 달리 소셜미디어는 다만 그것을 횡적으로 전달할 뿐이다. 여기에 대한 가치판단은 철저하게 개별 사용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정보의 전달력과 파급력은 방법만 다를 뿐 양자의 힘이 비등(?)하지만, 정보의 수용은 ‘강요’와 ‘선택’으로 확연히 다르다. 인터넷을 주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40대 미만 세대에게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보다 스스로 선택하게끔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기획자를 수식하는 가장 관용적인 표현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한’, ‘불가능을 극복한’ 뭐 이런 말들이 있는데,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기획이 아니라 기적이다. 기획은 그저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획을 기적과 혼동해서 사용하거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들이 더러 있다. 더러 있지만 틀렸다. 기획이란 가장 가능한 것들을 골라내서 그것들이 아무 문제가 없도록 조율하고 배려해서 하나의 완성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능력 있고 훌륭한 기획자란 못할 줄 알았던 것을해내는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가능할 법한 일을 문제없이 만들어 내는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라는 말씀이다.

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대게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그것을 다르다고 하지 않고 틀렸다고 한다.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기획자는 자신의 생각이 그저 다를 뿐이고 그것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람에게 끝없이 기적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결국 상상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꾸준한 관찰과 사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질을 찾아 헤매는 노력이 결국 상상력이라는 말씀이다. 없는 것을 찾아 헤매지 말고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라는 사실을잊지 말자.

연출가란 무대로 향해 있는
관객의 뒤통수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의 뒷모습은 때론
앞모습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공연을 연출하다보면 구성이나 내용에 따라 관객들의 뒤통수가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된다.(물론 이건 심리적인 것이다. 진짜로 뒤통수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대가 지루해질 무렵 흔들리는 고갯짓으로도 알 수 있고, 숙여지거나 젖혀지는 목과 머리의 각도로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얼굴의 표정보다 훨씬 정확하다.

사실 우리는 저마다 상대를 마주할 때 얼굴을(로) 속이는 방법 하나쯤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얼굴 뒤 뒤통수를 속이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진심이 궁금하다면 그의 말을 듣지 말고 그의 행동을 보라고 했다. 뒤통수는 생각보다정직하다. 무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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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떠올렸을 때 과정이 수월하게 그려지면 우리도모르게 과신에 빠져든다. ‘이쯤이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유창성 효과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안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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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의 멘션s
탁현민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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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식인과 예술가는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부지런해야 한다.
그래서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알려줘야 한다.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좀 더 훌륭했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나로 살고 싶다. 그런데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세상을 통해 내가 나를 바라보면 자꾸 낯설다.
책을 마무리하는 시점인데도 신기하게도 내가 했던 말과, 생각과, 공연과, 공간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놓고 보면 참 낯설게 보인다. 저 말이 내가 했던 말인가 싶은 게 있는가 하면, 저 공연을 내가 연출했나 싶은 것도 있다.
혹 당신도 그럴 때가 있지 않으신가? 분명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과, 일과, 생각이 어느 순간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것 말이다.
내가 나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아직 내가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나‘ 사이에 뭔가 다른 것들이 막아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여기에 실린 글들은 최소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신앙은 증거가 없어도 믿는 것이다.
어느 대학의 면접시험에서 성선설을 믿는지, 성악설을 믿는지를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학생이 대답했다. "성선설을 믿습니다." 면접관이 그 이유를 묻자 다시 학생이 대답했다. "성악설을 믿는다면 세상이 너무 살고 싶지 않을 것같아서요."

매스미디어의 시대에는 정보를 수용하는 것이 능력이었지만, 소셜미디어의 시대에는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능력이다. 브로드캐스팅이 아니라 내로우캐스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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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중요하지 않은 시나리오는 쓰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랑이아닌 것은 쓰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 속에 들어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은 죽으니까. 그리고 이상하게도…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어졌다. 관객과 시청자들이 원하고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이전의 나는 나를 위해서 썼다.
그렇게 「아가씨」와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해서 나는 ‘엄마’라는 사람이 되었다.

그 속에서 내가 찾은 해답은 시대적 분위기나 세상의시선으로 봤을 때 이것이 괜찮은 일인지 내가 잘 해내고있는지의 성과 여부에 대해 물을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지않으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서는 할 말이있었다. 소설을 쓰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한 문장이 풀릴 때, 이 문장을 만나려고 그렇게 썼다 지웠구나,
깨닫게 되는 순간, 들인 시간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가성비같은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나 환산이 되지 않는 희열이머리에서 발끝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아이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도 어떤 겹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를수 있다면, 인간의 성장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자유로워지거나꽃이 피듯 눈부신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일을 통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되는일인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키가 자라는것처럼 어떤 길을 지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축하할 일이고, 아이의 실패는 내가 위로할 일일 뿐이다.
아이의 성취와 실패를 나의 책임으로 내가 통제해야 할 일로생각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것이다. 아이가 실패했을 때,
상처를 받았을 때, 아이를 품어주고 아이를 지켜주고 아이를달래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없게 된다. 아이와 나 사이를분리해야만 나는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타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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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 걱정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무얼 걱정하는지 명확히 하기만 해도 진실로 걱정할 것은 없다고생각했다. 그는 걱정(번뇌)을 초탈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바로 여기에 걱정의 긍정적 의의가 있다.

걱정은 타인과의 소통의 고리가 되기도 하고, 나만의 독자적 생명력이 되기도 한다. 걱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세계 사이의 소통을 촉발한다. 걱정에는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이중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할 때의 뜻대로‘
에는 보통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기대 혹은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기대 혹은 시선이다. 즉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와 남들의 기대와 소망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우리가 기대어 있던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잠시 떼어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일순간의 분리가누군가에게 사색을 지속하는 역량을 주고, 잠시나마 자아초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할 뿐이다. 찰나의 도약으로나마초월의 가능성을 엿본 사람은 다시금 현실의 타성에 젖는다해도, 천천히 방향을 틀어 결국에는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책상 같은 사물은 사람보다 훨씬 단순하게 존재한다. 사람은 반성을 통해 스스로 변화해갈 수 있지만, 자아의식이 없는 책상은 영원히 외부 요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고정적 · 피동적 상태에 있다. 누가 옮기거나 부수지 않는 한 책상은 원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이렇게 피동적인 존재 형태가 바로 즉존재(being-in-itself)다.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는본질적으로 대립한다. 책상은 의식이 없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로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의식이 있기에 미완성의 상태에서 변화해간다.

사람이 책상보다 복잡한 이유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일면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존재의 일면은 출생,
과거, 부모 등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이는 책상과 마찬가지로 완성돼 있으며 고정적인 것이다. 한편 대자존재의 일면은 아직 하지 않은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다. 가령
‘내일은 운동하러 가겠다‘처럼 미래에 속한 일은 고정적이지않다. 내일 다른 일이 생기면 운동 계획은 얼마든지 없어질수 있다. 운동하러 가겠다는 계획은 줄곧 미발생의 단계에만머물러 있을 뿐이다. 언제 어떻게든 변동될 수 있는 이런 상태는 우리의 미래를 유동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만든다.

첫째, 퇴사 여부는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라는 문제가 따른다.
둘째, 만약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해도, 당신은 살아있는 한언제든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선택을 새롭게 다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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