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해 걱정이 생겨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며, 무얼 걱정하는지 명확히 하기만 해도 진실로 걱정할 것은 없다고생각했다. 그는 걱정(번뇌)을 초탈함으로써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바로 여기에 걱정의 긍정적 의의가 있다.

걱정은 타인과의 소통의 고리가 되기도 하고, 나만의 독자적 생명력이 되기도 한다. 걱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세계 사이의 소통을 촉발한다. 걱정에는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이중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까 걱정할 때의 뜻대로‘
에는 보통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기대 혹은 소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기대 혹은 시선이다. 즉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의미와 남들의 기대와 소망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우리가 기대어 있던 일상으로부터 우리를 잠시 떼어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일순간의 분리가누군가에게 사색을 지속하는 역량을 주고, 잠시나마 자아초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할 뿐이다. 찰나의 도약으로나마초월의 가능성을 엿본 사람은 다시금 현실의 타성에 젖는다해도, 천천히 방향을 틀어 결국에는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책상 같은 사물은 사람보다 훨씬 단순하게 존재한다. 사람은 반성을 통해 스스로 변화해갈 수 있지만, 자아의식이 없는 책상은 영원히 외부 요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 고정적 · 피동적 상태에 있다. 누가 옮기거나 부수지 않는 한 책상은 원래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이렇게 피동적인 존재 형태가 바로 즉존재(being-in-itself)다.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는본질적으로 대립한다. 책상은 의식이 없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로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의식이 있기에 미완성의 상태에서 변화해간다.

사람이 책상보다 복잡한 이유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의일면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존재의 일면은 출생,
과거, 부모 등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이는 책상과 마찬가지로 완성돼 있으며 고정적인 것이다. 한편 대자존재의 일면은 아직 하지 않은 행동을 계획하는 것이다. 가령
‘내일은 운동하러 가겠다‘처럼 미래에 속한 일은 고정적이지않다. 내일 다른 일이 생기면 운동 계획은 얼마든지 없어질수 있다. 운동하러 가겠다는 계획은 줄곧 미발생의 단계에만머물러 있을 뿐이다. 언제 어떻게든 변동될 수 있는 이런 상태는 우리의 미래를 유동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만든다.

첫째, 퇴사 여부는 맞고 틀림이나 옳고 그름이 없다. 다만책임을 지느냐 마느냐라는 문제가 따른다.
둘째, 만약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해도, 당신은 살아있는 한언제든지 미래나 과거에 대한 선택을 새롭게 다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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