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전후 이탈리아를 휩쓴 영화 장르인 네오리얼리즘이야말로 위대한 인본주의의 학교라고 확신합니다. 데 시카의 <아이들이 우리를지켜본다>는 그 시대를 앞서 예견한 작품인데, 오늘날에도 혼인 준비과정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입니다. 저는 주례를 설 때마다 이 영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로마, 열린 도시>의 장면들은 기억에서지울 수 없이 새겨져 있습니다. 안나 마냐니와 알도 파브리치는 우리의 스승이었죠. 투쟁의 스승이자, 희망의 스승이며, 지혜의 스승이었습니다.
"주름을 하나도 지우지 마세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 그대로 두세요. 이 주름이 생기는 데 평생이 걸렸거든요." 이탈리아에서 ‘난나렐라‘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이처럼 지혜로운 여성이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의 펠리니 감독, <달콤한 인생> 시기까지의 펠리니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특히 열여덟 살에 접한 <길>이라는 영화에서는 제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기까지 했죠.
‘길‘ 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떠올리게 하는 극중인물인 광대 마토는 심란한 트럼펫 연주자 젤소미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믿지 않겠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쓸모가 있어. 자, 저기 저 돌을 한 번 봐. 예를 들면…………… "어느 돌요?" "이거.... 아무 돌이나…………. 그래, 이 돌도 무언가의 쓸모가있지. 이 작은 돌조차도." "무슨 쓸모가 있나요?" "쓸모라.......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그걸 안다면, 넌 내가 누구일 것 같아?" "누군데요?"
다리를 놓는 이들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장벽을 쌓는 이들은 결국 자신이 쌓은 장벽에 갇혀 버리고 말 것이며, 그 장벽은 가장 먼저 그들의 마음을 옥죄게 될 것입니다.
복자는 모든 이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건강한 불안sana inquietrudine 라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건강한 불안 없이는 삶이 결코 참된 온유함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비겁함과 평범함, 소심함의 나락으로 떨어져 생기도 진정한 아름다움도 잃고 맙니다.
인퀴에투디네inquietudine‘는 라틴어 ‘inquietudo‘에서 유래한 이탈리아어로, 문자적으로는 ‘불안정함‘, ‘안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에 나오는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마음이 ‘찹찹하지‘ 않습니다Inquietum est cor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라는 구절과 연관이 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찹찹함‘은 인간 영혼의 본질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 하느님을 향한 근원적 그리움과 갈망을 표현한다. 교황이 자주 언급하는 ‘inquietudine‘ 역시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내적 움직임, 영적 성장을 위한 건강한 자극을 의미한다. 특히 청년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상을 향한 열망,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려는 역동적 힘을 가리키는 긍정적인 개념이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 불안정이나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영혼의 생명력과 하느님을 향한 본질적 지향성을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라 할 수 있다(김영훈, "프란치스코 교황의 청년 이해: ‘인퀴에투디네‘(inquietudine) 개념을 중심으로", <신학전망>, Vol. 212, 2021.3., pp. 113~154 참고).
"증오하는 순간 네 영혼은 길을 잃고, 네 마음속 감정 하나로 모든축복이 네게서 멀어질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모두 네게 징벌로 다가올 것임을 명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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