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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1초들 - 곽재구 산문집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평점 :
노렇게 물든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눈길을 잡고 해가 지면 싸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하는 요즘. 가을이다.
빨리 더위가 가기만 기다렸다. 그러다가 맞이한 가을은 정말 좋다. 바람이 고맙고, 예쁘지만 떨어질 때는 미련 하나 없는 낙엽도, 심지어는 말 안 듣는 아들마저 무지 예뻐 보인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주변을 살필 수 있는 건 가을이기 때문이다.
곽재구 시인의 이 책에선 가을 냄새가 풀풀 난다. 하지만 시인이 이 글을 쓴 곳은 시원한 가을과는 거리가 먼 인도. 사십몇도가 넘는 열탕 같은 더위 속에서 1년 반 동안 산 이야기인데도 가을 분위기를 풍긴다. 글 속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산티니케탄은 타고르의 고향. 벵골어를 배워 타고르의 시를 번역해보겠다는 꿈을 안고 산티니케탄을 찾은 시인에게도 더위를 이기는 특별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그 동네 사람들처럼 똑같이 사는 것뿐. 더워지기 전에 일어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정전이 되면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짜이를 마시러 나가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 순간을, 1초를 즐기며 산다.
우리의 1960년대 농촌과 비슷한 산티는 불편하기 그지없는 마을이다. 정전도 수시로 되고, 큰 도시에 한 번 나가려면 1박 2일씩 걸리고, 동네에서 체류하는 외국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끝없이 이어지고... 하지만 곽재구 시인은 불편하고 낯선 도시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소박한 동네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애정을 표현한다.
곽재구는 교수의 신분이지만 산티 사람들에게 시인으로 다가선다. 카스트라는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교수는 최고의 계급이다. 하지만 높은 계급이 아닌 따뜻한 시선을 가진 시인으로 산티의 가난한 사람들과 살아간다. 살아간다...
욕심이나 경쟁도 없고 가난도 큰 불평거리가 아닌 사람들, 그냥 함께 살아갈 수 있어서 행복한 사람들. 물질 문명에 길들 대로 길든 시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순간순간 행복해진다. 나도 같이 행복해진다.
벼룩시장에 종비배를 접어 팔러 나온 어린 소녀에게도, 늙은 릭샤왈라(자전거 택시기사)에게도, 허름한 짜이 가게(찻집) 아가씨에게도,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마시(시간제 가정부)에게도 삶의 철학을 배운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살아 있는 타고르를 만난다. 특히 긴 지면을 할애한 마시들과의 에피소드는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아름다움은 발견해내는 이의 몫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눈을 가진 곽재구는 그 재주가 탁월하다. 그냥 스쳐 지나갈 풍경, 그냥 흔하디 흔한 사람, 오히려 짜증이 날 상황에서도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해고 있으니...
가을 냄새 나는 이 책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