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로 <도가니>를 보러 나가려고 준비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누군지 이름이 안 떠서 받을까 말까 하다 조심스럽게 "누구세요?" 하니 "지지배, 나야 박**!"
만난 지는 10년도 더 된 것 같고, 전화 통화를 한 지도 4~5년은 된 듯하다. 오랜만인데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구구절절 수다를 떨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뒷전에 두고 유난히 지지고 볶은 일들이 많았던 우리들이다. 술 잘 먹는 애들도 많았고, 잘 우는 애들도 많았고, 노래 잘하는 애들도 많았고, 기타 잘 치는 애들도 많았고, 시나 소설을 쓰는 애들도 많았고, 시나 소설을 읽는 애들도 많았고, 욕 잘하고 쌈 잘하는 애들도 많았고, 데모하다 학교 짤리는 애들도 많았고, 과커플도 유난히 많았던 우리 동기들.
졸업한 지 20년이 넘어도, 만난 적이 없어도 동기들 소식이 반갑고 보고 싶고 그렇다. 단지 4년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그나마 군대 간 남자 애들은 2년 정도였고.
1학년 때부터 과커플로 유명세를 떨쳤던 그 친구는 남자 동기 김**(--> 이 남자 한동안 내가 짝사랑 했음)이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했다. 2년 터울로 딸만 셋을 두었는데 큰애가 벌써 고3이란다. 힘들겠다고 하니 자기가 딸 때문에 불경 공부를 다 하고 있댄다. 결혼 전 성당에 다녔던 친구라서 왜? 하고 물으니 불교를 믿는 시댁으로 시집가는 바람에 지금은 부처님께 더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됐다고. 고3 딸아이를 위해 백일 기도도 하면서...
긍정적이고 화끈했던 성격을 생각하면서 "너 같은 애가 웬 백일기도?" 친구는 한마디로 정리해줬다. "너도 애들 고3 되어 봐라 얘. 믿고 싶은 구석이 많아진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남편과 주말 부부(금요일에 내려와서 월요일 올라가는)라고 했더니 "어머,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나!" 결혼 10년이 지나면 가끔 남편이랑 떨어져 살고 싶은데 저절로 그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냔다. 난 시댁도 멀고 친정도 멀고 형제들도 멀고 남편도 떨어져 있어서 아예 시댁 근처로 이사 갈까 생각중이라고 했더니 " 야야, 그런 생각은 죽어서나 해라, 다 멀리 떨어져서 그리워하며 안쓰러워하며 지내는 게 최고야. 결혼한 지 오래 되니까 시댁도 친정도 의무만 많아지고 형제도 다 남남이야."
그래도 난 그 친구가 부럽기만 하다. 시댁 식구들은 광릉수목원 근처에, 친정은 김포에 오글오글 모여 살면서 쿵닥거리는 모습이.
매일같이 술 먹는 남편이 지겨워 죽겠다며 험담하는 그 친구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옛날 짝사랑했던 기억 때문일까? 아님 내가 자기를 짝사랑한다고 동네방네 소문 낸 게 생각나서일까?
가을이 가기 전에 동기 모임 한번 하자고 한다. 몸도 마음도 나만큼 늙었을 친구들이 만나고 싶다.
결국 아줌마들 수다가 길어져서 조조 영화는 물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