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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고 1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정조 시대를 살다 간 이옥과 김려라는 두 사람을 통해 역사의 흐름은 물론 진정한 우정과 좋은 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이옥과 김려의 글을 읽다 보면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진다. 짧은 글 한 편에도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다. 200여 년 전의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당시는 그런 소설체의 글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패관소품이라고 해서 금기시되는 시대였으니...
정조는 성리학적 규범을 중시하는 한문체를 원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임금은 <열하일기>를 써서 소설체 문체를 대유행시킨 박지원과 이를 따라 하던 김조순 같은 명문가의 거물급에게 조심하라는 의미로 문체반정을 기획하고 미미한 성균관 유생 이옥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경고하기에 이른다. "봤지? 계속 까물면 너희들도 저 꼴 되니까 시키는 대로 햇!" 뭐 이런...
바로 이 대목 때문에 우리는 이옥과 김려라는 두 사람을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라는 소설 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 때문에 인생이 뒤죽박죽이 된 두 사람이 소설로 다시 태어나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200년 전의 억울함이 좀 풀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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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 그는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비겁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임금의 거센 추궁에도 자신의 문체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 대가로 그는 길에서 인생을 보냈다. ...... 모두들 이옥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한 번만 고개를 숙이면 될 것을 쯧쯧. (본문145쪽)
나의 삶은 그와는 반대였다. 유배를 떠나는 날까지 내게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결정을 뒤엎기 위해 노력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목을 쭉 내밀고 임금의 은전이 닿기를 기대했다. (본문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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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인용한 글을 보면 이옥과 김려의 성격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결국 이옥은 양반들에게는 면제되었던 군역의 의무를 해야 했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과거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돌게 된다. 김려는 친구의 불행이 자신에게도 튈까 봐 이옥을 모른 체했고, 임금의 명에 따라 고리타분한 형식, 비현실적인 비유, 낡은 감성이 깃든 고문체로의 변신에 성공한다. 하지만 스스로도 글을 잃고 벗을 잃었다고 한탄했으니 본심은 아니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이옥과 절친했다는 이유로 불행은 느닷없이 다가와 김려에게도 유배령이 내려졌으니... 왕이 마음만 먹으면 무덤 속 정승도 파헤쳐지는 시대였으니 억울하다 말 한마디 못할 수밖에. 하지만 죽을 고생을 하며 유배지로 가는 동안 비로소 철이 든 김려. 힘든 백성들의 삶을 함께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소설체도 살아났다. 임금이 막는다고 자유로워지고 싶어 꿈틀대는 시대의 흐름까지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
김려가 다시 이옥을 만나는 것은 긴 유배 생활을 끝내고 논산현감으로 있을 때다. 이옥의 아들 우태를 통해 유배를 떠난 친구에게 진 죄을 덜기 위해 유배길을 따라 떠돌며 자신의 글을 모았다는 걸 알게 된 김려는 오랫동안 찜찜했던 이옥이 진정한 친구였음을 깨닫는다. 임금의 지탄을 받을 때 외면한 자기와는 달리 힘들 때 함께 있어주려 한 이옥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김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 대신 그의 글을 지키기 위해 비루한 아부와 청탁까지 하면서 얻은 현감 자리를 내놓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짠해졌다. 김려는 세상으로부터 괄시받고 잊혀진 이옥을 위해 그의 글을 읽어주고 문집을 엮어준다.
우정도 관계도 점점 쿨하고 가벼워지는 세상에 가볍지 않은 책이다. 그리고 따뜻하다. 이옥과 김려, 두 사람을 통해 힘들 때 외면하지 않는 것, 묵묵히 인정해주고 따르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짜 우정이라는 걸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