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구동 선생님의 옛집 2층 사랑방에 들어서니 미모의 젊은 교수님이 강의를 준비하고 계셨다. 중앙대학교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계시는 최유희 교수님. 긴 설명 없이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수업 주제는 <여성 인물의 일과 직업으로 토지 읽기>.
교수님은 토지를 작고 소소한 데 관점을 두는 미시적인 눈으로 읽어보기를 권했다. 토지에는 최참판댁 여성 삼대와 평사리 농촌 여성들, 기생과 카페 여급, 신여성과 여학생 등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현미경을 통해 보듯 자세히 보면 토지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 토지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우리 근대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변화되어가는 의식이 함께 보였다.
평사리 시대의 윤씨부인, 별당아씨, 함안댁 등은 익명의 노동을 요구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윤씨부인은 바우나 간난할멈, 월선네처럼 최씨 문중의 시종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구천이를 임신함으로써 최씨 가문에 동화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한마디로 최씨 가문의 경영자로서의 삶을 살았지 여성으로서의 개인적인 삶을 산 것은 아니라는 얘기.
또 중인 신분으로 몰락 양반인 감평산에게 시집와서 고생만 하면서도 부덕을 닦으려 하고 결국 남편이 최치수 살해범으로 밝혀지자 따라서 자살하는 함안댁도 유교라는 큰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남편을 따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사회의 보이지 않는 강요라는 것이다.
용정 시대를 대표하는 여인 최서희는 장사치로 변신해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반의 계율을 어기고 평민인 길상이와 결혼을 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땅투기와 매점매석을 하고, 최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 친일도 한다. 이렇게 당차게 변신하는 서희도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는데 양반가인 최씨 가문의 정체성을 잇기 위해 김길상을 최길상으로 바꾸는 시도가 그것이었다.
토지 3부 이후에는 다양한 신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스스로 이혼을 결심하는 모던걸 강선혜, 역관의 딸이자 식민지 시대 교사인 임명희, 이혼의 충격을 극복하고 직업전도사로 변신한 길여옥 등은 남자 지식인들 속에서 당당하게 담론을 펼친다. 드디어 여성의 삶이 가문과 남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주체성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사랑보다 대의명분을 더 중요시 여긴 유인실은 박경리 선생이 추구하는 진취적인 신여성의 모습이란다.
변해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삶 속에서 세세히 보여주는 토지 4, 5부를 읽다 보면 한국 여성사를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2010년 6월 19일 강의)
이 날 수업이 끝난 후에는 교장선생님이 박경리 선생님 텃밭에서 키운 상추와 오이, 열무김치를 곁들인 점심을 마련해서 학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박경리 선생님의 손길이 묻어 있는 듯해서 정말 특별했던 상추쌈과 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