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원주에 이사 온 지 반 년이 넘어섰다. 몇 년 동안 남도의 기온에 익숙해졌던 난 원주에서의 겨울이 참 낯설고 추웠다. 그래도 박경리 선생님의 옛집이 같은 단구동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곤 했다. 그리고 봄이 되어 박경리 문학공원에서 주최하는 소설 토지학교에 다니면서 박경리 선생님과 <토지>에 대해 구체적인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했다.
7월 2일 방영된 MBC 스페셜 내 어머니 박경리를 보고는 선생님이 단구동 집을 떠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매지리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요일 오후 비가 한두 방울 내렸지만 토지문화관을 찾아갔다.(집에서 20분 거리) 토지문화관이 처음 생겼을 때 남편 친구가 근무를 한 인연으로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그때 밭에서 일하던 박경리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다시 찾은 토지문화관에서 난 정말 마음이 아팠다. 얼마 전 다녀온 통영과 하동에서 보고 온 박경리 선생님은 정말 귀하디 귀한 분이었다. 지자체에서 얼마나 선생님을 추모하고 <토지>를 귀하게 여기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도시 곳곳에 박경리 선생님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 4, 5부를 쓰고 26년을 사신 선생님의 집, 주인을 잃은 집이 황폐해 보였다. 일반 독자로서 선생님이 그리워 찾아간 선생님의 집에서 난 목이 메었다. 겉모습이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살다 간 집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토지문화관은 선생님이 단구동 집에서 옮겨오면서 후배들의 창작을 위해 지은 공간으로 대부분 선생님의 인세 등 사재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토지문화관 올라가는 길.

문학관이 아닌 문화관이다.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를 모두 끌어안은 선생님의 마음이 보이는 명칭이다.

토지문화관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IMF 때 건물 시공자를 찾다가 현대건설을 찾아가 부탁하니 정주영 회장은 "비나 안 새게 지어 드리겠다"며 겸손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습기가 안 차는 거라고.
토지문화관 1층의 모습. 오른쪽에 강당이 있고, 왼쪽엔 선생님의 유품 전시실이 있다.

사고(思考)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여 능동적인 생명으로 있게 하기 위하여 작은 불씨 작은 씨앗 하나가 되고자 합니다. 토지문화재단 설립의 뜻입니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아주 작은 선생님의 유품 전시실이 있다. 오래되고 낡은 선생님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있자니 선생님의 손길과 화려한 것을 싫어했던 선생님의 소박한 삶이 느껴졌다.


박경리 선생님이 국어사전, 나무장과 더불어 평생 소중하게 생각하셨던 재봉틀. 지금도 선생님의 옷장에는 손수 지어 입던 옷이 가득 들어 있다고 한다. 소설 토지학교에 강의를 하러 오신 한 교수님은 그 옷들을 꺼내 패션쇼를 해도 될 정도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손때가 잔뜩 묻은 담배갑, 안경집, 만년필... 이걸 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더라.

50년 넘게 써서 너덜너덜해진 국어사전.

꼼꼼한 기록을 볼 수 있는 친필 원고.
선생님의 유품실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면 뒤에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앞건물과 이어져 있는 작가들의 창작실이다. 작가들을 위한 창작실은 박경리 선생님이 평생 숙원하던 일이었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은 이곳에서 머물며 창작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다.

토지문화관 오른쪽으로 있는 선생님의 집. 작가들은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선생님 방을 바라보며 창작 의지를 불태우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키웠다고 한다.

선생님 집 앞에 있는 장독대. 저 많은 장독대에는 선생님이 아낀 후배 작가들의 밥상에 올리기 위해 장만한 것들이 담겨 있다. 박경리 선생님은 절대로 냉정한 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후배들과 독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었다.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