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학교에서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던 날 진행되었던 수업이다. 두 아이 교실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 시간쯤 머무르다 달려갔더니 이미 박경리 선생의 초중년기 이야기가 끝나고 벌써 원주에서 <토지 4, 5부>를 쓰던 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더 궁금했던 건 그 시절 이야기였는데... 3강은 포항공대 이승윤 교수의 박경리 선생의 생애.   



박경리 선생은 일제 중반기인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어머니가 몸이 하얀 용이 나타난 태몽을 꾸고 태어나 모두 아들을 기대했다고 한다. 본명은 금이(今伊). 통영초등학교 시절 박경리 선생은 책보기를 즐겨 책상 밑에 소설책을 숨겨놓고 읽는 불량 소녀(?)였다.  

열네살에 네 살 연상의 아내와 결혼했던 선생의 아버지는 박경리를 낳은 후 바로 딴살림을 났고, 늘 수업료를 걱정해야 했지만 어린 박경리는 당당하고 궁색한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수업료를 달라고 찾아간 딸에게 여자가 공부하면 뭣하냐며 뺨을 때린 아버지와의 관계는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다. 그 덕에 소설의 모든 주인공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꿋꿋한 여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함께 진주로 옮겨 온 박경리는 진주여고에 입학(17회 졸업생)한 후 일본인 선생들에게 황민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일본 소설과 시, 일본어로 된 서양 소설을 책방에서 쫓겨날 때까지 읽으며 문학 작품을 통해 의식을 형성해갔다. 하지만 공부에는 신통치 않아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여고를 졸업한 다음 해에 결혼을 했고(1946년) 같은 해에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48년에 전매국에 근무하던 남편을 따라 인천 금곡동으로 이사를 하고, 아들 김철수를 낳았다. 박경리 선생은 인천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며 행복한 시절을 보내셨는데 저울로 달아 헐값으로 사들인 온갖 종류의 책을 읽으며 차츰 역사 의식을 깨치게 되었다고 한다. 1949년에는 흑석동으로 이주했고, 1950년 서울수도 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 황해도 연안여중 교사가 되었지만 전쟁으로 6개월만에  교사 생활을 접는다. 이때부터 박경리 선생의 여자로서의 불행도 시작된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고...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던 남편이 죽자 박경리 선생은 통영으로 돌아와 수예점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가서 1년간 신문사에서 근무를 했으나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고, 한국상업은행에 근무하던 중 은행 사보에 <바다와 하늘>이라는 시를 발표하셨다. 시를 쓰던 박경리 선생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김동리 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김동리 선생 집에 고향 친구가 세들어 살고 있어 자주 드나들다 김동리 선생에게 글솜씨를 인정받았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계산>이 실리게 된 것. 이때부터 선생은 박금이라는 본명 대신 김동리 선생이 지어주신 박경리라는 필명을 쓰셨다.  

60년대 박경리 선생은 <표류도><성녀와 마녀><김약국의 딸들><파시><시장과 전장>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셨다. 그리고 1969년 9월부터 이 모든 작품을 종합했다고 할 수 있는 <토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 선생은 <토지>를 쓰실 당시 철저하게 외부와 담을 쌓고 집필에만 몰두하면서 작품이 완성된 후에 공개할 생각이었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연재를 선택하셨다고 한다. 1971년 죽음을 예감하며 유방암 수술까지 받았지만 퇴원한 지 보름 만에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해서 <토지> 1부를 마치셨다고. 

그후 <토지>는 3부가 완성되는 동안 <현대문학>을 거쳐 <주부생활><독서생활><한국문학> 등 여러 잡지를 옮겨 다니며 연재. 그리고 1980년 <토지>1, 2, 3부가 KBS 드라마로 만들어져 대중들과 더 친근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선생은 서울 정릉집을 떠나 딸이 있는 원주로 오셨다. 원주로 오신 선생은 참말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셨다는 걸 선생이 쓰신 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누구 하나 대작 <토지>를 쓴 작가로 알아주지 않았고, 약간 유식한 시골 노인네 취급이나 했으니 자존심 강한 선생이 얼마나 상처가 되셨을까 싶다. 당시 적막한 집에서 선생을 지탱하게 한 건 오로지 책상 하나와 원고지와 펜이었다고.   

중간에 절필도 선언하시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일제 시대 말기를 살았던 선생은 4부부터는 사명이라는 동아줄에 묶여 초조와 불안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셨고, 드디어 1994년 8월 15일 집필 26년 만에 <토지>를 탈고하셨다. 그후 <토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영어판, 독일어판, 일본어판도 출간되어 펄벅의 <대지>보다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선생은 <토지> 집필을 마친 후 단구동 택지 개발로 매지리로 삶의 터전을 옮기셨고, 원주 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소설창작론>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2008년 5월 5일 애연가셨던 선생은 지병인 폐암으로 세상을 마감하셨다. (이승윤 교수님이 준비하신 자료집을 중심으로 정리)

수업이 끝나면 항상 학생들의 모둠 활동이 진행되는데 3강의 주제는 "내가 원주 시장이 된다면 박경리와 <토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4월 17일 강의) 



진짜 원주 시장이 된 것처럼 열심히 박경리 문학공원과 <토지>를 알리고자 열띤 토론을 한 후 조별로 나가서 발표하는 모습.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았는데 가장 마음에 든 건 <토지>를 원주시에 거주하는 각 가정에 한 질씩 나누어준다는 것.  

우리 조에서 내놓은 의견 중 교수님의 칭찬을 받은 내용은 학교로 찾아가는 토지학교를 운영하자였다. 학교로 찾아가서 아이들에게 토지와 박경리 선생을 알리는 수업을 하자는 것.  


수업이 끝난 후 집에 가다가 주차장에서 만난 고창영 토지학교 교장샘과 이승윤 교수님.

* 박경리 선생의 삶과 문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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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10-05-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4강이 진행되었는데 그때 그때 강의록을 올리지 못하는 게으름~
차분하게 앉아 책 한 권 읽을 수 없는 나날이다.

꿈꾸는섬 2010-05-07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읽었어요.^^ 다음 강의도 기대할게요.^^

소나무집 2010-05-10 09:01   좋아요 0 | URL
4강 올렸구요, 지난 주 토요일에 한 5강도 곧 올릴게요.

순오기 2010-05-13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님 덕분에 거실에서 토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올린 책 중엔 시집 두 권만 봤네요.

소나무집 2010-05-13 09:09   좋아요 0 | URL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사서 보았는데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나더라구요. 요즘 다시 보고 있는데 요즘 문학하는 사람들이 다시 읽고 곱씹어봐야 할 대목도 많구요. 박경리 선생의 육성을 듣는 착각이 들어요. 제가 원주에 쭉 살았더라면 매지리 연세대에 가서 도강이라도 하고 싶었을 텐데 아쉬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