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드라마를 보면서 21권짜리 <토지>를 한 달 내내 읽었다. 몇 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 지금은 그때의 감동은 물론 인물들의 이름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이번에 토지학교 두번째 강의 인물을 중심으로 <토지> 읽기를 들으면서 토지 속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기억해내면서 새삼 한 인물 한 인물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가톨릭대학교 박상민 교수는 <토지>는 유명세에 비해 전권을 다 읽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방송 역사상 최초로 세 번이나 드라마화된 덕분에 책을 안 읽어도 읽은 듯하고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국문과 출신들도 안 읽는다고 했다. 안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소설 내용이 5부 21권(나남출판)으로 너무 길다 보니 전편을 다 읽는 데 드는 시간이 너무 길고, 서너 번은 읽어야 논문 한 편을 쓸 수 있는데 그 시간이면 다른 논문 몇 편을 쓸 수 있는 시간이라고.  

<토지>는 매니아도 많지만 안티팬도 많다고 했다. 안티팬은 작품을 제대로 안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재미있는 건 안티팬들 중 <토지>를 한 번 읽고 나면 연구를 하게 되고 결국 매니아가 된다고 했다. 힘들게 읽은 게 아까워서 논문을 쓰고 <토지>를 찬양하게 된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들려주셨다. 

<토지>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시작과 끝인데, 소설이 처음 시작되는 날은 1897년 음력 8월 15일 한가위이고, 끝나는 날은 1945년 양력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다. 이 두 날짜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1897년은 동학 혁명이 실패로 끝난 지 3년이 지난 해로 우리나라에 일본군이 주둔해서 세력을 넓혀가던 시기였고, 1945년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근현대사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역사가 <토지> 속 인물들의 삶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학자들 중에는 <토지>를 연구하는 이들도 있다고.

<토지>는 긴 내용 속에 다양한 주제를 품고 있다. 그 덕분에 어떤 시각으로 읽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번 강의 내용에 따라 인물을 중심으로 소설을 보니 더 흥미가 느껴졌고, 이제야 <토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토지>의 중심 인물들은 혈연적이거나 근친 관계에 놓여 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통속적으로 흐를 수 있는 설정인데도 <토지> 속 인물들의 연애는 통속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토지>의 매력 중 하나이고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역량 또한 여기서 나온다고.

<토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학이다. 동학의 이념은 작가가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작품 전편을 이끌어간다. 시작 자체가 동학 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실존 인물 김개주의 분신)과 윤씨부인의 불륜으로 시작되고, 이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동학이 실현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념이 신분제 폐지와 과부의 결혼 허용이었는데 이 두 제도에 대한 작가의 비판은 작품 속 인물들의 만남을 살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토지> 속 남녀들은 당시로서는 환영받을 수 없는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한다. 중인이었던 김개남과 양반에 과부였던 윤씨부인의 만남은 최참판댁에서는 일급 비밀이다. 알려지면 양반가의 상징인 최참판댁이 무너지면서 그동안 이어져 온 신분 질서까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당아씨와 구천이(김환)의 사랑은 드러내놓고 인정하진 않지만 정서적으로는 인정이 된다. 서희와 길상의 관계에는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지만 축복을 해주고 길상이 독립 운동을 함으로써 신분이 회복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외에도 김평산과 함안댁, 용이와 월선, 일본인 오가다 지로와 유인실 등은 모두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어낸 커플들이다. 작가는 신분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을 통해 우리나라의 신분 제도가 서서히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평등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70~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알게 모르게 신분 의식이 존재했고, 과부의 결혼도 그리 자유롭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분명 동네에 서열이 있었고, 과부가 결혼을 하면 쉬쉬하는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토지> 속 인물들은 선악의 대립이 뚜렷해서 착한 인물은 한없이 착하고, 악한 인물은 한없이 악하다. 그들 중 작가 박경리 선생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은 보수적이었던 최치수였고,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형은 사회 관념을 모두 지키면서 사는 현대판 엄친아 용이였다고 한다. 작가의 용이에 대한 애정은 용이의 연애 장면이 가장 길게 나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강의 두 시간은 중심 인물 몇몇의 이야기만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중심 인물들의 삶과 당시 우리 민족의 상징이었던 동학 이념을 연결해서 읽으면 훨씬 더 깊이 있게 쫀득쫀득하게 <토지>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 4월 10일)   

 <토지> 총 21권 - 나남출판사  

 

 

청소년을 위한 <토지> 총 12권 - 자음과 모음   

 

 

동화 <토지>총  38권 - 자음과 모음 

 

 

  

만화 <토지> 총 7권 - 마로니에북스

박경리 원작/오세영 그림   

 

만화 <토지>는 박경리 선생이 원작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내용을 잘 표현해서 선생이 가장 좋아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세영 화백이 1부만 그리고 중단하신 상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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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4-19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언니랑 토지 나올때마다 한권씩 서점에서 구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시 시간내서 읽어봐야겠어요. 지금은 인물도 내용도 가물가물해요.^^

소나무집 2010-04-20 08:48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 강의 들으면서 다시 되새기고 있네요. 책을 읽을 때 무작정 읽는 것보다 주제나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순오기 2010-04-2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토지학교 페이퍼에 소설 토지를 꼭 넣어주세요.
그래야 토지를 검색한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그러다보면 토지를 읽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 독서모임에 토지를 10번도 더 읽은 회원이 있는데, 토지를 읽지도 않고 '다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겠다고 통탄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책에다 버젓이 '토지를 읽지 않았지만 다 안다'고 썼더군요.ㅠㅠ

소나무집 2010-04-26 08:49   좋아요 0 | URL
드라마만 보고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지요. 따로 <토지> 책만 모아 페이퍼를 쓰려다 님이 먼저 써놓은 게 있길래 그만두었는데 여기다는 넣어둬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