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남도에 내려와 산 지 3년여가 되어간다. 원래 성격이 한없이 바라보고 주저하고 머뭇대기를 좋아하다 보니 이사 와서 사람 사귐이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물도 설고 말도 설어 외로움에 목놓아 울게 만든 땅이었다. 아, 또 쏟아지려는 눈물... 나의 남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작은 그러했지만 1년, 2년 살다 보니 남도 생활의 재미가 느껴졌고, 이사를 앞두고 있는 요즘은 아쉬움에 저무는 하루가 아깝기만 하다.
도시에 살면서 열망은 했지만 누리지 못했던 것, 시골로 내려오자 느리게 천천히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눈을 들면 바다가 보이고 산이 보이니 굳이 몇 날 며칠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자연을 곁에 둘 수 었었다.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급하게 서둘러 갈 곳도 없었다. 극장이나 미술관이나 백화점이 없어서, 문화 센터나 줄서서 가야 하는 학원이 없어서 우리 가족은...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거창한 여행이 아니라 늦은 아침을 먹고 게으르게 나서서 한두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가벼운 나들이.
이웃 동네로 떠나는 그 가벼운 나들이에서 목적하지 않아도 종종 만나지는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이순신이었다. 충청도가 고향인 덕에 어린 시절 현충사로 수학여행을 가면서 그를 알았고, 서울에 살면서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보며 나도 남들처럼 그를 영웅이려니 여기며 살아왔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며 그에 대한 관심이 반짝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남편이 극찬을 하며 읽기를 권한 <칼의 노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이순신은 내겐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칼의 노래>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건 완도에 와 살면서부터였다. 목포 해남 진도 고금도 여수... 우리 가족의 발길이 머문 곳마다 이순신이 있었다. 뒤늦게 이순신이 머물렀던 땅을 밟아본 후에야 <칼의 노래>를 읽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이순신이 지켜낸 땅과 바다라는 사실을 새로이 인식했다. <칼의 노래>를 읽기 전에 만난 이순신은 단지 역사 유적지에서 만난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일 뿐 나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서 이순신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이순신의 헐벗은 백성이 되고, 불화살을 날리는 이순신의 군사가 되고, 노를 젓는 노두꾼이 되어 그를 우러르고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노량해전까지의 기록을 담은 <칼의 노래>. 나는 책을 읽으면서 당시 현장에 이순신과 함께 있는 느낌을 받았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전라우수영, 울돌목, 벽파진과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사령을 설치하고 노량해전에 임했던 고금도는 두 번씩 다녀온 곳이다. 그렇다 보니 이순신이 물길을 보고 군사를 움직이는 항로를 머릿속으로 일일이 그리며 따라다닐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흥분해서 서울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 동네가 모두 이순신이 머물렀던 곳이라며 떠들어대곤 했다. 남편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어이없어 했지만 나는 <칼의 노래> 덕분에 이순신을 새롭게 발견했고, 이순신의 흔적이 묻어 있는 남녘 바다에 살고 있는 내가 마냥 뿌듯해서 누구에게라도 자랑을 하고 싶었다.
울돌목을 앞에 두고 있는 전라우수영 유적지(해남).
진도대교 아래 유유히 흐르는 울돌목. 밀물과 썰물이 동시에 흐르고 있다.
진도 고군면에 있는 벽파진 전첩비. 비문을 쓴 사람은 이은상이다.
이순신의 시선을 따라 벽파진 앞 울돌목에서 12척의 배로 130척의 왜선을 맞이했고, 노량해전을 함께 치루었다. 울돌목에서 동시에 오르고 내리는 신기한 물길을 직접 보고 왔기에 소설 속 거센 물결 사이를 돌아치며 외치는 이순신의 외침과 적선이 깨어지는 소리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금도에서 마지막 전쟁을 치르러 떠나는 이순신의 비장함에 가슴이 저렸고, 관음포로 가던 중 총탄에 쓰러지며 내뱉은 마지막 한마디,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와서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 마지막 말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래도 이순신의 부하나 백성처럼 나도 이순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영웅이 아닌 가까이 하고 싶은 어버이로서 말이다.
백성과 군사들의 신임은 있었지만 임금의 의심을 받으며 외로워했던 이순신, 왜와 청이 모두 이순신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자신이 떠받드는 임금에게만은 인정을 못 받았던 이순신. 임금을 구하고 백성을 구했지만 단지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던 속좁은 임금, 노량해전에서 끝내 죽음을 맞이한 이순신마저 두려워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원균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싶어했던 임금. 분명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랑을 했으되, 팽팽한 긴장감으로 맞서야 했던 이순신과 선조가 한편으로는 참으로 가련하다 싶다.
김훈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책은 사지만 그리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다. 왠지 책을 읽을 때마다 그의 문장들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섬세하고 친절한 문장을 좋아하는데 김훈의 문장은 친절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단문의 연속... 김훈의 단문은 감정 이입을 방해하곤 했다. 몰입하려는 순간 마침표와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문장은 나를 확 깨게 만들었다. 한 문장에 빠져 작가와 함께 한없이 허우적대고 싶은데 그의 단문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더 많은 시간을 생각하는 데 보내야 했다. 그래서 김훈의 책은 도저히 빨리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불편하고 냉정한 문장들이 고뇌하는 이순신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냉정한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김훈만이 가진 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울돌목에 서 있는 고뇌하는 모습의 이순신 동상. 그동안 본 이순신 동상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나라를 구해야 하는 부담감도 없는 내가 <칼의 노래>를 읽으며 이순신의 깊은 외로움과 더 깊은 사랑을 공감했다면 웃을려나? 어디다 이순신의 외로움과 사랑을 비교하느냐고. 하지만 400여 년 전 선조의 버림을 받은 조선의 백성처럼... 요즘 한 나라의 국민 된 자로서 느끼는 감정이 400여 년 전과 똑같다면...... 요즘의 나, mb가 아닌 이순신의 백성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