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김남주 시인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남편이 해남에 김남주 시인 생가가 있다며 가 보자고 했을 때 머릿속에서 김남주? 이름 끝에 물음표가 따라붙으며 그가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해남 출신 시인이라고 했을 때도 고정희가 먼저 떠올랐는데 남편은 김남주를 먼저 떠올렸다.
남편이 <조국은 하나다>라는 시를 쓴 시인이라고 했을 때에야 아~ 했다. 조국은 하나다/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라고 시작되는 아주 긴 시. 그 이야기를 듣고 책장을 들여다보니 남편의 사인이 있는 김남주의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이 누렇게 변한 채 꽂혀 있었다. 남편은 학교 다닐 때 나름 운동(?)깨나 하면서 어머니 속을 뒤집어놓았으니 이런 시집도 끼고 다니며 애송을 한 모양이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에 있는 두 시인의 생가 중 난 고정희 시인의 생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이 운전대를 잡고 있으니 고정희 생가는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사실 이곳은 녹우당 다녀오던 날 저녁 무렵에 잠깐 들렀는데 이제야...
김남주 시인의 생가는 원래 양철 지붕으로 된 허름한 집이었는데 얼마 전 해남군에서 복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복원이 아니라 번듯하게 새로 지은 것처럼 보였다.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 운동을 하고 오랫동안 옥살이를 했던 시인의 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예전 집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건 복원된 문학인들의 생가에 가면 늘 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생가를 들어서면서 왼쪽으로는 작은 기념 공원을 꾸며놓았다. 앞에 보이는 건 뭘까? 조그마한 게 꼭 화장실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김남주 시인이 옥살이를 했던 독방을 재현해놓은 곳이다. 누구라도 빗장을 열고 들어가 감옥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들어가 보았는데 한 사람이 들어가면 머리는 천장에 닿아 허리를 구부려야 하고 팔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한 평도 안 될 듯한 아주 작은 공간에서 김남주 시인은 유우곽에 못으로 시를 썼다고 한다.
김남주 시인의 모습. 시골 출신답지 않게 아주 샤프하게 생기셨다.
유신 시대 감옥에 투옥되었던 정치범 중 가장 늦게까지 감옥에 남아 있었던 시인은 감옥에서 나와 결혼도 하고 해남으로 내려와 농민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좀 살만 해지니까 병에 걸려 돌아가셨고...
그의 대표작인 <조국은 하나다>를 붉게 녹슨 철판에 새겨놓았다. 시인의 생각대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텐데 어째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으니 세상 떠난 시인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초가집.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벽에 김남주 시인을 기억할 만한 기념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다.
동지였다가 아내가 된 박광숙 씨와 결혼하는 모습.
옥중에서 엽서에 쓴 편지.
생가 마당에 서면 보이는 풍경이다. 집 앞에 있는 호박밭에는 저녁 비를 맞은 호박꽃이 시인의 생가 쪽으로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