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바깥 날씨가 추운 탓인지 마음도 덩달아 춥다. 책을 사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었건만 한 달이 넘게 내 눈길만 스쳤다. 한강,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한승원의 딸이라는 정도. 어쩌면 이 책을 사게 된 것도 한때 탐독했던 한승원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문학 동네에서 제법 괜찮은 대접을 받고 작년에는 이상문학상까지 받은 그녀를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표지의 반이나 가리는 깔끔한 느낌의 띠지를 떼어내고 양쪽으로 펼치니 네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띠지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표지다. 해질녘 붉은 기운을 품은 네 그루의 나무는 어째 쓸쓸하다. 늦가을 메마른 잎을 가지에 단 채 거친 바람을 견뎌내며 어둠을 맞이하고 있다. 짧은 예술 인생을 산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다. 주인공들이 하나씩 그 나무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뒷모습만 보인 채 아주 아주 쓸쓸하게!

세 편의 연작 소설 중 첫번째 이야기인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나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했다. 주인공 여자의 삶이 어떻게 변해갈지 짐작도 못한 채 특별한 매력도 특별한 단점도 없는 여자의 삶에 밑줄까지 그었다. 하지만 영혜를 통해 내가 본 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화산이었다.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화자 그(영혜의 남편)에게 전혀 신경 쓸 게 없게 만들었던 아주 평범한 여자. 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개와 이어져 있는 살육에 관한 꿈을 꾼 후 그녀가 변해간다. 육식을 거부하고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더니 결국 정신을 놓아버린다. 자신이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아내의 변화를 보며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면 안 되었다."고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며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고한다. 누군가에 대해 다 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 일이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첫번째 이야기의 인물들이 두번째 이야기 <몽고반점>에서는 놀랍게 변한다. 아니 본성을 드러낸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 남편의 부러움을 잔뜩 샀던 형부가 화자로 바뀌면서 평범한 영혜가 특별해지고, 특별한 자신의 아내는 오히려 답답한 여자가 되고 만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생활을 책임져주는 좋은 아내일 뿐이다. 화자는 아내에게 들은 처제의 몽고반점 이야기 때문에 영혜에게 몰두한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영혜를 이용해 바디페인팅을 하고 비디오를 찍으며 예술적 욕구를 채우려 한다. 거기서 멈추었으면 좋았으련만. 호기심도 없고, 모든 욕망이 배제된 영혜의 담담한 육체마저 탐하고 다음 이야기의 화자인 아내에겐 "나쁜 새끼"가 되고 만다.

마지막 이야기 <나무 불꽃>에서는 모두가 화해하길 바랐다. 이게 나의 한계라는 걸 안다. 소설 속 착한 주인공의 불행이 내 의식의 한 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조차 싫은 마음. 그래서 영혜가 정신을 되찾고 평범한 여자가 되어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주길 원했다. 하지만 영혜는 채식마저도 거부하고 한 그루 나무가 되기를, 햇빛만 있으면 살아가는 식물이 되길 원한다. 인혜는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하는 영혜의 마지막 소통 대상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상처를 들여다봐주고, 죽어가는 아니 나름의 탈출구를 찾아가는 영혜를 긍정하며 모두가 꿈이었으면 한다. 깨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꿈.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살아온 영혜처럼 인혜 또한 자신의 삶을 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혜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듣고 싶다. 살면서 부당하다고, 싫다고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했던 그녀가 정신 병원에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며 비로소 지른 비명에 가슴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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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8-01-2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이 한승원의 딸이었군요....무식한 하니...
님..잘 지내시지요? 전 요즘 '씨크릿'을 읽는데..정말,,마음 다스리느라,,요즘 너무 이런 류의 책을 많이 봐서인지..도사되겠어요~~ㅋㅋ
잼난 소설 한 권 고르는 중인데...님이 주신 별 다섯개가 눈에 확들어오네요~~

소나무집 2008-01-23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재미보다는 생각할 거리를 더 많이 던져주는 소설이랍니다.
그래서 아주 가벼이 읽을 수는 없었어요.
그래도 삶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 볼 수 있으니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