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줄무늬 바지 보림 창작 그림책
채인선 지음, 이진아 그림 / 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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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오빠 옷을 물려 입어야 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밤색 바지랑 노란 줄무늬 티셔츠. 그때는 오빠 옷을 입는다는 게 정말 싫었다. 그 시절 착한 둘째였던 나는 예쁜 옷 사 달라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다. 나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너덜거리는 바지의 밑단을 잘라내고 엄마 옷에서 잘라낸 꽃무늬 천을 덧대주곤 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 잘 어울렸겠냐 말이다. 마음 속으로는 입기 싫다는 말을 천 번도 더 했을 것 같다. 언니가 있어 예쁜 옷을 물려 입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던 그 시절.

그러다 내게도 여동생이 생겼고 엄마는 더이상 오빠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물려줄 동생이 생겼으니 분홍색 원피스도 사주고 화려한 꽃무늬 나팔 바지도 사주셨다. 거기에 빨간 구두까지. 그동안 할머니 눈치 보며 못 했주셨던 걸 여동생에게 물려주면 된다는 핑계로 다 해주셨던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이 책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들 이름으로 바꾸어 읽었다. 고종사촌 형에게 대부분의 옷을 물려 입는 아이에게 해빈이의 빨간 줄무늬 바지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렸을 때부터 늘 옷을 물려 입었던 우리 아들은 '너를 위해 보성이 형이 보낸 준 거'라고 하면 더 좋아하곤 했다.  형이 태권도 학원 갈 때 입었던 점퍼라고 하면 아들 녀석도 태권도 학원 갈 땐 꼭 그 옷을 입는다.

요즘 옷은 물려서 1~2년 입어도 멀쩡하다. 사실 많은 옷을 가지고 갈아 입으니 낡아서 못 입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니 작아졌다고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옷도 많다. 그래서 우리 아들의 옷은 이종 사촌 태현이에게로 간다. 그 다음엔 태현이의 쌍둥이 동생들이 물려 입으니 우리도 해빈이네 못지 않게 옷을 대물림시키고 있는 셈이다. 어떤 때는 내가 우리 아들에게 코디했던 대로 똑같이 입힌 조카의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땐 꼭 우리 아들 같다.

빨간 줄무늬 바지가 여행을 떠난다. 작가의 딸 김해빈이 입었던 빨간 줄무의 바지가 동생 해수에게로, 사촌 김형민에게 갈 땐 축구공 모양의 천을 덧대서 남자 아이 옷처럼 보이게 해주고, 낡은 밑단을 잘라내고 멜방 바지로 만들어 동생에게 또 물려주고, 발레리나가 꿈인 슬아를 위해서는 레깅스 치마 바지로 변신, 그러다가 마지막엔 맨처음 빨간 줄무늬 바지를 입었던 김해빈이 낳은 딸아이의 토끼 인형 옷이 되었다. 정말 오랜 세월 동안 돌기도 했다.

요즘은 사촌들끼리도 자주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옷을 물려 입으며 아이에게 사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금방 어울릴 수 있는 끈이 되는 것 같아 좋다.

함께 들어 있던 천을 바느질해서 솜 꼭꽉 채우고 인형을 만들어 주었더니 딸이 아닌 아들이 자기 거라면서 들고 다닌다. 아마 이 책은 누나보다는 옷을 물려 입는 자기 거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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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7-1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인선 작가의 <시카고에 간 김파리>가 새로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