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보림문학선 4
오카다 준 지음, 박종진 옮김, 이세 히데코 그림 / 보림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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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 어린 시절도 그랬다. 동네 뒷산에 나무를 기둥삼아 가마니를 둘러쳐서 만들어놓은 우리들의 아지트는 제법 바람을 막아주었다. 겨울 방학 늦은 아침을 먹은 아이들은 누룽지랑 고구마 같은 것을 들고는 하나둘 나타났다. 이편 저편 갈라 전쟁 놀이(왜 그랬을까?그때는 모였다 하면 전쟁 놀이를 했다)를 하다 지칠 때쯤이면 간식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그리고는 우리가 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대부분은 "서울 간 우리 삼촌이 그랬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삼촌이 없는 나는 나이 차이가 엄청 나는 사촌 언니를 끌어들이곤 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유일한 서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서울은 시골 아이들에게는 왕자나 공주가 등장하는 동화 속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 가본 적이 있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는 이 작품에서 바로 그 '서울 간 삼촌' 을 만났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꼭 등장하던 '서울 간 삼촌'을 대신하는 이는 아마모리 씨다. 이 두 사람에겐 아이들과 아이들을 이어주고 세상을 이어주는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모리 씨는 참 수상한 사람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직업도 없다. 예순 살쯤 되었고, 검은 옷만 입는 이상한 아저씨다. 관심을 끌 만한 것이라고는 없지만 아이들의 눈은 늘 이 사람을 쫓아다닌다. 도통 말이 없는 아마모리 씨에게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비를 피하려고 미끄럼틀 아래 모인 날 드디어 아마모리 씨의 정체가 밝혀진다.

중학생부터 초등 2학년까지 모인 열 명의 아이들은 한 가지씩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아직 아무에게도 들려준 적이 없는 신기한 이야기들뿐이다.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한결같이 아마모리 씨가 등장한다. 그리고 인사 한번 건넬 줄 모르던 아마모리 씨가 갑자기 신비한 마술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중학생 데루오에게 지휘봉을 들게 해서 새로 이사온 아파트에 친근감을 느끼게 해주고, 바다에 가고 싶은 이치로를 바다로 데려다주고, 소노미는 말하는 메기랑 친구가 되게 해준다. 외로운 유키에게 그림자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노부코에게는 노란 종이 비행기를 타고 밤하늘을 날게 해준다.

아무리 뚫어도 뚫리지 않을 것 같던 벽이 뚫렸다. 어른들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었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아마모리 씨는 또다른 상처를 안은 채 이사를 갔을 것이다. 아이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상처 속으로 상처가 있는 아마모리 씨를 끌어들여 자신은 물론 아마모리 씨까지 치유해준다. 그래서 외로운 아이들에게 다가오는 아마모리 씨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점점 신비한 존재로 변해간다.

이사 가는 아마모리 씨에게 아이들이 전해준 선물은 감동 그 이상이다.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졌는지 모른다. 아마 아이들의 사랑을 느낀 아마모리 씨가 이사 가는 걸 뒤로 미루지나 않았을지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은 미끄럼틀 아래 혹은 그네들만의 아지트에 모여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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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6-12-12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무척 서글프게 다가왔는 데 내용은 우리들의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과 이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동경하던 미지의 세계. 늘 그런 이야기가 주제가 되곤 했지요. 우리들만의 아지트에서...

프레이야 2006-12-12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은가봐요. 오카다준의 이야기라면 특유의 상상력에 깊이도 있을 거라 생각되네요. 읽고싶어지는 책입니다. 리뷰도 참 좋아요^^

소나무집 2006-12-1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카다준이라는 작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