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황후라는 드라마가 제법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원이 주연을 맞아서 열연하고 있는데, 원래 당초 계획으로는 당시 시대상에 맞게 충혜왕시기를 그리기로 하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충혜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정말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폭정을 일삼은 왕이다. 간단히 고려사절요, 를 살펴보겠다.
재리(財利)에 밝으며 황음무도(荒淫無度)하여, 여러 소인들이 뜻을 얻고, 충직한 신하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바른말만 하면 반드시 베어 죽이므로 사람들이 처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과감하게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고려사절요, 제 25권, 충혜왕 서序>
바른 말을 하면 반드시 베어죽인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굳이 여기서 다루지 않아도 간단한 검색만으로 확인할 수 있을터이고, 여기에 대해서는 N포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링크로 대체한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9751) 결국 이런 왕을 미화시킬수는 없었던지라 제작진은 고려왕을 왕유, 라는 이름으로 변경시키고, 드라마를 진행시켰다. 하지만 기황후가 여전히 남아있는 이상 역사왜곡이 아닌가, 라는 비판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기황후라고 해서 충혜왕보다 더 나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기황후는 자신의 친족의 고려에서의 득세를 조장하였고, 고려 출신의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쳐들어가게 만들었다. 물론 내용을 외부로 끌고나와서 볼 이유가 있는가, 라는 주장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인물의 재해석이라는 측면도 분명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드라마가 방영되지 않았다면 충혜왕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졸지에 양비론처럼 글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사실 나는 충혜왕이나 기황후와 같은 인물을 드라마화하는데는 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짝을 찾기 힘들 정도의 폭군과, 사실상 매국을 일삼은 황후. 둘 다 드라마화하기에는 좋은 인물들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인물들은 사실 있는 그대로 드라마화하여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특유의 애정 코드가 잘 먹혔는지 기황후의 시청률은 잘 나오고 있는 편이고, 생각보다 내용이 재미있기도 하다. 차라리 기황후, 라는 이름 자체도 버리고 아예 모티프만 가져왔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어 장황후, 이런 식으로 말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걸까?
하지만 늘 이런 것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을 좋은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은 쉽다. 그리고 나쁜 평가를 받는 인물을 나쁜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도 바람직하다. 좋은 평가를 받는, 일차 사료의 사관들과 현대 학자들이 옹호하고 있는 인물을 나쁘게 그리는 것까지는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쁜 평가, 그것도 극렬한 나쁜 평가를 받는 사람을 좋게 그리는 것은 상당한 섬세함이 필요하다. 적어도 옹호할만한 구석이 조금은 있어야 옹호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고려에 대한 사료들이 사실상 고려의 당대에 쓰여진 것이 아닌 만큼 고려를 딛고 일어난 조선의 시각이 분명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학자적 양심이 없이 무턱대고 폄훼하려고 했으리라는 것도 보기 어려우니 어느 정도 근거가 있을 것이다. 결국 다루는 방법이 상당히 섬세해야만 할터인데 이번 기황후 드라마, 에서는 그런 섬세함이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황후로 이야기가 시작되었지만 사실 여기서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인물은 노국공주이다.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같은 민족인 기황후는 도리어 고려를 괴롭혔지만, 다른 민족인 노국공주는 공민왕을 도와 그의 개혁정치에 힘을 보태었다. 노국공주는 도대체 왜 자신의 민족의 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고려가 그 굴레를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었을까? 공민왕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공민왕에게 협조하는 것이 자신의 살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 글에서는 노국공주를 중심으로 당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관계와 주변 정세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볼 생각이다. 내가 참조한 서적은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그리고 논문 일부 뿐이라 사료면에서 부족한 측면이 있을 수 있으니 미리 양해바란다. 먼저 노국공주는 누구인지 살펴보겠다.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가 원 나라에 있으면서 위왕(衛王)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이 바로 노국공주(魯國公主)이다.
<고려사절요, 제 26권, 기축 원년(1349년) 10월>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 보탑실리[寶塔失里]는 원나라 종실 위왕(魏王)의 딸이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에 몸소 북쪽 뜰에서 맞이하니 원나라에서 승의공주(承懿公主)로 봉하였다.
<고려사 열전, 공민왕 후비, 휘의노국대장공주>
노국공주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서는 고려사 열전에 실려있으며, 고려사절요에서는 특별히 노국공주에 대한 기록만 따로 모여져 있지는 않다. 이런 차이점이 생기는 이유는 역사서의 서술 방식 때문이다. 고려사절요의 경우에는 편년체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편년체라는 것은 몇 년, 몇 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방법이다. 반면에 고려사는 사마천의 사기, 의 서술방식처럼 본기, 세가, 열전 등으로 나누어진 기전체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위의 사료를 보면 노국공주의 경우 열전에 그녀에 대한 기록이 실려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두 기록을 보면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든다. 그래, 노국공주가 위왕의 딸이고 공민왕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겠다. 그런데 그 이전의 기록은 없는가? 사실 고려사, 또는 고려사절요 모두 고려의 기록이기때문에 노국공주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싣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노국공주가 원나라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중국쪽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료로는 신원사新元史 그리고 원사元史 이 두 사료가 해당되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공민왕 후비 열전에 달린 각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0935&cid=3869&categoryId=3869#footNote1 )와 함께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위왕의 딸이라고 하는데, 원에서 위왕은 누구인가? 신원사新元史에서는 위왕은 충숙왕비인 조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인 아목가를 일컫는다고 한다. 이 아목가는 쿠빌라이 칸의 손자로 황손이다. 하지만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원사元史에 따르면 1324년에 아목가는 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 살펴보자. 위의 사료에 따르면 노국공주가 공민왕과 혼인한 년도는 1349년이다. 이때 공민왕은 나이가 20살이었다. (공민왕은 1341년 원나라에 머물때 12살의 나이였었다.) 여기서 상식적으로 일반적인 결혼이라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나이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노국공주의 나이가 20살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1328년에 노국공주는 원나라에서 아직 태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목가가 노국공주의 아버지라면 아목가는 이미 죽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 되어버린다. 아목가는 1324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노국공주의 나이가 공민왕에 비하여 네살 연상이라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우리는 노국공주가 공민왕에 비하여 적어도 다섯 살 이상 연상이거나, 혹은 아목가가 그녀의 부친이 아니라, 또다른 위왕이 있어, 그 사람의 딸이 노국공주다, 라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둘 중에 어떤 가정이 옳을까? 조혼도 종종 일어났었던 (흔히 공녀를 바치게 되어 조혼이 일어났다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여성의 혼인에 대하여 특별한 제한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 시대의 결혼 풍습을 고려해 볼 때, 다섯 살 연상의 여인과 (비록 원나라에 있더라도 고려의 남자였던) 공민왕이 결혼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원나라에서도 혼기가 늦은 나이까지 가득 차도록 두는 경우는 드문 경우로 여겨지기에 - 오늘날이라면 25살에 결혼하는 것은 매우 젊은 나이의 결혼이겠지만, 그당시에는 다르다 - 아마 노국공주가 25세였으리라고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위왕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위왕 아목가에게는 자식이 있어 그의 위왕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렇게 위왕의 자리를 계승한 아들의 이름은 위왕 패라첩목아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위왕 패라첩목아가 노국공주의 아버지이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들이 황친이기는 하지만 자리가 매우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사에 따르면 1317년 아목가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비록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유배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그 권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물론 정말 심각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목숨이라도 겨우 건질 수 있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시의 원나라 정세를 따져보면 그렇게 심각한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고 판단내리기는 어렵다. 1317년은 인종의 치세였었고, 기록에 따르면 인종은 특별한 일이 없이 제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1317년에 아목가가 쫓겨난 것은 아마 단순히 밉보일 정도의 사건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아들이 그대로 위왕의 작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밉보일 정도로 쫓겨날 정도라면 언제든 우수수 떨어질 종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리라.
이렇게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닌 집안의 소녀는 마찬가지로 좋은 조건이 아닌 부마국의 소년을 만났다. 이들의 만남에는 일부는 우연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만남을 만들려는 공민왕의 노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황손인 소녀보다는 부마국의 소년의 조건이 더 나빴기 때문이다. 소년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원나라 황실과 연을 맺어야만 했다. 왜? '부마국', 즉 부마가 다스린다는 나라의 왕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가 왕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부마가 되어야만 한다. 소녀는 공주였고, 이 소녀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소년에게는 일종의 기회였으리라. 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진짜 문제는 이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에 있다.
왕의 일행이 통제원(通濟院)에 이르자 경성에서 오는 자가 아뢰기를, “적이 이미 가까이 왔습니다." 하니, 임진강을 건넜다. 공주는 연을 버리고 말을 탔으며, 차비(次妃) 이씨가 탄 말은 병들고 약하여 보는 자가 모두 울었다. 왕이 신하를 돌아다보며 원송수(元松壽)ㆍ이색에게 이르기를, “풍경이 이와 같으니, 경 등은 마땅히 연구(聯句)를 지을 만하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 27권, 신축 10년(1361년) 11월>
결혼하고 왕으로 즉위한 뒤 (1352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홍건적이 쳐들어왔다. (1361년) 위의 고려서절요를 살펴보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은 병들고 약하여... 모두 울었다.' 이 말 보다 더 저들의 처지를 잘 설명해주는 말은 없으리라.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안동까지 대피하게 된다. 대피시 이들은 많은 전설을 남기게 되는데, 충청도에는 이런 전설 - 부처님의 가피로 물리쳤다는 - 이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65433&cid=4405&categoryId=4405) 특히 안동에서도 많은 전설과 유적이 남겨져 있는데, 안동시 용상동의 성황당인 여랑당에 얽힌 전설도 그 중 하나다.
전설에 따르면 공민왕이 홍건적에 쫓겨 남하할 때 한 여자시동, 여랑을 데리고 다녔었다고 한다. 왕은 여랑을 귀여워하여 항상 가까이 있었는데, 왕이 전투를 할 때 여랑도 함께 따라다니곤 하였다. 그런데 홍건적이 기습을 하여 왕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이를 여랑이 대신 맞아서 쓰러지고야 말았다. 여랑을 간호하는데 갖은 노력을 기울었지만 소용은 없었고, 이윽고 여랑은 죽으며 신이 되어서 홍건적을 물리치고 성을 지키겠다고 유언을 남겼다. 공민왕은 슬퍼하였고 비록 이후에 홍건적들을 물리치게 되었지만 애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당집을 지어 그녀를 모시고 매년 정월 14일에 안동 부사의 주관으로 제를 올렸다. 이 당집을 여랑신사 혹은 여랑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전설의 구조자체는 마치 발해의 홍라녀 전설을 떠올리게 만든다. 발해의 홍라녀 또한 전장에 나서 적과 싸우다가 이윽고 활을 맞고 죽는다. 이윽고 공양받는다는 모티프까지 흡사한 분위기이다. 이는 어쩌면 수동적 모습을 보이는 남성에 대한 비판이 담긴 안티테제적인 서사로 볼 수 있고, (보통 남성은 강인하고 능동적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능동적 모습의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 위의 홍건적이라던가, 홍라녀 전설에서의 적의 침입 - 에는 그 능력의 너머에서 뻗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도움을 여성으로 그려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능동적인 여성상을 그려낸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중요한 점이 있다. 두 전설 모두 남성을 여성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남자를 위해서 전쟁에 나서겠는가? 그러니 이런 여랑을 두고 우리는 공민왕과 항상 함께 있었던 노국공주를 떠올리게 된다.
현실은 전설보다 더 극적인 법이다. 실제로 노국공주는 공민왕을 위하여 목숨을 건 적이 있다. 1363년 흥왕사의 변이 터진 것이다. 갓 홍건적의 난을 겨우 물리쳤지만 우환은 끊이지 않고, 김용이라는 자가 변란을 일으킨 것이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김수, 조련이라는 자가 50여명을 이끌고 흥왕사 행궁에 침입하여 마주치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왕을 죽이러 뛰어들었다고 한다. 이들을 배후조종하던 자가 바로 김용이었다. (사실 이 부분은 기록으로 보건데 의문점을 가질 만한 부분이 많다.) 이 때 왕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 위하여 밀실로 숨고, 안도적이라는 환관이 대신 목숨을 잃는다. 이때 노국공주가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진 왕을 지킨다.
윤달 신미일 밤 5경에 적 김수(金守)ㆍ조련(曹連) 등 50여 명이 행궁인 흥왕사(興王寺)로 침입하여 문지키던 자를 죽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왔다" 하고, 지름길로 왕의 침전(寢殿)에 이르러 지게문 밖에서 환자 강원길(姜元吉)을 죽이니 숙위하던
군사들이 모두 도망해 숨었다. 이 때 환자 이강달(李剛達)이 왕을 업고 창문으로 나가 대비의 밀실로 달려가 담요를 뒤집어 씌워 숨겨 놓고,
공주가 지게문 앞에 막고 앉아 있었다. 적들이 침전으로 들어갔다. 환자 안도적(安都赤)은 용모가 왕과 비슷하므로 자기 몸으로 왕을 대신하고자,
왕의 잠자리에 누웠는데, 적은 왕인 줄 알고 죽이고서 좋아 날뛰면서 만세를 불렀다.
<고려사절요, 제 27권, 계묘 12년(1363년) 3월>
이듬해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왕이 태후(太后)의 밀실에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숨자 공주가 방문을 막고 앉았으며, 변란이 평정되자 그제야 왕이 나올 수 있었다.
<고려사 열전, 공민왕 후비, 휘의노국대장공주>
노국공주는 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공민왕을 지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원의 공주인 그녀에게는 반란군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어쩌면 노국공주도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이미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죽인 상태이고, 저기서 노국공주를 죽이고 공민왕까지 죽인 다음, 공민왕의 질투로 노국공주를 죽였다, 라는 식으로 죄를 뒤집어 씌울 수도 있었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틈은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고 죄는 만들기 나름이다. 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사실 원의 입장에서는 거슬렸을 것이다.
결국 흥왕사의 변은 최영을 위시한 장군들이 진압한다. 저렇게 노국공주가 막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고려의 왕은 다시 바뀌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죽음의 위기 앞에서 노국공주는 의연하게 대처하였고 결국 왕을 구해내었다. 아마 노국공주는 여장부같은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앞서 신축 10년의 기록을 보면 '연을 버리고'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만약에 억지로 말을 타야했다면 연을 버린다, 라는 말보다는 '연에서 내려'라는 구절을 쓰지 않았을까? 여기서 고려사의 기록을 조금 참조하자.
또 왕이 공주와 함께 야간에 뒷뜰에서 승마를 연습했는데, 왕이 본래 말타기를 좋아하지 않아 종묘제례나 조회가 아니면 한 번도 내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말에 오르기만 해도 겁에 질렸던 것이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9년 경자년, 계묘일>
공민왕은 사실 말을 잘 못탔다. 그에게 승마를 가르쳐준 사람은 다름 아닌 공주였었다. 그것도 원에 있을때 배운 것이 아니라, 급하게 도망쳐야할 시기에 배웠다. 이때 공주에게 말타기를 배운 왕은 이후에 안동으로 피난을 가서도 말을 타는 법을 연습하였다고 전한다. 언급된 부분은 없지만 내 생각으로는 이 때 아마 노국공주도 함께 말을 달리지 않았을까? 말타기를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물론 이 부분은 전적으로 내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공민왕이 그녀에게는 자존심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라는 것을. 만약에 그녀가 아니었다면 공민왕이 과연 누구한테 승마를 배웠겠는가? 그리고 누구한테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겠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위의 연을 버리다, 라는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공주는 당장에라도 말을 탈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공주가 왕을 사랑한다, 라는 측면에서 시료를 살펴볼 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그것을 뒷받침될 수도 있다. 물론 별 의미없이 흘려보낼 수도 있는 구절도 있지만 말이다.
재상이 공주에게 “왕이 즉위한지 9년이 되었는데도 태자를 두지 못하였으니 양가의 여자를 간택하여 후궁으로 삼기를 바랍니다.”고 건의하자 공주가
허락하였다. 이에 이제현(李齊賢)의 딸을 들여 혜비(惠妃)로 삼았으나 이는 왕의
뜻이 아니었고 공주도 후회하며 음식을 먹지 않았다. 더구나 엄수(閹竪)와 궁녀들이 온갖 비방과 참언을 올리자 공주도
드디어 시샘하는 마음이 생겼다.
<고려사 열전, 공민왕 후비, 휘의노국대장공주>
허락해놓고 다른 여자를 후궁으로 들이니 질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신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이방실에게 옥띠와 옥갓끈을 하사하니, 공주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시나이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우리 종사가 폐허가 되지 않고 백성들이 어육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방실의 공로인데, 내
살을 베어서 주더라도 오히려 제대로 보답하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이 물건 정도야 어떻겠는가."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 27권, 경자 9년(1360년) 4월>
저 말로는 사실 와닿지 않지만 현대어로 옮기면 이런 모습이다.
보석을 가지고 있는 왕기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그러자 아내인 보탑실리가 말한다.
"아니 그걸 왜 남에게 줘요? 아깝게시리. 당신이 하는게 낫지 않아요?"
"그래도 저 사람한테 내가 신세 많이 졌으니깐 이정도 선물은 아깝지 않아요."
너무 전형적인 부부간의 대화다. 자, 여기서 왜 이런 전형적 대화가 고려사절요에 실려야만 했을까? 왕의 애신, 애민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마 이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자연스럽게 공민왕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물음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왜 묻는 사람이 노국공주여야만 할까? 예를 들어 이방실이 공민왕에게 옥을 받는 자리에서 사양하면서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아직 모자랍니다' 라고 서두를 꺼낼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군신간에 선물을 내리는데 사양을 한 번쯤 안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방실의 입을 빌리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노국공주의 공민왕에 대한 특별한 위상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 저런 평범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노국공주와의 사이는 가깝다, 라는 것을 드러내가 위해서 말이다. 그녀 앞에서 왕은 그저 필부가 된다. 아니,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평범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를 지지하고 있던 한 쌍은 결국 깨어지고 만다. 공주는 난산으로 힘들어하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왕은 난산으로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며 대사면을 베풀기도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는 일들이었다. 이 정경을 고려사는 이렇게 전한다.
임신 중인 공주가 만삭이 되었으므로 참수형과 교수형 이외의 죄수들을
사면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14년 을사년, 정유일>
공주의 병이 위독해지자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수마저 사면했다. 이날 공주가 죽으니 왕이
태후(太后)를 모시고 덕녕공주(德寧公主)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사흘 간 조회를 중지하고 백관들은 검은 관(冠)에 흰 옷을 착용했다.
<고려사 세가, 공민왕 14년 을사년, 갑진일>
점점 다급해지는 심리를 얼핏 엿볼 수 있다. 같은 상황을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2월에 공주가 만삭이 되었으므로 죄수를 사면하였다. 공주가 난산으로 병이 심해지니 또 대사하였다. 공주가 얼마 후에 훙(薨)하니, 왕이 매우
슬퍼하여 사도감(四都監)과 13색(色)을 설치하여 상사(喪事)에 이바지하게 하고, 각 관사에 명하여 전(奠)을 차리게 하여 풍성하고 정결하게
차리는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 참경회(懺經會)를 빈전(殯殿)에 설치하였다. 왕이 본래 불법을 믿었는데 이때에 와서 맹신하여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사절요, 제 28권, 을사 14년(1365년) 2월>
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이제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남겨진 문헌서 보이는 모습은 이랬다 : 밤낮으로 공주의 초상을 바라보고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행동하였고, 불교에 빠져 고기반찬을 먹지 않았다. 불교의 교리 - 윤회설에 아마 빠진 게 아닐까. 물론 불교의 교리 중 윤회설은 무아윤회다. 복잡한 논증을 거쳐서 '이 나'와 '미래의 나'는 같지 않지만 지금 행한 것은 그대로 업이 되어 전한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윤회를 하더라도 왕은 공주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을 터이고, 동시에 설령 그런 말을 하더라도 이해를 하지 않으려 들었으리라. 결국 왕은 완전히 손을 놓게 되고 그저 공주만 그리게 되었다.
노국공주는 그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사랑이었다. 그가 만약에 그저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면 이 사랑은 길이 기억될 보석같은 사랑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필부가 아니라 왕이라는데 모든 비극이 있다. 왕은 정무를 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만 할 족쇄에 묶여져있다. 특히나 오랜 부마국 생활로서 피폐해진 고려에 희망을 주었던 왕으로서는 너무 아쉬운 결말이었다. 사랑은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그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그 사랑의 결말에 이르러 그 결말을 극복하느냐, 극복하지 못하느냐는 다시 영웅으로 돌아가는가, 돌아가지 못하는가, 와 마찬가지다. 공민왕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고 다시는 영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1365년 2월, 공주는 죽었고 사실상 고려도 죽고 말았다.
덧붙이는 자료.
태후가 또 묻기를, “어찌하여 비빈(妃嬪)들을 가까이하지 않소." 하니,
왕이 말하기를, “공주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태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오. 왕도 마침내 죽음을 면하지 못할 텐데, 어찌 그다지도 심히 슬퍼하시오. 남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아예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 29권, 계축 22년(1373년) 3월>
이 글의 고려사절요와 고려사 관련 번역문은 각각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와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사(http://terms.naver.com/list.nhn?cid=3866&categoryId=3866)를 참조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