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리아님, 본인이 쓰신 댓글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오류가 눈에 띄지 않으십니까?

굳이 제가 지적해야 합니까;; 퀄리아님이 오늘 쓰신 댓글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우물에 독 뿌리기 오류를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류라는 말씀을 쓰셨는데, 오류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논리학에서는 형식적 오류와 비형식적 오류로 나뉩니다.

그리고 우물에 독 뿌리기 오류는 비형식적인 오류인데, 그 중에서 심리적 오류입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못생긴 사람들이다.

 

퀄리아님이 오늘 쓰신 댓글의 문제의 부분을 봅시다 (사실 다른 부분들도 밑줄 긋자면 할 수 있지만, 솔직히 일일히 지적하기가 귀찮습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예컨대 이쪽에서 오류를 지적했더니 저쪽에서 반론을 펴며 역으로 이쪽의 오류를 지적하고 나온 형국입니다. 즉 제프 호킨스의 논변/주장을 두고 양쪽에서 거의 정반대의 해석을 하면서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란 것입니다. (단,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객관적/논리적 대립 측면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주관적/감정적 대립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런 대립 상황은 의식(consciousness) 있는 존재한테는 뭔가 불편한 상황이랄 수 있습니다. 즉 논리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논증을 아무런 규명 없이 방치하는 행태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같은 것 말입니다. 만약 이런 최소한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의식(consciousness)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좀비 의식(zombic consciousness)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밑줄과 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저 문장을 봅시다.

 

나는 이런 대립 상황이 불편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러한 불편함조차 못느끼면 좀비의식이다.

 

위의 우물에 독뿌리기, 원천봉쇄의 오류와 똑같죠?? 이해가시죠? 아니, 알고계시겠죠?

 

사실 저 바로 윗문장에도 또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계신데, 그것까지 또 지적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설마 퀄리아님께서 이런 오류를 모르실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깐 퀄리아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런 오류를 쓰셨다고 가정하고 이 글은 쓰여지는 겁니다. (밑줄까지 쳐서 강조해드렸습니다.) 이렇게 티나는 오류를 쓰시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보통 원천봉쇄의 오류, 그러니깐 심리적 오류를 쓰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심리적으로 논쟁에서 우월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

 

이런게 눈에 보입니다, 퀄리아님. 그러니 제가 퀄리아님께서 정말 순수한 의도로 논쟁을 원하는 건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요. 왜 사람들이 우물에 독뿌리기 오류를 질색하시는지 아십니까? 이 오류는 그 많은 오류중에서도 특히나 '인신 공격'이 이루어지기 쉬운 오류입니다. 따라서 본인한테는 '나는 논쟁을 하고 있으니깐 거친 말을 써도 돼' 라는 면죄부를, 상대방에게는 흥분하여 논쟁에서 마찬가지로 거칠게 응대하는, 그런 효과를 주는 오류란 말입니다. 

 

솔직히 이런게 눈에 보입니다. 퀄리아님께서 저에게 설마 호승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실테고,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가 무슨 논쟁을 하더라도 무익합니다. 오늘 제대로 드러내주셨네요. 아니면.. 설마 진짜 본인이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사람인 이상 문장이나 글에,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그리고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유비 추리에도 부당한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대충 넘어가는겁니다, 글들을 읽으면서. 하지만 상대방에게 논쟁을 걸었다면, 보이는 오류는 좀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무시하려다가, 왠지 알려드려야 될 것 같아서 적습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제가 좀비 의식이면 안되나요? 이거야말로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던 제프 호킨스의 생각 아니었나요? 그리고 그걸 퀄리아님께서 옹호하셨던거 아닌가요? 이렇게 자가당착까지 범하고 계시면 더 뭐라고 해야 할지.. 조언드리자면, 좀비 의식 가지고 걸고 넘어지면서 애매어의 오류까지 범하려 들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뭐 이미 '애매어의 오류'나 다름없지만, 뭐 저도 '피장파장'이라)

 

 

하나만 더 추가. 저는 사실 퀄리아님의 이런 행보도 잘 이해가 안갑니다. 퀄리아님이 쓰신 글을 보면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링크를 제공하시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방금 봤습니다만, 음, 뭐 개인성향상 그럴 수 있긴 하지만, 저는 솔직히 논쟁에서 제3자가 왜 필요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라면, 논쟁은 상대와 나, 이렇게 두명이서 하는 건데 다른 사람이 필요한가, 관심있다면 링크들을 알아서 찾아서 읽겠지, 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런 점은 성향이 다르고, 제가 사실 논쟁에 질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삐딱하게 보려고 하면 또 삐딱하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퀄리아님께서 논쟁을 해서 납득시키고 싶어하셔야 할 대상은 바로 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에요. 논쟁하는데 관람자나 청중이 필요한가요? 여기서 상대방이랑 논쟁하면 학회지에 이름이 실리고 그러나요?? 여기서 공감이 한 오십 개쯤 받으면 적립금이 생기나요? (아, 물론.. 나름 올드비가 된 지금은, 이달의 당선작에 이런 논쟁이 선정이 되서 적립금을 받는 그런 사례가 있었던 것이 기억나지만, 지금은 독자선정위원회이기도 하거니와 그때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일이 더 안일어날거같은데..) 글쎄요, 퀄리아님께서는 그런 것들도 다 의미가 있다, 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걸 상대방한테 강요하지는 마셔야죠, 안그런가요? 납득시키고 싶은 상대인 제가 빠지려고 한다면, 그냥 빠지게 놓아둬야 되는거 아닌가요? 그것 참, 논쟁에 휘말릴때도 제마음대로 된 것도 아닌데, 더불어서 나갈 때도 제 마음대로 못나가나요?? 기어이 오늘 이렇게 댓글까지 또 쓰셔야 했나요?? 저는 그닥 입장차가 두드러지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싶은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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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5-07-09 18:31   좋아요 0 | URL
하루를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주관적/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하시니, 논증의 타당성 판단을 위해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객관적`으로 오류를 지적해드렸는데, 아직 답이 없으시네요. 원하신다면 논리적 오류를 몇 개 더 지적해드리겠습니다. 처음 쓰신 글부터 말입니다. 그렇게 원하시는 `논쟁`은 논증의 건전성을 평가하는데에서 시작하고, 그 건전성은 타당성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타당성을 파악하는 과정을 거칠 수 밖에요.

논쟁이라는 것은 사실 토론과 다르고, 정말 엄밀히 말하면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내 의견을 상대방에게 받아들이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에 앞서서 규칙을 정하고 - 물론 둘이서 정하기 어려운 경우 제 3의 사회자가 조절합니다 - 논증의 타당성을 평가하여, 오류가 있을 시 그 오류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음 논제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단순히 반대하는게 논쟁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퀄리아님, 사람이 글을 쓰는 한 사실 오류가 없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글을 쓰더라도 300자 넘어가면 오류가 계속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을 지적하기 시작하면 본인도 이불을 팡팡 차야 될테니깐요. 그래서 논쟁을 할때, 특히 인터넷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때 상대방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온화한 어투로 말입니다. 서로 본격적으로 논쟁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오류 검증에서부터 서로 통과하기가 어려워지니까요. 또한, 이렇게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논쟁의 목표는 내 주장을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서로가 뜻을 굽힐 생각이 하나도 없다면 처음부터 논쟁 자체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논쟁의 알고리즘을 포스팅할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여튼 이런 것도 다 알고리즘이 있어요.) 이걸 간과하시는 것 같네요.

퀄리아님 본인의 처음 글을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그 당시에도 논리적 오류가 글에 있었습니다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내용적 오류는 일단 둘째치고서라도 논리적 오류부터 일단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라고 여겼지만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는 저 개인적으로는 발끈했던 게 더 컸고, 발끈한 상태로 저도 글을 썼으니 제 글에도 오류가 있을것이고 이런 식으로는 논쟁을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아니, 솔직하자면, 인터넷상으로 머리 아프게 논쟁을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처음부터 논쟁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게 컸습니다. 그리고 그게 이런 식으로 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구요. 이런 글을 쓰는데, 아래 예전에 썼던 반론까지 제 소중한 시간이 3시간 넘게 빼앗겼습니다. 이런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퀄리아님이야, 자신이 원하는 일이니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하더라도 저에게는 무슨 이득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퀄리아님의 사과를 보고 더이상 댓글을 달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기어코 저를 답변을 하게 만드시더군요.

설마 본인의 논리적 오류를 하나도 인지하지 못하셨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논쟁이 어떤 것인지도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님께서 일부러 오류를 쓰셨다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관점에서 댓글과 이 상황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지지요. 생각해보십시오. 저를 링에 끌어내기 위해서 일부러 오류를 쓰시는 분과 제가 논쟁을 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퀄리아님이야 뭐, 본인이 선택하셨으니 검투사 역할을 기꺼야 받아들이고 싶어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왜????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어디있습니까? 그것 참.. 입가에서 헛웃음이 떠나질 않네요.

오늘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어떻게 반응하실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오류에 대한 인정을 하시길 기대합니다만, 그럴 리가.. 아, 참. 글들과 댓글들은 모두 캡쳐는 해두었습니다. 퀄리아님께서 글의 오류를 말도 없이 바꾸거나 하실 분은 아니실테지만 말입니다. 버릇이 되서..

2015-07-09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09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5-07-10 00:03   좋아요 0 | URL
설마 설마 했는데.. 바쁘셔서 글을 못읽으신건지, 아니면 읽고도 답변안하시는건지 모르겠지만 컴퓨터 앞에서 즉각적인 피드백을 드리기 위해 머물러 있던 제가 다 바보스러워지는군요. 댓글을 남기신 게 바로 어제였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침묵을 지키시는 것을 뭐라고 해석을 해야 할지.. 역시 인터넷 논쟁이란.. 이런 거죠. 한숨이 나오네요.

할일이 정말 많은데 하루를 날린 기분이군요. 이래서 논쟁이든 뭐든 엮이지 않으려고 했건만.. 이쯤 합시다. 솔직히 기다렸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네요.
 

 

 



 

 

 

 

 

 

 

 

 

 

 

 

퀄리아님의 댓글과 글을 이제 방금 잘 읽었습니다. 사실 길게 글을 써주셨는데, 아마 저는 짧게 답변을 드릴 것 같습니다. 사실 시간도 별로 없거니와, 퀄리아님과 제가 어떤 건설적인 논쟁을 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논쟁 - 이라고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그런 말싸움 - 이 원래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방금 읽었을때는 좀 발끈하기도 했었습니다. 퀄리아님의 페이퍼를 보면 1. 가연은 오독했다. 2. 가연은 이러저러해서 오독했다. 3. 그래서 오독했다. 4. 심각한 오독/오해/오류다. 가 되는데, 오독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무슨 격투게임도 아니고, 4번 항목처럼 오독/오해/오류의 삼단 콤보 필살기를 굳이 쓰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퀄리아님께서는 제 글에 달아주신 댓글에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유익한 논쟁이 있기를 바랍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신다면야 상대방을 흥분시키고 발끈하게 만드는게 좋은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흥분한 사람의 논리만큼 논파하기 쉬운게 없으니깐요. 그런데 만약에 퀄리아님께서 원하시는게 진리의 추구 - 거창한 말로 - 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적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제프 호킨스, 의 책에 대하여 리뷰를 쓸때 제프 호킨스의 블로그에 찾아가거나 그의 메일에다가 '헤이, 제프, 내가 니 글에 반박글 달았음, 반박 오케이?' 라고 쓴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단순히 제 글에 대한 반박이라면 굳이 '유익한 논쟁' 이라는 말을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결국 제 글에 댓글을 달고 하신 것은 제가 답변하기를 바라는 것일텐데 굳이 저렇게 저한테 말씀하실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저와의 대화를 원하지 않고 그저 반박을 하고 싶으셨던 거라면 굳이 유익한 논쟁 운운하실 필요는 없었을테니깐요. 애초에 오독/오해/오류를 가졌다고 판단하는 사람과 무슨 논쟁을 원하시는 겁니까? 논쟁해서 저를 꺾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본인의 옳음을 관철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사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말하는 이유는 마음이 상했다, 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좀 아쉽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이제부터 쓸 글이 아쉽습니다. 퀄리아님께서 온건하게 말씀하셨다면 저 또한 이런 식으로 -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 말하지는 않았을테니깐요. 퀄리아님, 제가 오독을 했다면 저는 퀄리아님께서 너무 무비판적으로 제프 호킨스의 책을 독해했으며, 그 과정에서 텍스트에 대한 충분한 독해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퀄리아님. 사실 발끈하기도 했지만, 좀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저희는 똑같은 텍스트를 보고, 심지어 레퍼런스까지도 똑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 외에도 비슷한 책들을 보았겠지요. 제가 찾는 책마다 퀄리아님의 페이퍼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으니깐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퀄리아님의 글이 어딘가 내용적으로 잘못된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인데, 가장 먼저 좀비, 엄밀히 말해서 p-좀비에 대해서 봅시다. 퀄리아님이 본인의 글에 쓰신 것이 옳습니다. 분명 p-좀비는 그런 양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쓰였다가, 도리어 논박에 쓰이게 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p-좀비의 연원은 퀄리아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차머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의 견해를 인용까지 하셨으니 당연히 아시겠지요.) 그리고 차머스 본인은 본인의 의식에 대한 견해의 분류에서 F type에 해당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물리주의를 논박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겁니다. 퀄리아님께서는 이 p-좀비를 두고 제프 호킨스가 이원론적인 분위기를 띈 신경과학자에 대해서 '역설적 반론'을 펼쳤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1. 신경과학자가 이원론적인 의식 개념을 전제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대화가 짧기에 무리가 있으며 (퀄리아님 본인도 아실텐데요, 오늘날 대부분의 신경과학자, 그리고 심리철학자까지도 물리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있지 않은 사람이 드물정도입니다. 당연히 저도 물리주의가 근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물론 철학계나 신경과학계에서 전반적으로 의식에 대한 이야기가 줄어들어서 마땅한 논변이 예전처럼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우선이겠지만요. 어쨌든 만약에 이 대화만으로 - '물론 당신은 의식을 가지고 있지요, 라는 말과,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정도의 말만으로 - 그 신경과학자가 이원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시고 싶은 거라면 저는 퀄리아님께서, 더 나아가서 제프 호킨스마저도, 텍스트 독해를 불완전하게 하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안하시겠지만. 철학자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크릭마저도 의식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코흐와 같이 쓴 리뷰논문을 참조하십시오.)

 

2. 설령 이원론적인 의식 개념을 전제했다고 보더라도 그런 사람에게 정반대의 의미로 p-좀비를 이용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대화이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퀄리아님과 제가 서로 게임을 하는데, 제가 가위를 냈습니다. 그러자 퀄리아님께서 보를 내셨지요. 저는 (우리가 가위바위보를 하는 줄 알고) 제가 이겼네요, 라고 말하자, 퀄리아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아직 안끝났다. 우리는 묵찌빠를 하는 거였다.

 

이해가십니까? 제가 제프 호킨스를 두고 무지하다고 말한 이유가? 짧은 대화만으로는 사실 뭐라고 결론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리하자면 우리가 다만 텍스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제프 호킨스는 상대방이 '의식과 뇌는 별개다, 라고 생각한다' 인 것이고, 저는 1.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거나, 2. 설령 상대방이 그런 의도가 있었더라도 가위바위보 게임에 묵찌빠를 내니 참 의미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퀄리아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설적 반론, 의 수준이 되려면 적어도 '이런, 이게 바로 나야', 아 퀄리아님에게는 영어제목이 더 익숙하시려나요? the mind i 의 일화정도는 되어야지요. 의식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의식을 없애는 물약을 받아서 꿀꺽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는 마셔도 아무 소용없네, 라고 말하지요. (이 일화를 아마 기억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 일반적으로 해석하자면 물리주의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그런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같은 일화를 가지고도 우리는 의식이란 처음부터 물리적으로 종속된 것이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테고, 의식이 물리적인 존재와는 동떨어진 그 무엇이었기에 약물이 듣지 않았다, 라고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저는 퀄리아님께서 너무 제프 호킨스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견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여담이지만 p-좀비에 대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할때 중요한 것은 상상가능한 것이 정말 실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는 차머스의 논변과 잭슨의 논변인데, 둘다 물리주의를 비판하는 논변이지요. (사실 퀄리아님의 글을 읽다가 좀 웃었는데, 차머스는 누가 뭐래도 이원론자, 적어도 양상 일원론자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논변과 초물리주의자에 가까운 제프 호킨스를 - 제프 호킨스는 본인을 피질 지상주의자라고 일컫지요, 책에서 - 의식 이분법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웃을 수 밖에요.) 그런데 요즘 어느 심리철학자들은 맹시실험 - 이것도 어떤 것인지 아실테니 자세한 설명은 넘어가겠습니다 - 을 두고 좀비의 실재의 가능성이 성큼 다가왔다고도 해석합니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논변에 기대지 않고서도 좀비의 실재를 밝혀주는 - 그것도 물리주의쪽으로 - 일이 발생했다고 말입니다. 분명 제프 호킨스가 좀비를 이야기했을때, 저 실험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감히 여기서 제안하건데, 저 실험은 사실 좀비의 실재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건 좀비의 실재를 밝혔다기보다는 라마찬드란의 용어를 빌리자면 일종의 phantom입니다. 좀비는 혼자서 움직이지만 이는 누군가에 빙의되어야만 드러납니다. 이들이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고 말입니다. (제가 빙의라는 말을 썼다고 저를 신비주의자로 몰아가지는 말기 바랍니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거지, 진짜 빙의하겠습니까? 라마찬드란의 책을 읽어보면 무슨 용어인지 금방 감이 잡힐테니 그만 적겠습니다.) 이 사변적인 생각을 자세한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으니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갑시다.

 

두번째는 좀 더 짧게 쓸텐데, 이번에도 내용적 측면에서 그다지 그른 부분은 없는 듯 합니다. 저야 번역본만 읽어보았으니 원문이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행스럽게도 네드 블락, 에 대해서 언급하셨으니 이 사람을 가지고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네드 블락의 의식 이분법은 p의식과 a의식으로 나뉘는 것을 잘 아실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누었다고 해서 네드 블락이 의식은 p의식만으로 충분해, a만으로 충분해, 라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프 호킨스와 그의 차이점이지요.

 

물론 퀄리아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제프 호킨스는 분명 의식을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자의식, 감각질로 말입니다. 제프 호킨스의 사고 실험은 앞선 자의식이 기억과 동일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여기서 돌이켜보면, 분명 제 리뷰에서는 제프 호킨스가 의식을 기억과 동일시한다, 라고 적었습니다. 이는 제가 불분명하게 적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책의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너 인사도 안하고 지나쳤어"

 

책에서 나오는 문장입니다. 노골적으로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문장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살펴봅시다. 시계를 돌려 어제 A라는 사람이 B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A가 B를 그냥 지나쳐갔지요. 나중에 B는 A에게 위의 문장을 말합니다. 이 경우 B는 A가 의식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 어제 A는 의식이 있었던 존재입니다. (의식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없지만 일상 생활을 하고 그랬으니 의식이 있었을테지요. 아, 물론 여기서 좀비논변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만 쉽게 여기서는 일상적 의식 개념, 자의식을 다루고 있으니 여기에만 국한해봅시다. 자, 어제 A는 자의식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있었겠죠.) 그렇다면 B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라고 말한 이유는 뭘까요? 그건 A가 B를 본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저 문장은 이렇게 쓰여져야만 합니다.

 

"기억못하겠지만, 너 인사도 안하고 지나쳤어."

 

이제 좀 감이 잡히십니까? 제프 호킨스는 처음부터 기억과 의식 (여기서는 자의식) 을 동의어로 놓고 사고 실험을 전개한겁니다. 바로 이 부분을 저는 비판한 것입니다. 퀄리아님께는 이런 사고실험이 충분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퀄리아님을 보고,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계신다, 라고 말할테지요. 어쩌면 번역의 문제라고도 하시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책에서도 번역이 잘 나누어져 있습니다.

 

문제점이 명확하지 않으신지요? 한번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 환자분이 있다고 합시다. 보통 알츠하이머에 빠지게 되면 지남력, 시간, 가족 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의 기억은 이제 사라져갑니다. 결국 그는 본인의 이름까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을 보고 우리가 저 분은 자의식이 없어졌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프 호킨스에 따르면 당연히 그렇겠지요. 저분은 기억도 없고, 이윽고 본인의 이름마저 잊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중간지점으로 시계를 돌려봅시다. 이 환자분이 과거력, 지남력을 상실했지만, 본인의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은 때로 말입니다. 자, 이 분은 기억은 상실했습니다. 그럼 자의식은? 자의식도 상실한 것입니까? 아니 그 자의식이라는 것이, 무슨 색종이처럼 중간에 자르고 떼고 일부만 남기고 그런게 가능한 것인가요? 제가 30퍼센트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저는 30퍼센트의 자의식을 가지고, 제가 70퍼센트의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의식도 70퍼센트만 가지는 겁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의 사고 실험을 보여드렸는데, 기실 저는 본인의 이름마저 잊어버렸다고 해서 자의식을 상실하였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아, 물론 이름은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이름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대한 모든 정보) 아니, 더 나아가서 자의식은 감각질과 연관되어있고,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의식의 문제를 제프 호킨스처럼 자의식과 감각질로 나누는 것은 글쎄요, 고개를 갸웃거릴 수 밖에요. 여기서 다시 라마찬드란의 말을 가져와야 될 것 같습니다. 감각질은 자기의 문제와 연관이 있노라고.

 

이제 제가 비판한 이유가 명확하십니까? 물론 제가 너무 함축적으로 불분명하게 적은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오독/오해/오류의 삼단 콤보를 먹을 것 까지는 없을 것 같군요. 뭐, 퀄리아님이 이런 생각에 빠지게 된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봅니다. 퀄리아님의 서재를 보면, 평소 물리주의를 본인의 심리철학의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 다른 분께 책을 소개할때 김재권의 심리철학을 가장 기본서적으로 드셨더군요. 김재권의 물리주의는 매우 유명합니다. - 또한 번역에 대하여 크나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시더군요. 그러니 이 두가지 색으로 이뤄진 색안경을 끼고 글을 읽지 않을 수는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이해합니다만, 가끔은 본인의 틀을 벗어나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아마 퀄리아님께서는 이 글을 읽고도 여전히 본인이 옳고, 제가 오독을 한다고 여기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다시 재반박글을 쓰는 무익한 일을 하실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저는 다시 재재반박글을 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로 합의도 못할 상황이고, 제가 퀄리아님을 이해시키지도 못할텐데, 그런 무익한 짓을 왜하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제가 옳고 퀄리아님께서 무비판적인 독해를 하셨다고 주장할 것 입니다. 퀄리아님이 하시는 행동 그대로 말입니다. 서로를 납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서로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르고, 말하자면 지식투영체 - 김성호 교수의 책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 의 방향이 너무 달라서 서로 다른 투영체를 지니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온건하게 제대로 된 논쟁을 했었더라도 저희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란 요원했으리라고 봅니다. 지금은 더 심하겠지요. 오독(가연)과 무비판(퀄리아) 사이의 강은 너무 멀어서 건너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제 서재에 찾아와주시는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제대로 답글도 안쓰고, 친구추천도 많이밀렸는데도 말입니다. 사실 요즘 이런 저런 일들때문에 알라딘 서재에는 거의 안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신간평가단 일해야되는데, 에휴. 여튼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분들 한테는 답글도 하나도 안달았으면서 이렇게 비판하는 글에 대해서 끄적거리는 모습이 사실 제 스스로가 좀 꼴사나워서, 이 글을 빌어서 몇마디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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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06-21 10:38   좋아요 1 | URL
먼저 가연 님 마음을 상하게 한 점에 대해 사과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표현력이 모자랐네요. 글쓰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사실 쓰면서도 이것밖에 못 쓰나 하면서 자탄했었는데, 그 업보를 지게 됐네요. 거듭 미안합니다.

제 어조가 너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논쟁을 무척 긍정적인 것으로 덤덤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상대방 분들이 논쟁 (개념)에 대한 체감각 혹은 체감온도(?)가 다 저와 같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또 다시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연 님의 불쾌감 혹은 언짢음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이건 제 실수고 서투름이었습니다. 거듭 사과합니다.

다만, 제프 호킨스 건은 꽤 흥미로운 논제 같습니다. 그래서 제프 호킨스의 주장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한다면, 나름 지적인 소득이 꽤 있을 듯합니다. 즉, 과연 제프 호킨스의 좀비 논변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 지우기 사고 실험 논변이 무엇인지, 객관적 시각으로 “정확히” 파악한다면 이왕 벌어진 논쟁에서 쌍방이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듯합니다. 지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요.

애초에 『생각하는 뇌, 생각하는 기계』에 대한 가연 님의 독자적 리뷰에서 그 모든 이야기의 씨앗이 나왔던 것이랄 수 있는데요. 거기에 저 나름대로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고, 다시 가연 님께서 응답하신 것이죠. 저는 솔직히 말씀 드려서 논쟁만을 위한 논쟁을 의도했던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 서투름 때문에 논쟁의 방향이 전혀 다른 데로 틀어질 우려를 낳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가연 님의 심기를 건드릴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누구누구보다 지적 우위에 있다는 가당찮은 망상은 꿈에도 없었고요.

어떤 학자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주장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고, 논변의 타당성/성립가능성 따위 등등을 요모조모 검토하는 것은 일단은 “객관적” 작업이겠지요? 저는 이런 객관적 접근 태도를 가연 님 리뷰를 분석하고 검토하는 데도 적용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제가 착각한 듯합니다. 제 자신 혼자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방 분들의 체감각/체감온도는 확 다를 수 있다는 기본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제 글은 그런 객관성 유지에 실패한 듯합니다. 거듭 사과드립니다.

아마도 논변이나 사고 실험 등등 객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여전히 호기심과 의문점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위 긴 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qualia 2015-07-08 18:10   좋아요 0 | URL
가연 님께 사과한 것은 감정적 측면의 사과입니다. 제 비판에 감정적 요소가 개입했다고 가연 님께서 강하게 반론하시는 것 같아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사과한 것입니다. 즉 논쟁 상대방인 가연 님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즉각 사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제프 호킨스의 논변에 대한 가연 님의 오독과 오해와 오류 여부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객관적 사실 판단의 문제입니다. 주관적/감정적 태도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약간의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가연 님께선 제 글 가운데 “심각한 오독/오해/오류”라는 구절을 두고 격투기에서와 같은 “삼단 콤보 필살기”를 굳이 쓸 필요가 있었겠느냐 하시면서 상당한 유감을 표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저 구절은 글자 그대로, 가연 님께서 제프 호킨스를 잘못 읽었기 때문에 (즉 오독했기 때문에), 제프 호킨스에 대한 오해가 발생했고, 그 오해에 근거해 전개한 가연 님의 반대 논변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의 축약 표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류 발생의 절차적 단계를 사실 그대로 축약해 표현한 것뿐입니다. 즉 그것은 객관적 사태에 대한 객관적 기술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표현을 주관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객관적/논리적 비판의 강도를 주관적 비난의 과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저런 객관적 기술을 가리켜 “격투기”니 “삼단 콤보 필살기”니 하는 수사가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런 객관적 기술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밝히고 싶다면, 역시 객관적 어조와 태도로 반론하면 될 일일 뿐입니다. 이런 절차를 외면하고 객관적 사실 관계를 주관적 이해 관계로 받아들여 감정을 토로하는 것은 또 하나의 오류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연 님의 반박글을 읽으면서, 주관적 문제는 차치하고 객관적 문제에 관한 한, 가연 님의 반론에 수많은 오류가 노정돼 있는 것을 보고 상당한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 오류들을 일일이 분석해 가연 님뿐만 아니라 제3자/독자분들을 납득시키려면 장문의 글을 써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사과가 먼저라고 생각했고 반론은 뒤로 미루기로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가연 님께서 추가적인 논쟁은 필요도 없고 대응도 하지 않겠다는 듯 일방적으로 선언하셨기 때문에 (또한 저보고 직접 그런 ‘무익한 일’은 하지 말라는 투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반론할 의욕이 꺾여버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예컨대 이쪽에서 오류를 지적했더니 저쪽에서 반론을 펴며 역으로 이쪽의 오류를 지적하고 나온 형국입니다. 즉 제프 호킨스의 논변/주장을 두고 양쪽에서 거의 정반대의 해석을 하면서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란 것입니다. (단,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객관적/논리적 대립 측면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주관적/감정적 대립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런 대립 상황은 의식(consciousness) 있는 존재한테는 뭔가 불편한 상황이랄 수 있습니다. 즉 논리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논증을 아무런 규명 없이 방치하는 행태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같은 것 말입니다. 만약 이런 최소한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하는 의식(consciousness)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좀비 의식(zombic consciousness)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이 댓글은 제 블로그 글 「제프 호킨스의 좀비 논변과 사고 실험 논변이 과연 오류일까?」에도 올렸음을 밝힙니다. 그곳에도 논쟁의 추이를 알리는 댓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가연 2015-07-08 23:02   좋아요 0 | URL
하아, 기어코 답변을 하게 만드시네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쓴 단편소설 중에 미간척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아마 제목은 몇 번 바뀌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제목은 미간척이다. 이 또한 왼쪽의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의 내용이 가리키듯 복수에 대한 소설이고, 또한 옛이야기에서 따온 내용이었다. 사실 이미 시놉시스가 짜여있으면 - 옛날 이야기에서 따오게 되면 아무래도 내용이 익숙할 수 밖에 없다 - 내용이 익히 예상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진부할 수도 있으나, 루쉰은 과연 루쉰인지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소름돋는 필력을 발휘해서 나를 매료시켰었다. 호이 호! 자객이 음산하게 외치는 소리는 당시 여행 중이던, 그것도 서서 기차에서 책을 읽던 나에게 다리 통증을 신경도 안쓰게 만들었었다. 과연 왼쪽의 책도 그정도의 필력을 보여줄지, 문득 미간척이 생각나서 추천해본다.

 

 

 

 

나름 셜로키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셜로키언 찌끄래기 정도는 되는 나로써는 이 책을 지나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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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근래 꽤 큰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런 행사에 지원을 나갈때마다 사실 난 뭔가 묘하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깐 말장난같지만, 나는 분명 이 행사에서 필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행사에서 필요한 사람이 꼭 내가 될 필요는 없는 거다. 이런 행사에 출입증찍고 검색받고 들어가면, 순간 약간 우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지만, 동시에 바로 위에 썼던 말처럼, 이 행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면 다시금 회의감이 든다. 저 행사에는 내 자리가 없다. 내 자리가 아닌 수많은 동일한 업무를 보는 인력의 자리만 있을 뿐이다.

 

하프 라이프, 라는 게임이 있는데 거기서 아리송한 역할로 나오는 - 때로는 주인공을 돕고 때로는 배신하는 - G맨은 주인공인 고든 빠루맨(이 게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피식 웃어주길 바란다), 아니 고든 프리맨을 보고 right man in the wrong place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가 된 기분이다. wrong man in the right place. 여기엔 내 자리가 없다.. 나는 이  어떻게보면 엉뚱한 사람인거다. 나는 분명 필요한 사람이지만, 필요한 사람이 꼭 내가 될 필요는 없다.

 

우울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요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다. 저 행사에서 내 역할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영어를 그만둔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손짓발짓과 서투른 영어발음 - 아, 옛날에는 그렇게 영어를 잘하던 나였건만! - 으로 중얼거리는게 역할이었다면 역할이었달까. 다행히 이런 나를 보조하기 위해서 조직위원회에서는 스탭 한 명을 파견해서 혹시나 영어와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을 경우 원활하게 소통이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해두었다.

 

이틀 정도 행사에 있었는데, 그새 같이 일하던 스탭이랑 그럭저럭 친해지게 되었다. 이틀씩이나 방에 같이 앉아있으면 심심해질수밖에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친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침묵은 좋아하지만 지루함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 상대방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존중하겠지만, 상대방도 이야기를 즐긴다면 상대방에게 아예 악감정이 없는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나 이런 상황이라면 더더욱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이런 국제 행사에 스탭으로 참가하게 된 사람이라면 분명, 목표가 뚜렷한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그 스탭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원래 모 병원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그만두고 나왔다던가. 이부분 저부분 자기검열로 다 자르다보니 갑자기 글이 뚝 끊기지만, 어쨌든 요지는 그거였다. 제법 안정적인 직장이었고, 그대로 지낸다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걸 그만두고 뛰쳐나왔다. 이는 물론 나이도 큰 역할을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취업을 못한 다른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면, 그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드는 것은 어려웠을텐데도, 그래도 그 스탭은 그렇게 뛰어든거다.

 

아마 위의 이야기뿐이었다면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지는 않을텐데, 이번에는 고등학교 동기 녀석의 이야기이다. 이 녀석도 그럭저럭 괜찮은 모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의 모 대학 물리학과를 나와서, 이러쿵 저러쿵하다가 모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거기를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서 때려치우고 나와서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 나이도 있는데 말이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그렇게 불확실한 미래에 기투할 수 있는 걸까? 위의 스탭도 그렇고 이 친구 녀석도 그렇고, 나라면 거의 택하지 않을 길을 향해서 자신을 서슴없이 던져놓았달까.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가능성만으로는 요즘 세상에는 부족하다. 아직 세상에는 직장을 제대로 구하지 못했거나, 구했더라도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너무나 많고, 대학교의 어느 과를 나오더라도 미래는 뿌옇다. 정말 몇 안되는 그런 전문직을 찍어내는 과들, 그런 과들이 아니고서야 단단히 기반을 잡기란 힘든 일이다. 이과 중에서도 자연과학대학도 힘들고, 공과대학이 그나마 취업이 잘되는 편이라고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지방대에서는 또 알 수 없는 일이며, 문과는 더욱 더욱 더욱 취업의 문이 좁다.

 

나는 거의 인터넷서핑을 안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내 시선에 걸리는 짤방들이 있다. 그 짤방들에서는 젊은이들이 너무 눈이 높다, 눈을 낮춰서 중소기업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성토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멋모르는 소리 하지말라며, 우리 나라의 실업률이 어떻게 되는지 알기나 하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6수를 하고, 어떤 사람은 7년째 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의학전문대학원을 가겠다고 준비하고, 어떤 사람은 약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한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의욕이 부족해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젊은이들 스스로가 잘 모르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장을 구할때는..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패기넘치는 젊은이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들은 적 있다. 어딜 가더라도, 어떤 상황이더라도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 잘 될 수 있지 않냐, 하면서.

 

무엇이 옳은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정말 본인이 열심히 하면 무언가 길이 생길까?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저런 문제들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취업이 힘들다, 힘들다 이야기를 듣기는 듣지만 나 스스로는 당장 무언가 내 폐부에 찌를듯이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어쩌고 저쩌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 될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이야기할 수 있다. 누구 한명이 직장을 구했다는 것은 누구 한 명은 떨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입시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이는 사회 구조의 문제다. 떨어진 사람이 자격이 없어서 떨어진 게 아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왜 도덕인가, 에서 샌델이 반복하는 예시들이 몇 개 있는데, 샌델 본인이 공동체주의 이론가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깊게 새겨볼 만한 것들이 있다. 샌델이 논증한 바에 따르면 거칠게 말해서 justice가 꼭 good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다, 가 되며, 이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대학 입시에서 자격을 갖춘 수많은 학생들이 커트라인을 넘지 못하는 것justice또한 소수민족우대정책에 따라good 허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금 더 확장해서 이야기해보면, 샌델의 합목적성 논의는 빼버리고, (사실 샌델의 합목적성 논의가 샌델의 주장에서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논리만 살펴보자) 입시든 그 어느 경쟁체제든, 당신이 그 체제에서 실패했다는 것이 당신의 가치가 낮다는 것을 반증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인데, 사실은 아직도 가끔씩 너무나 가슴이 아플때가 있다. 몇 번이고 이 서재에서 등장했던 그녀이야기인데, 그녀는 이직을 하고 싶어했다. 자신은 여기서 평생 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평생 살게 되면 어쩌죠? 토끼처럼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이야기했었다. 나는, 내가 옆에 있을거라고, 내가 이 근처에서 직장잡아서 결혼해서 같이 살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지내면 되리라고 이야기했었다. 사실 근처에서 직장을 잡는다, 라는 결정자체가 나에게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 그때는 마법이라도 걸렸었는지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했고, 어정쩡하게 사회에 한 발을 딛고 있었고,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한채 흔들리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내가 하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학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 과정들은 사실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학문만 연구할 수 있다면 차라리 좋을텐데도, 그렇게 되면 사실 또 먹고 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나에게 그당시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하자. 나는 그녀를 서포트하자. 그렇게까지 내가 내 일을 꺼려하는 것도 아니니까, 내 꿈은, 사실 행복하게 사는게 꿈이니까. 업적이든 뭐든, 그런건 다른 사람들이 해주겠지, 안그래? 그래서 사실 어디에서나 직장을 구해도 좋다고 - 생각했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직장을 구하고 쉽게 이직을 하여 더 좋은 자리로 옮겨간다. 그게 운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만나서 - 소개팅으로 만난 적 있는데 - 이야기해보면 그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인생 뭐 한번 살잖아요, 하고 싶은거 하면서 살아야지. 굉장히 자신감이 강했던 것 같다. 속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또 박력있는 여자한테 약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면 왠지 나도 그 힘을 나눠받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나는 저런 자신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한번도 마음속 깊이 납득하지는 못했고, 진심어린 손을 내밀지 못했다. 결국 그 관계는 허세로 가득찬 관계가 되어갔었다.

 

나는 아이러니를 많이 느낀다. 좋은 학벌, 똑똑한 머리, 분위기 잘읽기, 그런 것들을 모두 가졌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일이 잘 안풀리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해서 살아간다. 어쩌면 저런 것들이 모두 갖추어졌더라도 약한 사람에게는 쉽게 운이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가장, 그리고 계속 생각나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생각날 사람은 나만큼이나 약했던 사람이다. 눈부시게 빛난던 상대보다는 붙박이별처럼 덜덜 떨면서 우주공간에서 깜빡거려서, 그만큼이나 깜빡거리던 내 빛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던 상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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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4-26 01:0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장에 담긴 가연님 마음이 참 좋아요.

한수철 2015-04-26 01:26   좋아요 0 | URL
˝당신은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실은 취중인데, 이 문장만큼은 명약관화하게 꽂히는 구먼요.

음, 한두 번 댓글을 주고받은 기억이 나는 만큼,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ㅎ

잘 읽었습니다.^^

몬스터 2015-04-26 16:23   좋아요 0 | URL
끄덕이면서 잘 읽었습니다. 길게 보면 자석처럼 ,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끌여 당겨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더라구요. 결혼할 분을 향한 마음이 참 고와요.

가연 2015-04-27 07:09   좋아요 0 | URL
음.. 헤어졌고, 잊지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뭔가 죄송하네요. 가끔 너무 뭔가 주절거리고 싶을때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어요, 쓰고 또 후회해요.

다락방 2015-04-26 19:07   좋아요 0 | URL
아, 역시 가연님이에요.

테레사 2015-04-27 11:45   좋아요 0 | URL
가연님, 여전히.....^^..저도 마음이 어지럽고 서글플때,...우울감이 밀려올때 서재를 헤매고 있더군요..그게 그렇게라도 해야 위안이 되는 양, 말이에요...모두가 지나간다고 말하지만, 역시나 지나가지 않는 것들이 있더군요...그게 가연님에게 그것이듯, 저에게도 그런 게 있듯이...

아무개 2015-04-27 13:27   좋아요 0 | URL
깜빡깜빡....

2015-04-2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피노자는 대륙의 합리론자였고, 다른 합리론자들처럼 당시의 수학적 세계관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욕구를 자기보존욕구라고 보았고, 이 자기보존욕구는 남에게 받는 수동적 성향과, 남에게 주는 능동적 성향 사이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앞날을 예견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가장 근본적인 제약 조건 하나를 두고, 그 제약조건에 수동적 조건을 빼고, 능동적 조건을 더한다. 이는 전형적인 수학의 방법이고, 그의 대표저서인 에티카가 그렇듯, 스피노자는 수학의 공리처럼 인간의 감정을 낱낱히 분석하고, 거기에서 법칙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하나의 거대한 실체, 능산적 자연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신이라고 대표되는 조르주 브루다노에게서부터 내려온 범신론이라는 것. 모든 것은 신, 하나의 실체가 그 근원에 있고, 이 실체는 무한의 변양을 거쳐 각 양태로 나뉘게 된다. 그런데, 이 양태는 그 주변의 양태에 의하여 일정한 제한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볼때 굳이 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의 양태를 계산하면 되는 상황이다. 옆의 사람이 나에게 뭘했네, 저기 길이 있네. 등등.

 

스피노자는 옳았다. 만약에 우리 삶이 저런 수학적 법칙처럼 딱딱맞아떨어져서, 더하고 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감정이 계산되고, 이 감정으로 인하여 야기될 상황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미래를 계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시대에도 - 앞날이 모조리 계산할 수 있는 시대에도 - 그렇게 될 것 같다, 라는 것은 절대 그렇게 해도 좋다, 를 보장하지 않으니 윤리학이 여전히 필요하기는 할테지만, 우리 삶이 그야말로 굴레에 묶여있고, 우리는 그 극장에서 정해진 대본을 읊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야말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의 바른 양태를 찾아 그 길대로 걸아가는 사람이라면 무엇에 절망하고, 무엇에 슬퍼하겠는가.

 

당신이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졌다면. 이는 충분히 계산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이, 서로의 환경이 당신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감정을 그렇게 몰아갔을지도 모르고, 이윽고 스스로만 몰랐던 그런 파국이 당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우리는 그저 미래에 모든 가능성을 걸 수 밖에 없다. 그 미래가 설령 엄청나게 멀어서, 몇 겁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언젠가 인생아 다시 한번, 이라는 신의 외침속에 모든 입자가 뉴턴 역학적 세계관대로 그 자리가 계산되어 다시 지금 한번이 반복되는 푸앵카레 순환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니체가 말했던 영원회귀처럼, 나는 당신을 만나서 다시 사랑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는 - 똑같이 헤어질테지만 -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노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틀렸다. 현대 물리학은 뉴턴 역학의 개념을 보완했고, 미시적인 세계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에 의하여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을 계산해낼 수가 없다. 아니 더 나아가서, 벅키볼, 그러니깐 탄소 60개짜리 구형 분자의 실험 결과는 양자역학에서의 미시성과 거시성의 경계를 허물었고, 정보를 교환하지 않는 한, 거시세계에서도 충분히 불확정성 원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보였다. 물론,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감정적 교류를 가지며 살아간다. 그런데 감정은, 근본적으로 감정의 분자는, 머리속에서 생산된 수많은 호르몬과 화학물질의 집합이고, 어쩌면 이 분자들이 고립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이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은 계산하기 어려울 것이고 - 영겁회귀가 일어나기 위하여 영겁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영겁의 시간 동안 한 분자가 다른 분자와 고립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터이니 아마 영영 지금 이 순간과 같은 화학물질의 균형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시대에서 몰랐던 것을 근거로 그를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않지만, 아마도 감정은 계산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계산할 수 없으니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더하거나 더 빼거나 할 수도 없으며, 이윽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가, 라는 결론에 자괴감에 빠질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아마,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한동안 계속 고통스러워할수밖에 없을것이다. 지금 그녀와 헤어진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테니까. 다시는, 영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계산된 과정에 따라 걸을 수 없을거니까.

 

이런 생각에 접어들게 되면, 나는 너무 슬퍼서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게 된다. 헤어지고, 떼쓰며 매달리고, 그러나 결국 그녀는 아마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명확한 - 다른 사람 눈에는 보였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니,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 그런 결론에 다다르게 되면, 그야말로 무너져서 쓰러져 오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그녀의 등을 마지막으로 떠밀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서로에게, 더 좋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 어쩌면 자의식 과잉이겠지만 - 직장을 그만두고 올라가버리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녀가 떠나더라도 전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텐데.

 

수백권의 철학 서적. 수백권의 과학 서적. 수십권의 소설. 내 방 한켠에 놓여있는 인류 지식의 결정체들. 그녀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났을때, 그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책을 많이 사냐고, 무엇때문에, 다 읽지도 못하는 책들을 이렇게 사냐고. 나는 그녀에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마 - 좀 더 멋있어 보이려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들의 높이는 나의 고독의 높이라고. 나의 고독함이 깊어질수록 책이 쌓여만 간다고. 그렇게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거의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만큼 나의 상황을 드러내주는 말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마치 자신이 철학적 성과를 완수하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양, 레기네 올센과 파혼을 했다고 한다.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뒷날 파이힝거는 마치 ..의 철학, 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명제를 분석하며, 이런 의제가 도리어 고차원적인 세계를 낳을 수 있다고 부연하지만, 마치 ..는 실제 현상을 절대 표현할 수 없고, 그저 가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당신은 고차원적인 세계에 사는가? 그것은 사실 펜로즈의 견해에 따르면 '의식의 짐'이고 진화과정에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며, 어쩌면 진화심리학적인 사례가 아닌가? 결혼을 하고나면 -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면 - 도리어 어떤 성과가 줄어든다던가. 일부러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 성과를 내려고 했던걸까,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사랑은 그 업적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본능에 새겨질정도로. 그 화학적 불균형과 호르몬의 분비가 천칭의 반대쪽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좋아하게 되는 일은 저 수많은 인류 지식 따위들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훨씬 더 값지고, 훨씬 더 기적같은 일이다. 어쩌면, 신도 없고 운명도 없는 이 세계에 유일하게 믿을만한, 유일하게 가치있는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 환원론적 사고에 따르면 그저 감정의, 호르몬의 불균형에 지나지 않더라도 스피노자가 앞서 자신의 세계관에서 여전히 윤리관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듯, 그런 불균형이 있다고 해서 그게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었던 것이고, 헤어지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는 그저 무너져서 울음을 터뜨릴 뿐이다.

 

사실은 신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은 운명이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수많은 논리적인 논증, 수많은 진화적 증거, 수많은 당위성 - 너 하나만을 위하여 우주를 움직여주는 존재가 있을 리 없다는 - 그런 논증이 수백개가 있더라도, 사실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 뿐이다. 그녀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면 그런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도저히 할 수 없는 - 틀어질만큼 틀어지고, 멀어질만큼 멀어진 그 거리에서, 그야말로 광속으로 달려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 사건의 광원뿔 저편에서, 이럴때는 그저 체념을 하면될텐데, 그저 체념을 하면 될텐데, 그래도 아쉬워 기적을 바라고.

 

헤어진 것 까지가 운명일까?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헤어지는 것 까지가 정녕 운명인 것일까? 그렇게 체념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렇게 살아가면 - 죽을만큼 힘들지만 - 그냥 영영 추억으로 남으면 되는걸까.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니 역시 운명이란, 신이란 없고. 그저 남는 것은 자기 합리화일뿐이다. 그러니깐 그냥 단순히 연애랑,사랑이랑, 결혼을 분리할 수 있으면 돼. 몇번씩이고, 가슴아프고, 상처주고, 상처받는 그런 과정들, 그냥 제외해버리면 마음이 편하잖아. 그렇게 쌓인 책더미들에게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마 영영 나는 이전과 같지 못하겠지. 아마. 사실은 행복하게 그녀와 살고 싶었다..

 

보고 싶다. 하지만 그때 내가 다리를 태웠다. 그저 멍청한 짓이었다. 한번만 되돌리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기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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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4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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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0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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