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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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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것은 정말 자극적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저런 제목,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보면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그러니깐 한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현재가 그리 밝다고 이야기하기는 곤란한 상황이기도 하니깐 말입니다. 사실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은 그 의도가 뻔하다면 뻔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과 독일의 비교를 통하여 더 나은 길을 모색한 후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도를 품은 제목이기도 하니깐요. 그런데 사실 저 제목과 책의 내용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끝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과는 이 책의 저자와 책의 내용은 실제로 차이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 책의 원제는 ‘Were you born on the wrong continent?'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직접적으로 Wrong continent를 언급하는 부분은 책의 마지막에 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의 선조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후 “헉, 내가 엉뚱한 대륙에 있다니!” 라고 깨닫고는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 책의 원본을 읽어보지 못해서 실제로 저 부분이 영어로는 어떻게 표현되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기 저 문장의 엉뚱한 대륙이라는 문장이 Wrong continent을 번역한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혹시나 Strange continent라고 썼을까요? Bad continent라고 썼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군요. 저런 단어라면 충분히 다르게 번역할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굳이 엉뚱한 대륙에 선조가 있었다, 라는 말을 한 저자의 의도입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이야기하지요, 자신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미국이 좋다, 미국을 사랑한다, 난 애국심이 넘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교묘하게도 저런 부분은 그저 실제로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공감하면서도 괜스레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느라 괜히 과장스럽게 미국에 대한 애정을 주장하는 것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과장스럽게 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선조가 엉뚱한 대륙(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어본다면 이 책의 주제는 일전에 읽었던 ‘불안의 시대Zero-sum future'의 주제였던 ‘미국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의 변주가 되어버립니다. 즉, 나는 미국이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미국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외부의 모델의 장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그 모델을 모색해보니 아, 독일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라는 이야기이지요.

 

이 책의 저자인 토머스 게이건은 노동전문 변호사인데 미국식 자본 경제 모델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피자 한 조각을 근무시간에 먹었다고 쫓겨나며, (기업에서는 그 사람은 근무시간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분류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넥타이 색이 이상하다고 해고당해도 뭐라고 호소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고 하지요. 사실 미국에 관한 이 저자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미국은 마치 괴물들과 살인마들이 날뛰는 세상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반면에 독일식 모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두 눈에서 반짝 빛을 내듯이 모델의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독일에서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노동자가 얌체처럼 노동조합의 장점을 빼먹으려고 들어도 그건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에 수호해주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자는 다시금 감명을 받지요, 와 독일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이런 것을 미국이 본받아야 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자신의 입장을 강변합니다. ‘나는 유럽식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로 시작되는 문장은 미국에 대한 불만과 독일에 대한 예찬으로 끝이 납니다. 아마 저자는 지겹도록 ‘그럴 거면 독일에 가서 살지?’ 하는 말을 들었으리라 봅니다. 이런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자신은 다양한 제품을 고를 수 있는 미국이 좋고, 또 독일에서 이미 태어나지 못한 이상 어쩔 수 없다’ 고 이야기하지요. 글쎄요, 독일이 그 나라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차별을 했었던가요? 저자가 쓴 이 책에서는 독일은 터키인 노동자들에게도, 무슬림들에게도 아무런 차별을 가하지 않고 노동시위로 함께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저자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그런데도 여전히 미국인임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저자는 결단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미국에서 테라스에서 시내 전경을 쳐다볼 수 있는 호텔에서 묵으려면 1000달러가 필요하지만 여기 취리히에서는 125달러밖에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숫자를 유심히 따져보면 125달러면 환율을 따지면 우리나라의 돈으로 15만원 상당에 해당합니다. 하룻밤에, 다른 식대나 부대비용을 모두 제외하고 호텔이 15만원을 주고 묵는다, 라니.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 와 닿지 않습니다. 외부에 일 때문에 나가게 되었을 때, 본인의 돈으로 15만원 상당을 지불하고 하룻밤 묵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그의 의뢰인들은 저렇게 돈을 주고 묵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15만원이 대수인가, 특별한 날, 휴가를 맞아서 쓰는 게 무슨 잘못이 되는가, 그가 무슨 성인군자라도 되나? 라는 반론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15만원 상당을 쓸 수 있는 상황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변호사이고 미국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 돈을 ‘125달러 밖에’,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가 만약 독일에 건너간다면, 그는 그가 그토록 책에서 그토록 애정을 보이고 있는 제조업에 선뜻 뛰어들 수 있을까요? 구두를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장인이 되었을 때 ‘125달러 정도 밖에’ 안되는 호텔에 휴가를 즐기러 묵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저 미국이 더 잘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미국 본국에서야 이 책이 그 효용성을 다할 수 있겠지요. 적당히 쓰고, 정곡을 찌르고 사회 비판을 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실제로는 잘 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내심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번역된 책을 볼 때에는 그저 복지가 한참 논쟁이 되니깐 적당히 복지라는 이름에 맞춰서 포장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이 책은 전반적인 복지에 관해서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미국’을 위한 복지와 이상적인 모델을 기술해놓는 것이 그 목적이니깐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저자가 책에서 드는 근거는 ‘내가 노동변호사니깐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이고, ‘내가 아는 신뢰할만한 사람에게서 들었다’ 로 일관합니다. 종종 인용하는 도표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청소년의 이야기를 하면서 소아의 도표를 인용하기도 하고 최상류층의 소득 분포를 들다가 어느 순간 최상류층의 ‘바로 밑에 위치한’ 계층의 이야기를 꺼내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독일에서보다 미국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니깐 말이지요. 미국은 ‘전기톱 앨’이 살인마처럼 톱을 휘둘러 사원들을 동강내고 구조조정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지요. 일전에 A대학에 다닐 때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 교수는 다른 B대학에 대해서 이렇게 촌평했는데, 다른 것들은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면서, B대학이 총장이 책임지고 사퇴하면서 모든 비정규직을 잘라버렸다는 일화를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때가 3년을 고용을 하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승진시켜야만 한다는 조항이 막 생길 때였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만, 당시에 들을 때에는 별 생각 없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본주의아래에서 하나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상품이 되어가고 이윽고 인간소외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저자의 진정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미국이 오늘날 경제위기를 맞고 힘든 시기를 겪게 되는 것은 무작정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늘려왔던 것에 기인하며 그렇게 노동의 유연성을 통하여 얻어진 값싼 노동력은 당장에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고급인력이 되지 못하고 점차 독일과 같은 고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비싼 노동력들에게 밀리게 된다, 라는 통찰을 보여주지요. 결과적으로 독일은 주위에서 ‘그대로 가다가는 망할 거야, 무너질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하여도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게, 그리고 그들 직업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엄격하게 관리하고 노조에 힘을 실어주었지만, 미국에서는 노동자들은 사회 어느 계층이든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쫓겨날 거야’ 라는 생각에 휩싸이게 만들어 자발적으로 톱니바퀴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독일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우리는 전문적인 일을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지며 숙련된 노동자의 경우에는 높은 임금을 받지만 미국에서는 절대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우선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책에서 3차 산업보다도 2차 산업인 제조업을 강조한 것도 이 제조업이 인간 자체의 감정이나 태도 서비스를 상품으로 삼는 3차 산업에 비하여 훨씬 인간적일 가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이겠지요. 3차 산업에서는 우리는 비록 힘든 일이 있어도 계속 웃고 있어야만 하지만, 인간 본연의 감정 자체마저도 규제당하지만 적어도 2차 산업, 특히나 독일이 그 주축으로 삼고 있는 제조업의 경우에는 그래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다보면 오늘날에도 유효한 담론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장이 소외시킨 수많은 약자들과 노동자, 그리고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무너진 수많은 가정들은 ‘난, 쏘, 공’이 쓰여질 때에 비하여 현재에도 거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어떤 부분에 이르면 더 심해진 면모도 보이기도 합니다. 그저 극복의 담론들만이 오늘날까지 논의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저 작품을 처음 읽은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제 눈을 끌어당기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지섭’입니다. 소설 상에서 가장 높은 학벌을 가졌고 부유층의 가정교사로 들어갔지만 그는 노동자들의 곁에서 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사실 눈만 돌리면 그는 그냥 별 문제없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은 그의 손가락을 잃게 만들고 코뼈를 주저앉게 하였습니다. 사실 이 책이 ‘미국 내’에서의 복지사회에 대한 담론을 다루고 있다고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복지사회에 대한 담론은 어느 국가에서든지 활발한 것이 좋지요. ‘미국에서의 복지’가 복지가 아닌 것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복지’는 ‘세계의 복지’ 혹은 ‘우리나라의 복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복지 담론과 자본주의 모델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도 저기 저 ‘난, 쏘, 공’에 나오는 지섭 같은 인물이 이끌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집니다.

 

 

 

 

 

같이 읽어보면 괜찮은 책 :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인지자본주의, 불안의 시대[애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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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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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소의 개.

 

 

 

1.

 

 

  일전에 리오 담로시의 평전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루소의 저작 중 ‘고백록’을 바탕으로 쓰여 진 그 글에서는 루소의 대한 깊은 연구와 더불어 각종 역사적 사실의 추적을 통하여 루소의 삶을 그려내는 모습이 정말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책을 읽고 루소라는 인물에 대해서 반은 실망을 하고, 반은 희망을 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먼저 실망을 한 이유는 루소는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똑똑한 사람도 아니었고 인격적으로 고매하지도 않았었기 때문이고, 그의 각종 기행들은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다’ 라는 말로 방패막이를 해주기에는 너무 지나쳤었기 때문이지요. 5명이나 되는 아이를 버린 일부터, 끊임없이 친구를 의심하고 자신을 도우려는 사람들에게 분노의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마치 세계 전체가 자신의 적인 듯 적대하는 그의 모습이란 정말 저에게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런 일들 때문에 루소에 대해 실망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희망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아니, 저렇게 편집증에 시달리고 자존심과 자기 허세로 가득 찬 사람도 세상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내는데, 나라고 무슨 일을 못하겠어?’ 라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물론 혹자는 저의 이런 생각을 보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루소가 정말 바보인줄 아느냐, 어디 너랑 비교를 하느냐,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루소가 제일 싫어할만한 생각이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루소의 삶이 수많은 모순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의 일생에서 단 하나 일관적이었던 것은 고독, 조금 더 넓게 이야기한다면 자유에 대한 사랑이었지요. 그가 말하는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평등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평등은 인간 근원적인 평등을 뜻합니다. 내가 당신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런 인간으로서의 평등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인간이고 루소도 인간인데, 루소가 인간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면, 사회계약론을 쓰고 에밀과 같은 작품을 썼다면, 나 또한 인간으로서 무언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는 곰보고 호랑이처럼 빨리 달려보아라, 같은 포유류잖는가, 라는 말과 비슷한 오류를 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루소는 그 자신을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두고 ‘뛰어나다’ 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을 격리하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 보다는 이런 식으로 그에게 우린 동등하다, 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길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의 근거는 루소가 일평생 진정한 친구, 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갈망해왔다는 점에서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특별시하고 신성시하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삶을 살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라고 저런 일을 못하겠는가, 라는 말을 비웃는 사람들의 생각은 루소가 싫어할만한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2.

 

 

  저 책 ‘루소 평전’을 시작으로 루소의 저작들을 몇 권이고 찾아 읽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가 머리 셋 달린 괴물은 아니었잖은가, 하는 생각이 들고, 나도 그처럼 언젠가 개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괜히 그의 저작이 읽고 싶어지더군요. 에밀, 사회계약론, 고백록까지. 사실 에밀이야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이전에도 한 번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고백록은 그 때 처음 읽었었지요.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고백록은 저에게 알쏭달쏭한 책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남은 것이라고는 루소의 각종 성(性)적인 언어들뿐이었습니다. 아니 내밀한 고백에는 필연적으로 본인의 성에 관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나는 목사의 딸이 나를 더 때려주기를 바랐다’ 라던가 ‘바랑부인이 없는 동안 나는 그녀의 자리에서 그녀의 미끈한 발을 생각했다’ 같은 구절을 보게 되면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이 무슨 책인지 심각하게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의 생을 알쏭달쏭하게 만들었던 것은 이런 고백록과 같은 책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의심도 저를 의아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친구였던 달랑베르나 디드로, 그림과 같은 사람들과의 다툼 뿐만 아니라 이번에 읽은 책 ‘루소의 개’에서 다룬 것처럼 흄과의 다툼은 거의 대부분 그의 의심에서 기인한 것이지요. 의학에서 성격 장애를 분류할 때 ‘세상이 마치 자신의 적이 된 것 같고 모두가 자신에게 나쁘게 구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를 편집증적 성격 장애라고 부릅니다. 루소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대학 병원 정신과에 입원을 권유받았겠지요. 루소는 이 편집증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신과적인 질환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정신과적인 질환은, 예를 들어 강박증이라던가, 망상장애나 성격장애 같은 것들은, 마음을 어떻게든 굳게 먹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현대 들어와서는 적극적인 약물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는, 현대에 접어들어 의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그저 개인의 성격인 줄 알았겠지요. 그래서 이 책에서 언급하는 수많은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루소는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말이지요.

 

 

3.

 

 

  이런 공상과 망상에 젖어서 세상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며 살아가는 루소의 정 반대편에 흄이 있습니다. 흄은 칸트 이전에 인간의 이성의 극한까지 사고를 전개하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의 문제점을 드러낸 철학자로 유명합니다. 이는 그의 회의주의적인 성격에서 기인합니다. 네, 이렇게 보면 흄도 항상 의심하고 숙고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심은 루소의 의심과는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는 그의 의심이 자신의 일반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사교계에서는 ‘사람좋은 데이비드’ 라는 이명을 항상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그의 동시대에서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 당시 사람들은 흄에게 역사가의 소명만을 기대해왔었습니다만 그가 없었더라면 칸트가 이후에 인간의 오성에 관한 눈부신 통찰을 내어놓기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이론을 전개하기 전에 감탄 속에서 흄의 논문을 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루소가 공상적 인간이라고 한다면 흄은 이성적 인간이었고,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이성을 가진 사람은 볼 수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평판도 잘 유지하면서 학문적 성과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루소의 개’에서 나오는 흄과 루소의 논쟁은 예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성과 감정이 부딪혔을 때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테니깐요. 서로가 이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논리에 의거하여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킬 수 있겠지만 이성과 감정, 혹은 감정과 감정이 부딪혔을때에는 상대방을 이해시키기란 하늘에 별따기와 다름없는 일입니다. 당시 루소는 그 자신의 저서 때문에 곤경에 빠져있었습니다. 물론 그 곤경이라고 해봤자 실제로는 그저 나라만 벗어나면 되는 것이었고, 더 이상 국가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추적 후 처형과 같은 적극적인 형벌을 가하려고 하지는 않았기에 (루소가 자신이 머물던 콩티 공작의 성을 떠나며 한참 길을 가던 도중 자신을 잡으러 성으로 오는 병사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루소가 스스로 주장하는 것과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었던 점을 배제할 수 는 없겠습니다만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있을 자리가 없다, 라고 여길 때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되지요. 바로 이 시기에 흄은 친구인 부플레 백작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이름 높던 루소를 영국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한 번도 사람을 보지 않고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도 우정이 가능할까요? 아마 이 시기의 흄과 루소는 그렇게 믿었던 모양입니다. 혹은 그저 우정을 가장했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흄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판만 믿고 루소가 영국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그리고 연금도 타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가 그 자신의 평판, 사람 좋은 데이비드를 유지하려고 이런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생판 모르는 남을 선뜻 부양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요. 루소는 루소 나름대로 영국에서는 새로운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영국으로 떠납니다.

 

 

4.

 

 

  유튜브에는 다양한 동영상들이 올라오는데, 그 중 ‘역사 속 인물들의 랩배틀Epic rap battle of history' 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상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역사 속 인물들로 분장해서 제작자들이 Rap을 통하여 배틀을 벌이는 영상들인데 잘 알려졌을 만한 영상으로는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이 서로 랩배틀을 벌이는 장면이 있지요. 물론 그냥 보기에는 상당히 많은 비속어들이 포함되어있습니다만 실제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인물들이 그에 대척되는 삶을 살았던 (물론 저 영상에서는 그런 것을 매우 엄격하게 따지지는 않았었지만) 인물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 ‘루소의 개’에서 다루는 다툼이 그와 같지요. 루소를 영국으로 데려간 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다툼에 시달리게 됩니다. 물론 루소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이 위험을 느낄만한 요소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흄이 잠결에 자신이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중얼거린 일이라던가,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전부 개봉되어 있었다는 점과 같은 요소들이 바로 그것이지요. 하지만 흄 입장에서도 할 말은 많았습니다. 자신은 사는 곳을 제공해주고 연금도 받아다주려고 노력하는데 루소의 까다로운 성격은 그 수많은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 하나 어긋나게만 만드니 말이지요. 그렇게 촉발된 다툼은 끝내 루소의 연금의 연기를 요청하는 편지로 시작됩니다. 그리곤 주장하지요, 흄 당신은 나의 적들과 내통하여 나를 곤경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역사속 인물들의 랩배틀’ 이라면 분명 ‘흄, 너는 엉성한 계획으로 내 적들과 공모했겠지, 그리고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겠지, 하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겠지’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주장이 크게 근거를 가지기 어려운 것이, 예를 들어 A란 사람이 B, C와 동시에 친하다고 합시다. 그런데 B와 C는 사이가 매우 나쁩니다. 그래서 B는 자주 친교를 나누는 A에게 C와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가 C와의 관계를 끊어야 할까요? 글쎄요, A와 B가 연인관계라면 혹시나 그런 주장이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 중 어떤 게 우위에 있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사랑을 더 우위에 두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정의 이름으로, 그것도 사실 B와의 친교는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도, B의 강요에 의하여 A는 C와의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지요. 루소와 흄과 루소의 이전 친구들, 지금은 적이 되어버린 달랑베르나 그림과 같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사실 루소는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고 말이지요. 네, 루소의 문제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냥 무던하게 넘겨버리지 못했다는 것 말입니다. 이는 결국 루소와 흄 사이를 파국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결국 그 결말은 둘에게 모두 상처를 남겼으며 그 후 그 둘은 다시는 보지 않았습니다.

 

 

5.

 

 

  독재자들은 고양이를 싫어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양이는 자신을 주인과 친구로 여긴다고들 합니다. 저야 고양이들을 길에서 만나보거나 혹은 고양이 카페에 들렀을 때 잠깐씩 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고양이를 길러본 사람들은 이 고양이가 나랑 동등하게 여기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제정치를 펼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싫어하기에 고양이를 싫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개는 어떨까요? 그런데 개는 고양이와 달라서 한번 주인을 정하면 그 주인에게 애정을 많이 쏟고 따른다고 하네요. 사실 개도 저는 그리 많이 다뤄본 적이 없으니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저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저 말, 독재자들이 고양이를 싫어한다, 라는 말은 과장이 좀 섞여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완전히 그른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양이를 기를 수 있는 사람은 그 고양이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해서 그 자신의 영역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특히나 고양이들에 대한 학대 등을 큰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반면에 개는 그 자신을 버리고 주인을 따를 정도로 충실합니다. 루소의 개, 쉴탕도 그와 같아서 비록 짖고 루소의 사색을 방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를 평생 충실하게 따랐다고들 하지요. 물론 루소는 그 자신의 편지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쉴탕을 하나의 가족과 같이 여기고 우리는 동등한 친구와 같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만약에 루소가 정말 동등한 친구처럼 구는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이지 궁금해집니다. 루소가 타인에게 바랐던 것은 마치 개와 같은 자신에 대한 충실성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그만큼 타인에게 충실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의문이었으면서 말입니다. 물론 상호적으로 저런 충실성이 이루어진다면 인간관계로서 더할 나위없이 좋을지 모릅니다. 나는 당신에게 충실하고 당신 또한 나에게 충실하며 서로가 외로운 세상을 걸을 때 한 줄기 빛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나 법정 스님이 ‘귀한 인연이길’ 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한동안 연락이 없다고 해서,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고 포기하는 그런 가벼운 인연이 아니길’ 라고 말입니다. 항상 충실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우정이라는 이름에서는 사실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어쨌든 이런 루소의 친구에 대한 생각은 이 책 ‘루소의 개’에 의하면 쉴탕과 다른 두 ‘개’를 낳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친구였으나 결국 갈라선 프리드리히 그림과 데이비드 흄이 바로 그들이지요. 이들은 쉴탕과 달리 끊임없이 루소의 상상 속에서 그를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 ‘개’들은 그가 잘 되는 것을 보면 사정없이 짖으며 할퀴려 달려들고 그가 힘든 일에 빠지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좋아한다고 여겼지요. 사실은 그의 기대가, 그의 망상이 그 개들을 낳은 것일 수도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마냥 루소를 미워하지도 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지도 못하는 이유는 그 루소의 바람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을만한 소망이기 때문이겠지요. 저 또한 품고 있는 친구에 대한 비원. 나를 잘 알아주고 잘 이해해주고,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그런 친구에 대한 기대 말입니다. 그런 친구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그런 기대를 꿈꾸게 됩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알아줄 거야, 저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해줄거야,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언제나 배반당하고 우리는 상처입고 추락하게 됩니다. 내 친구, 라는 말이 어느 새 이 놈, 이라는 말로 바뀌게 되고 너 밖에 없다, 라는 말이 너도 똑같이 당해봐라, 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누구나 기대를 품고 배신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어느새 인간관계에 대한 처세를 익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 기대가 배반당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더 이상 타인에게 깊은 인간관계를 기대하지 않는 시대가 왔는지도 모릅니다. 편지가 상대방에 대한 연락의 주축이 되었던 18세기 살롱은 좀 달랐을까요? 글쎄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진심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힘들고 다른 사람의 진심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지요. 그러고 보면 루소는 좀 우리들에 비해서 서툴렀으며 우리들에 비해서 감정에 매우 솔직했을 뿐이었겠지요. 그 깊은 감정은 그를 수렁으로 몰아넣고 편집증적인 증세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루소 자신’이 되게 하였으며, 만약 그게 지나치지 않았다면 루소는 별 문제 없이 살롱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었겠지만 끝내 ‘루소 자신’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루소가 끝내 이렇게 절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나의 개를 사랑해주오, 라고.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는가', '루소 평전(리오 담로시)'

 

 

p.s. : 심심해서.. 제가 읽은 책들 중 같이 읽으면 괜찮을 것 같아보이는 책들을 두 세권

        끄적거려 보기로 했습니다, 풋.. 제 멋대로 기준이라서.. 양해해주세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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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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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신자들. 

 

 

  '맹신자들' 은 에릭 호퍼가 지은 여러 권의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책이며, 또한 상대적으로 그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서 많이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에서의 에릭 호퍼는 그리 인지도가 높은 학자는 아니지만 말이지요. 고백하자면 저는 저자 에릭 호퍼에 대해서 그리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하기 전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은 그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정도였는데, 그는 사실 이 책의 책날개에도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시력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이 된 후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읽어버리겠다는 듯이 책들을 읽어내려갔던 대단한 독서광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길 위의 철학자, 라는 이명(異名)이 붙을 정도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아본다면,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머무를 기색을 보이면 주저없이 자신의 짐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애초에 그가 처음 길을 떠나서 도착한 곳이 '노숙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했고, 길가에 오렌지가 열린' 캘리포니아였으니 말 다했지요. 경제적인 이익도 그를 붙잡지 못했고 사랑도 그를 붙잡지 못하였으나 단 하나 그를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학문에 대한 열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보면, 물론 저도 조금 들쳐본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제 1권의 그 첫머리에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앎의 즐거움을 원한다. 인간의 지능은 감각에서 ... 지혜로 나아간다. 지혜란 그 어떤 원인이나 원리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에릭 호퍼의 경우가 위의 저 말에 특히 잘 들어맞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평생을 일을 하면서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무학(無學)노동자가 자격지심에서 공부를 한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뜨거웠으며, 그 열정의 결과물도 너무나 사유의 폭이 깊었었지요. 즉, 그의 열정은 순수한 앎에 대한 욕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릭 호퍼가 지혜로 나아갔을까요? 네, 지혜의 정의가 위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원인과 원리를 파헤치는 학문이라면 에릭 호퍼는 충분히 나아갔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사유와 연구의 결과물로 바로 이 책 '맹신자들' 을 발표할 수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 책에서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유감없이 풀어헤쳐놓습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의 사유의 흐름은 우리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쓰인 사유의 방법은 저자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육하원칙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대중운동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까요? 네, 먼저 이 대중운동이라는 현상은 누가 일으키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던질 만한 질문은 언제 이런 현상이 발발하는가, 가 되겠군요. 육하원칙에 따라서 큰 질문을 던지고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다시 세분화해서 들어가면서 질문을 던져나가면 됩니다. 이런 작업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접하여 무슨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을 질문을 던져가면서 이끌어내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아니 유사할 수 밖에 없겠지요. 의사가 한 개인을 고친다면 사회철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회가 어떤 질병을 앓고 있으며 그 치료법은 무엇인가, 를 모색하는 것이 될테니깐요. 그래서 저자는 대중운동은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잘 일어나는가를 고찰한 뒤, 그것이 누구에 일어나는지를 알아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대중운동이 그 힘을 가지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책의 제목에서 쓰인 맹신자들은 이 대중운동에 기꺼히 협력하여 한 팔을 거드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집단의 일이라면 눈 코 뜰새 없이 뛰어들며 자신의 집단이 가장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그런 광신자들과 크게 다른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이런 맹신자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좌절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특히 현실에 대한 좌절이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지요.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 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에릭 호퍼, 맹신자들, 30p.

 그런데 이런 에릭호퍼의 대중운동에 대한 주장이 모두 적합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오늘날의 대중운동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기전들을 따라서 해석하면 그 발단과 결말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교 시험문제에서도 '모두' 라는 말이 쓰이면 답이 아니라고 했었던가요, 굳이 대중운동의 양상이 다양하므로 단일화된 해석으로 모두 우겨넣을 수 없다, 라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다른 문제점들이 몇 가지 발견됩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문제점으로는 이미 하나의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적합한 역사적 예들을 드는 경향입니다. 저자가 '소수자들', 특히 '주류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소수자'들이 '맹신자들'로의 '잠재적 전향' 가능성이 있는 무리 중 하나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 예로 정통파 유대인과 해방 유대인의 예, 남부의 격리된 흑인과 북부의 격리되지 않은 흑인의 예를 드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지요. 저자는 이미 저런 예를 들기 전에 확고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례들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강화해주는 그런 기제로 작용할 뿐입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또는 실제로 주류에 속하고자 노력하는 소수자들이 그들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주류에 대한 대중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방법상의 문제입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결론이 내려져있다면 이후에 반증되는 사례가 도출되었을때 유연하게 넘어가기가 어렵겠지요. 설령 이러한 것이 그저 선후관계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하여, 현상을 관찰후 도출한 결론을 먼저 적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내린 결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할터인데 책에서는 각 챕터의 결론에 대한 검증은 '최근 러시아에서는..', '최근 미국에서는...' 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심리학적인 해석이 조금 지나치지 않는가, 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뼈저리게 실망한다. 따라서 바로 이 과도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이타적 태도를 가장 설득력 있게 옹호하곤 한다.  
                                                                                                      같은 책, 77p.

위의 인용한 부분은 '이기적인 사람'이 '맹신자들'이 되기 쉽다는 부분의 첫머리에 나온 글이지요. 사실 크게 문제될 것 없이 술술 읽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뼈저리게 실망한다' 라는 문장과 '이타적 태도를 설득력있게 옹호하곤 한다' 라는 문장은 그다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기적인 인간이 뼈저리게 실망하면 이타적 태도를 설득력 있게 옹호하게 되는건가요? 굳이 해석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 태도에 실망하여 이타적 태도의 옹호자로 변하게 된다, 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이 문장 또한 근거가 마땅히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기대는 곳은 바로 심리학적인 해석입니다. '이러 이러하니깐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근거가 명확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 문잔들이 거부감없이 읽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에서 연유합니다. 이미 여기에 대해서는 '반동형성'이라는 심리학적인 방어 기제의 지나친 남용, 이라는 이야기로 이 책에 대한 다른 서평들에서도 지적되어왔지요. 그리고 하나만 더 지적을 하자면, 책을 여는 이야기에서는 저자는 분명 '이 책은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고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대중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이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애초에 대중운동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 라는 입장이거나, 혹은 나는 찬성한다, 라는 입장이라면 이러한 호오를 드러내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습니다만 처음에 나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고 싶다, 라는 선언을 하였음에도 광신자, 등과 같은 어구로 반감을 조금씩 넣어두게 되면 아무래도 주장의 객관성이 의심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는 원문을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모두 적합하지는 않다, 라고 해서 모두 쓸모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겠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일 수 있는 기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에 대해 깊이 연구한 책은 이 책 이전에는 그리 많지 않았었지요. 이런 책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탑을 쌓듯이 하나 둘 높여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릭 호퍼는 이 책을 통하여 대중 운동에 대한 여러 예를 바탕으로 그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사유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쉬운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평생을 길 위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던 그 자신의 삶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려운 말로만 점철되고 남에게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 글은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유가 아닌 남의 사유를 계속 빌려오는 것 또한 무분별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몇 번 참조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앵무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에릭 호퍼는 늘 독자의 생각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생각을 주고 받으며 논의해보자는 것이니' 그러니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말대로, '한 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대중운동이 어떤 것인지, 저자가 말한 것이 옳은지,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 라고.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모두가 대중운동에 대한 각자의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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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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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최근에 신영복씨의 ‘강의’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을 주로 주제로 삼았던 그 책에서 신영복씨는 시경을 예로 들면서 소설을 읽는 것도 좋지만, 시를 읽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해준다고 하였었지요.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소설이 여러 장의 지면이 필요하다면 시는 손바닥만한 종이에다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도 시를 가끔씩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제외한다면 그 이후에 시를 찾아 읽지 않는 이상은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라서 주로 서점에서 서서, 혹은 문집을 도서관에서 읽을 때 같이 수록되어있는 시를 읽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에 주변에서 정말 추천하는 시 정도만 읽었을 따름이지요. 물론 그렇게 시를 읽더라도 시의 감동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서 짠하고 좋았었지만, 그 감동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소설책이나 인문학책을 찾아 읽고 있었습니다. 삐딱하게 생각해보면 시가 감성을 자극해준다지만, 그 감성이라는 것은 너무나 모호한 것이라 어디를 어떻게 만지고 접근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소설에 비하면 시는 그 특성이 너무나 두드러지지요. 자의적 언어 사용은 모호함을 부추기고 각종 시적 허용은 그 의미를 더욱 아우라에 둘러싸이게 만듭니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나 마치 실체가 모호한 유령과도 같아서 오래지 않아서 이성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이성만으로는 ‘어떻게든’ 살 수 있지만, 비록 그 삶이 팍팍할지라도, 감성만으로는 ‘현실적인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태생이 본질적으로 욕심쟁이라서 둘 중 어느 하나만, 특히 이성만 누리며 사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은 저자 강신주의 전작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진 두 측면, 이성과 감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라는 일종의 욕심을 붙잡고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려는 이유는, 이미 앞 문단에 인간은 욕심쟁이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적어둔 바 있습니다. 그러면 그 욕심의 근원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책을 쓸 정도로 추구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감히 말하건대,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자, 그러면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너무 막연하니까 좀 더 줄여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라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본 3대 욕구가 충족된다면 행복해지는 걸까요? 아닙니다. 3대 욕구가 충족된다고 해도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고개를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욕구를 또 충족시키면 행복해지는 걸까요? 글쎄요, 애초에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잠깐 제쳐놓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욕구의 끝은 죽음, 자기 파멸과 같은 행복과는 거리가 아주 먼 단어로 귀결됩니다. 그 이유는 쉽게 말하면 욕구의 근원은 결핍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행복해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이 질문의 답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라도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들을 포착해서 그 근원을 파악해보면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언제 행복감을 느낄까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밥 먹을 때 행복해졌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행복할 때가 있었으니, 바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이었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는 겁니다. 그럴 때 저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물론 이성과의 관계에서만 이런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친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단순히 인간관계에서만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책을 읽을 때.. 그 수많은 행위들이 저에게 비록 조그만 행복일지라도 제 마음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면, 음악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연주하거나 부른 것들입니다. 책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글이지요. 음식도 더할 나위 없으며 특히 인간관계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행복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나 내릴 수 있겠습니다.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에 달린 것이다, 라는 답을 말이지요. 물론 위의 답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무책임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변명하라면 60억의 사람이 있다면 60억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있다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이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들이 남긴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 외우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고민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세요’ 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행복에 대해서는 이 책을 쓴 강신주씨나 저나 비슷한 생각을 한 듯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강신주씨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사유하며 몸부림치던 14명의 철학자와 14명의 시인을 불러들였으니깐 말이지요. 그가 불러낸 철학자들은 보드리야르, 바르트, 마르크스 등등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정도로 자신들의 사상을 갈고 닦아서 이윽고 보석에 이를 정도로 단련시켜왔던 철학자들이며, 그가 불러낸 시인들은 한용운, 백석, 이성복 등등 우리 나라 문학계를 주름잡았던 자신 나름대로 스스로를 표현해왔던 아름다운 시인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책에서 다룬 철학자들과 시인들 중에 한 명씩에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김종삼과 블랑쇼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 책의 모든 알맹이는 이 김종삼과 블랑쇼를 다루는 챕터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만 삶도 분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피상적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당연한 사실을 서술해놓은 문장이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사실은 죽음은 삶과 겹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 문장은 죽음의 반대편으로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특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을 가져온 것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기에 대해서 ‘상실의 시대’에서 멋들어지게 적어두었습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이 것을 삶과 죽음이 이루는, 서로가 배타적이지 않으나 인접해 있고 동시에 떨어져 있는 그 관계에 집중해서 그 범위를 넓혀보면 나 자신과 ‘타인’ 이 이루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 되겠습니다. 나는 타인과 다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는 서로의 일부입니다. 타인과 내가 이루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 를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역설적으로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 타인과 구별되는 특질을 가진 ‘나’ 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타인의 범위를 넓혀서 타자로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면 블랑쇼나 김종삼은, 더 나아가서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철학자들은 저 타인과 내가 이루는 관계에서 무엇을 깨닫고 싶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여기서 이 책에서는 블랑쇼의 말을 인용합니다. ‘죽음으로 존재에 이른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은 다른 수많은 경구들이 그렇듯이 그 속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책에 따르면 이는 결과적으로 언어의 한계, 생생한 정물을 포착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생생한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의 기능을 드러낸 말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타자는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타자가 그 스스로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게 됩니다. 즉, 타자는 나와의 관계를 전제로 했을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라는 이야기지요. 제가 앞에서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다, 라는 말도 그런 의미에서 쓴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것은 작용입니다. 언어든, 비언어적인 행위든, 혹은 일방적인 정동이든, 사유든 그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즉, 블랑쇼나 김종삼시인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언어의 기능과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과 함께 타자와 나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존재를 가두고 죽여야만 (그 존재를 의식에 내가 인지할 수 있게 포착하였을 때) 존재에 이르는 작용(인식에 이르는) 자체의 불완전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애초에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불완전 할 수밖에 없지요.) 마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 결론은 비단 블랑쇼 - 김종삼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철학자 - 시인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는 철학과 시는 각각이 담당하는 이성이나 감성과 같은 영역을 뛰어넘고 서로를 보완합니다.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성과 감성을 함께 아우르는 이런 작업이 쉬울 리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오류와 함정이 존재하는 법이지요. 원래 행복에 이르는 길은 가시덤불을 넘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 책에서도 수많은 함정을 피하고 가시를 피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아쉬운 점은 시인의 시를 너무 적게 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의 시를 함께 모두 찾아 읽으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미리 철학을 준비해두고 그 철학에 맞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는 시를 골라서 주제를 풀어나갔다고 말이지요.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해서는 시가 더 많이 수록되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철학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미리 시를 골라놓고 입맛대로 철학을 뽑은 것 아닌가, 하는 점도 제기할 수 있고 말입니다. 사실 이 책은 읽기에 좋고 문체가 대화식이라 시와 철학의 소개에 정말 적합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서로의 합작을 위해서는 철학의 깊이에서는 작가의 전작인 ‘철학 vs 철학’ 과 같은 책들에 비해서는 조금 떨어지는 편입니다. 시 해설의 부분에서는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부족한 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서로의 일부분을 희생한 것이지요. 게다가 철학자들이나 시인들의 주장 모두를 개괄적으로 다룬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책으로 보는 철학자들과 시인의 주장들은 삼차원 구체를 면으로 잘랐을 때 보이는 그런 단편적인 부분들에 지나지 않는 단점이 있지요. 김수영 시인에 대한 끊임없는 예찬도 아쉬운 부분이라면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이는 저자 자신의 취향에 관련된 것이니 더 이야기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가장 아쉬운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개념을 소개하는 데 있어 그 개념의 단어를 분석해서 이끌어낸다는 점입니다. 책의 예를 들자면 책에서 대화는 이렇게 소개됩니다. 두 사람의(dia) 이야기가(logos)가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dia+logos는 dialogue가 됩니다. 대화의 영어 단어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아경, 엑스터시에 관해서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엑스터시의 라틴어 어원인 ekstasis를 가져오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엑스eks=ex와 스타시스stasis와 같이 분석까지 해서 그 뜻이 ‘자신이 없다고 느껴지는 경지나 상태’ 라는 것을 밝힙니다. 책 내에서 읽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대목이지만 사실 이런 식의 분석은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접두사, 접미사 구분해서 외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영어 단어를 외우려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개념으로 개념을 설명하는’ 순환논증에 빠지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독자들에게, 특히 영어라면 치가 떨리도록 열심히 공부했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매우 친숙하게 다가오는 설명법이겠지만 진정으로 개념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그 개념의 역사적 연원부터 시작하여 어떤 변천을 거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 옳았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책은 아름다운 변주곡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름다울 뿐만이 아닙니다. 복잡하게 공부를 하면서 들어야 되는 어려운 변주곡들도 아닙니다. 어떤 클래식들은 나를 들으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 하면서 대위법이나 화성의 변화 등을 들이대기도 하지만 이 변주곡들은 눈감고 가만히 그 흐름에 맡기면 되는 곡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변주곡들은 바흐의 클래식과 유키 구라모토의 뉴에이지 그 어딘가에 흐르고 있겠습니다만 (유키 구라모토의 곡들이 아주 뒤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철학은 철학 따로, 시는 시 따로 다른 부문 각각을 따져가면서 그것도 공부하면서 머리 싸매고 외우는 것보다 그 둘을 한 번에 묶어서 그것도 듣기 쉽게 해주고 그리고 그로 인하여 감성의 날카로움과 이성의 우아함을 겸비하게 해준다면 이런 곡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책은 저자 강신주 본인의 경험으로 마무리 지어집니다. 지리산에 별을 보면서 숭고의 감정을 느꼈다고 하지요. 저도 저 숭고의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잘 압니다. 저 또한 산에 올라서 바위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별들이 정말 쏟아질 것만 같이 가득 보이는 경험을 했었으니깐요. 그때 불현듯 눈물이 났었습니다. 너무 기쁘기도 하고 너무 슬프기도 하고 뭐라고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숭고의 감정이라는 표현을 쓴 사람은 서구 이성의 거목 칸트입니다. 차갑게만 보이는 그런 철학자들도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아니, 어쩌면 철학을 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반대의 상황도 있을 수 있겠고요. 누나 가슴에 삼천 원 정도는 있다고 어느 드라마에서 했었던가요, 하하,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소절과 철학 한 문단 정도는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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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24 01:09   좋아요 0 | URL
60억의 사람이 있다면 60억의 행복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 들은 적 있어요 선생님이 그 반 아이들한테 너희들 가운데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안에서 한둘밖에 없다고 하니, 한 학생이 그곳에 있는 모두 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다르다고... 같은 말이군요^^

감성과 이성은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함께 있다
살아가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고 하는데, 감성과 이성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군요 마음에 따르는 수밖에...^^

시와 철학이 그렇게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희선

가연 2013-10-31 08:40   좋아요 0 | URL
사실 이 리뷰는 좀 애매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리뷰 쓰면서 어떻게 쓰는게 좋을까 생각을 좀 했었었거든요. 결국 이렇게 쓰여졌지만.. 다시 쓰라면 이렇게 안쓰일 것 같아요.

감성과 이성이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는 이야기이긴 한데, 여기도 설명이 좀 애매하였던 것 같네요. 언젠가 이에 대하여 끄적일 날이 있겠죠

마지막 말에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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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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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1.



  요즘 사회의 트렌드라면 독설과 직설의 재조명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전에 ‘슈퍼스타 K 2’에서 주목받았던 이승철의 독설로부터 시작해서, 이번 ‘위대한 탄생 2’에서는 윤일상이 출연자들에게 독설을 무자비하게 퍼붓는다지요. 가수들만 독설을 내뱉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가장 핫이슈로 떠오른 ‘나는 꼼수다’ 라는 방송의 4인방은 주저 없이 독설을 내뱉지요. (대상은 모두가 잘 아실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이전에 독설이나 직설로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가수 신해철도 들 수 있겠습니다. 백분 토론이나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어떻게 말을 하는지 잘 기억하시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독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에 윤일상의 경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독설이 아니라 직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꼼수다 4인방의 말도 독설뿐만이 아니라 현안에 대한 직설들도 가득하지요. 이런 유명인들만 직설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것을 위선이라고 보고 솔직한 것이 좋다는 분위기가 자주 조성됩니다. 속에 쌓아두면서 뒷담화를 하지 말고 쿨하게 앞에서 이야기해라, 라는 이런 분위기는 옛날 같았으면 버릇없다는 이야기에 눌려서 쉽게 생길 수 없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저만해도 이전에는 남의 감정을 이리 저리 계산해보면서 이 말을 해도 좋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 면모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이런 직설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때와 상황을 잘 살펴보면서 직설을 해야만 그 직설이 진실로 효과를 발휘하겠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된 직설은 타는 목을 넘어가는 차가운 생수처럼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것입니다.

저런 수많은 독설과 직설에다가 한홍구, 서해성이 ‘직설’ 이라는 책을 한 권 더 보태었습니다. 이전에 한겨레 신문에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이라는 코너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손님으로 불러서 여러 현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던 것들을 묶어서 이번에 이렇게 책으로 펴낸 것이지요.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이 책의 저자들, 아니 대담을 이끌어나가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볼 때 큰 편견이 없이 읽을 수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2.


  사실 이 책은 저에게 쉽게 읽혔습니다. 고백하건데 지금껏 인문서적을 읽으면서 이 책만큼 쉽게 다가왔던 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예 구어체로 쓰인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닥치고 정치’ 와 같은 책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쉽게 읽혔다고 해서 그 내용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책 내에는 청소노동자문제, 이주노동자문제, FTA문제, 청년실업문제 등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이슈가 되어왔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생생하게 육화된 음성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지요. 사회적 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그런 인물들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시대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리영희, 고은에서부터 김제동이나 류승완에 이르기까지 한홍구와 서해성이 링에 초대하는 인물들은 각계각층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고,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 이제 남은 것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겠지요. 이 책에서는 사회적 문제의 직접적인 해결 방안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회적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역할을 맡게 된 인물들을 초대해서 대담을 다룹니다. 바로 정치인들입니다. 물론 정치인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바로 고개를 저으실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 또한 정치인들에 대해서 강한 불신감을 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깐요. 오죽하면 국회의원들을 조롱조로 국민들이 국K-1이라고 부르겠습니까. (K-1은 격투기 대회 이름이지요.) 그러나 갑자기 국회의원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다면 정국은 혼돈으로 빠져들 것입니다. 이들은 좋든 싫든 일단은 민의를 대표한다는 중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쉽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책의 저자들은 민주당, 민노당, 한나라당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들을 초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3.


  그런데 저로서는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찜찜한 기분을 완전히 지워낼 수 없었습니다. 통찰 혹은 구라, 라는 꼭지로 묶여서 쓰인 첫 번째 부분에서는 유홍준씨를 다룰 때 대담 후에 책의 저자들이 몇 자 덧붙이는 ‘잔설’ 이라는 부분에서 조선 ‘3대 구라’ 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백기완, 방동규, 황석영이 바로 그 사람들인데 저자들이 그들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상당히 경건합니다. 책에서 쓰인 이 구라라는 말은 이야기꾼이라는 말과 거의 비슷하게 쓰입니다. 완전히 허구를 채집하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을 살아냄으로서 가지게 되는 경험을 바탕으로 ‘썰’을 풀어나가는 사람들, 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한 이 ‘구라’ 들은 항상 재야에 있을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요. 그리고 이 ‘구라’ 라는 말은 거짓말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조선 3대 구라는 조선 3대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조선 3대 거짓말쟁이가 조선 3대 구라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하는 말들이 순전히 허구가 아니라 삶에서 비롯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구라라는 말은 거짓말과는 차원이 다른 생동감과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유홍준을 유구라라고 부르면서 저 3대 구라의 뒤를 이을 신진 구라로 표현하기도 하고 뒤에 가면서 읽다보면 저자 중 한 명인 한홍구를 한구라, 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서 고개가 약간씩 갸웃거려졌습니다. 뒤의 잔설들을 다시 읽어보면 마치 3대 구라라는 권위를 두고 신진 구라는 누구인가, 를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저자 한홍구를 한구라라고 추켜세우는 사람이 다른 저자 서해성이고 보면 재야 학자들끼리 서로를 높여주는 듯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었지요. 물론 이런 생각이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라’ 는 ‘구라’ 자신이 받은 긍정적인 이미지와 생동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재야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생동감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생기는 것이지 절대 대중과 유리된 학계에서 생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요즘 트위터와 같은 SNS가 많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그 간극이 매우 줄어들었습니다만 아직도 재야가 아닌 중심 되는 학계에 있으려 하거나 정계로 진출하려고 하면 대개 좌절을 겪게 됩니다. 이는 사회가 형태가 다른 생각을 쉽게 수용을 못하는 것과도 연관이 되겠고 모난 정이 돌을 먼저 맞는 이치와도 비슷하겠지요. 그래서 사회에서 맞은 정을 서로 보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못내 찜찜함을 털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 생각이 지나친 것일 수도 있겠고, 설령 보듬는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는가, 라는 반론을 들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네, 적어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회를 밝히려는 사람은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끊임없이 내쫓기더라도, 심지어 불나방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이 사회에서 부딪혀나가야 된다고 말이지요. 사회 변혁의 이상을 품고 있는 개인은 그 스스로를 날카로운 창이 되도록 갈고 닦아야만 합니다. 신 앞에 선 인간은 절대 고독을 느끼게 되지요. 그는 그렇게 신 앞에 자신을 모두 내던지듯이 스스로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를 보듬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들만의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게 됩니다. 목적을 중심으로 모인 조직이나 사회와는 다르게 이런 보듬는 행동에는 사사로움이 관여하게 되고 이는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그런 조직에 의존하게 만들며 이윽고 그들은 안주하게 되겠지요. 물론 사회에 아무리 부딪혀도 사회는 꿈적도 안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개인의 인생이 개죽음처럼 압사당하는 경우도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개개인의 날카로운 창이 한 다발 묶여서 함께 같은 곳을 공격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하는 이야기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동작전은 단순히 묶여서 되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쏘아서 10점을 몇 번이고 연속해서 적중시켰을 때 그 화살들이 개개가 묶이지 않고도 모두 한 점을 향하는 것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사로움을 피하며 하나의 목적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개개의 생명력이 살아있는 그런 현상이 되어야만 하지요. 이와는 반대로 창이 단순히 한 다발 묶이면 필연적으로 그 창 개개의 부피 때문에 창날 사이에는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 생각 사이의 간극이라고 부르면, 결국 그 공간들 때문에 사회의 변혁에 실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4.


  책의 네 번째 꼭지는 정치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명, 그들의 희망’ 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잘 지은 제목이라고 여겨집니다. 나온 정치인들을 보면 천정배부터 시작해서 강기갑, 홍준표, 문재인 등이 있는데 이전에 읽었던 ‘강남좌파’ 와 겹치는 정치인도 보이고 거기서 다뤘던 일화와 연관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가장 흥미로웠으면서도 가장 읽기 싫던 부분이기도 하였습니다. 어차피 변명할텐데, 어차피 실현할 마음도 없는 이야기들을 할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네, 적어도 저한테는 정말 변명을 하고 그렇게 의욕도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립서비스로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 자체의 한계입니다. 예를 들어서 홍준표 의원과의 이야기는 여섯 시간이 넘게 계속되었다지요. 그렇다면 적어도 공식적인 직설 대담만 해도 두 시간 정도는 되었을 텐데 막상 옮겨진 대담은 10분도 채 안되는 듯 합니다. 물론 책으로 읽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은 짐작합니다만 그래도 중간 중간에 이야기가 붕 뜬다, 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은 아마도 긴 대담을 축약하는 데서 비롯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한나라당의 경우에는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적지에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책을 내고 기사를 내는 주체는 한겨레 신문사입니다. 아무리 공정하게 옮긴다고 하더라도 정말 내밀한 무의식적인 부분에는 거리감이 남아있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책의 한계 외에도 마음에 걸렸던 것은, 대담자들의 대담에서의 새로운 변명 방식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에 대해서 언급이 들어오면 입을 다물고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무 명명백백하게 잘못된 내용을 자료를 제시하면서 책의 저자들이 들이대면 바로 싱겁게 인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싱겁게 인정하는 것은 마치 그들이 그런 잘못된 내용을 '쿨한 척' 넘겨버리려는,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내용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었지요. 그들의 기저에는 그저 인정 한 번 했다, 라는 행위만 남았을 뿐이겠지요. 저자들이 그 부분을 좀 더 집요하게 잡아서 대담자들의 기저에 위치한 저항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대담 서너 시간 만으로 지향하는 바가 달라진다면 처음부터 그 자신이 지향했던 바는 허상이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근본적인 시선은 바뀌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고 저항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을 너무 깊게 파고들게 되면 대담이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했겠지요. 혹은 그렇게 파고들었지만 책에 쓸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편집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이런 변명들을 제외하면 어찌되었든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핵심 목표는 저 '그들의 희망' 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그래도 사회가 살만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는 만들어주었습니다. 이게 다 직설의 힘이겠지요. 근본적인 것을 공격하는 직설적인 질문을 했으니 그 질문을 받은 사람들도 핵심이 되는, 그들 주장의 골자가 되는 이야기들을 꺼낼 수밖에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5.


  '쩐의 전쟁' 이라는 드라마가 한 때 브라운관을 점령하던 시기가 있었더랬죠. 박신양이 주연인 금나라 역할을 맡고 상당한 열연을 보여주면서 호평을 받았었습니다. 그 내용은 부친의 사업실패로 인한 빚 때문에 채무자가 되어서 힘들게 살던 금나라가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원수 마동포에 대해서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그 결말이 개인적으로는 실망이었습니다. 좀 허망한 결말이었기도 하고 끝으로 가면서 드라마가 점차 힘이 빠지는 것처럼 보였으니 때문이지요. 그러나 쩐, 그러니깐 돈을 앞두고 벌어지는 암투는 정말 전쟁처럼 장대하게 펼쳐졌습니다. 이 '직설' 이라는 책도 말이란 측면에서 보면 정말 쩐의 전쟁에 모자람이 없는 '썰의 전쟁' 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습니다. 저자들은 끊임없이 직설과 독설을 날립니다. 하지만 그 썰들 사이에는 해학이 있고, 저자들의 인생경력과 근거는 썰에 생동감과 신뢰감을 심어줍니다. 서해성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잡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화제를 대담자들에게서 이끌어내며, 한홍구는 '걸어다니는 한국 현대사' 라는 별명에 걸맞게 대담자들이 마치 자신들이 살았던 격동의 시기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어 생생한 이야기를 건져올려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두 사람이 이루는 앙상블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 '썰의 전쟁' 으로만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쩐의 전쟁은 끝내 금나라의 죽음으로 그 끝을 맞이합니다. 모든 것을 이룬 순간 허망하게 마동포의 일격에 문자 그대로 뒤통수를 맞고 즉사하지요. 이는 적어도 제 생각에는 더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역량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결말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썰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끌어 나갈 역량이, 여기서는 대중적이고 지속적인 관심과 사회적 의식이 되겠습니다만, 없다면 수많은 직설은 이 책으로 그대로 결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역량의 고취가 필요하겠고, 그런 '썰의 전쟁을 넘어서는' 역할을 맡은 존재는 바로 당신이 되겠지요.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의 당신이 말입니다.
 

 

 

 

 

 

 p. s. 마지막 리뷰이네요.. 그동안 9기 신간평가단...ㅎㅎㅎ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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