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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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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가 러셀이라는 이름을 처음 보게 된 것은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책 '논리철학논고'에서였습니다. '논리철학논고'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총 명제는 일곱 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일곱 개를 이해하기란 정말 쉽지가 않지요. 게다가 중간 중간에 함수를 끌어와 이론을 전개해 나가는 통에 저는 중간에 읽다가 책을 놓다가 뒷부분으로 훌쩍 넘기는 등 결국엔 완전히 다 읽지 못하고 놓아두게 되었습니다. '논리철학논고'가 무엇을 다루느냐면, 언어와 논리에 대해서 다룹니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그림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철학적 문제는 언어가 명확하지 않을 때 발생하며 철학은 이를 명료화하는 과정이다.’ 등을 다룬다고 적어두겠습니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건데 정말 쉽지 않은 책이라 제가 위에 저 책이 저런 것들을 논한다, 라고 언급한 부분이 정말 그러한지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군요. 그런데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의 어디서 러셀이 언급되었을까요? 바로 이 부분입니다.


'러셀의 도움으로', '러셀이 그의 책에서 논증하듯이'


사상이라도 완전 다 언급한 줄 알았네, 라고 기대하셨던 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러셀의 이름은 거의 저런 식으로밖에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데 저렇게 어려운 책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다니, 그것만으로 정말 대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사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종류의 논리학에 대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었지요.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것은 사실이고, 비트겐슈타인의 재능을 개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그들은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라는 말과 함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었지요. 그러면 러셀은 과연 어떤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의 인생은 어디에 바쳐져있었기에 그가 매료되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성과를 비판하기에 이르렀을까요.


2.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라는 책은 원제가 'Bertrand Russell's Best' 라고 합니다. 러셀은 그의 긴 삶과 함께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기에 그의 책을 모두 접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저만 해도 러셀의 저작이라고 한다면 다른 책들에서 언급된 2차적 저작물들이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와 같은 책정도 밖에는 읽어보지를 못했으니깐요. 그렇기에 그 저작물 중 엑기스라고 평가할 만한 부분을 모아서 이렇게 책을 내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러셀의 베스트, 라고 평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러셀을 정말 대가다, 라고 평할 수 있는 부분은 수학과 논리부분이겠지요. 그 외의 부분이 뒤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큰 족적을 남긴 기호논리학부분이라던가, 논리에 대한 그의 공헌을 빼놓고 제목을 베스트, 라고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러셀은 이 책, 그러니깐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에서 한마디 합니다.


'그러면 책 판매 부수가 줄어들 거야'


그렇겠지요. 논리와 수학에 관한 내용을 싣는다면 분명 일반 대중들로서는 관심이 멀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관심이 멀어질 대중들 속에는 저도 물론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제외한 남은 부분, 그러니깐 이 책에서 다루는 결혼과 성이라던가, 윤리, 정치, 심리, 종교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러셀은 그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말들을 아낌없이 내놓아 보입니다. 철학은 어렵다, 철학자들은 항상 딱딱한 말만 한다, 등의 편견이라도 깨듯이 그 자신이 철학자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그 자신이 쉬운 말로 대중들을 위해서 그의 생각을 정제시켜나갑니다. 프랑스의 어느 문필가가 했던 말이던가요, 현인은 쉬운 말로 상대방을 납득시키고 우인은 그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어려운 말을 쓰는 경향이 많다고 하지요. 가벼운 말 속에 곱씹어볼 내용이 있다는 말은 그 말 자체는 하기 쉬울지 모르나 실제로 그런 말을 이끌어내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러셀은 이런 점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그의 해학으로 끌어오면서 동시에 그들의 생각에 ‘생각거리’를 던져줌으로써 그가 현인임을 드러냅니다. 그가 작고하기 몇 주 전까지 이 책의 원고를 검토했다는 말은 그가 대중에게 다가가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했나를 보여주는 말이겠지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지 못한다면 그의 사상은 사라지게 되고 대중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대의 굵직굵직한 이슈들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힘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시대에 대답을 하는 일’ 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들 중에는 그를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중 생활을 하게 만든 반핵시위도 있지요.


3.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이야기는 책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 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당황스러웠던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책 페이지를 지적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종교 부분의 101페이지에 똑같은 문단이 다시 반복되지요. ‘내가 보기에 자연의 ~ 잊지 말아야 한다’ 부분입니다. 여기가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적어두었는지, 책의 원본에도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이 되어있는지, 아니면 편집상의 실수인건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아마도 후자에 더 무게가 실리긴 합니다만... 이 부분이 굳이 반복되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구성에 대한 단점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각 글에 출처를 바로 밑에 명시한 점도 사실 내키지 않습니다. 마치 모자이크 조각을 그러모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각 부분에 대해서 '여는 말', 그리고 '닫는 말'이 따로 첨부되어있는데, 적어도 닫는 말은 없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닫는 글이 있음으로서 손님이 집에 왔는데 어린애가 난리를 피워서 안방이 엉망이라서, 억지로 문을 밀어붙여놓은 그런 느낌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비유를 들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러셀은 어린애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나름대로 사색을 한 결과로 빚어낸 문장들인데 그것들을 뭉뚱그려서 닫아버리려고 하니 어색한 느낌을 받았었지요. 이제 내용에 관한 단점을 지적하자면 가장 먼저 들 수 있는게 가볍다는 점입니다. 러셀의 풍자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기는 쉽습니다.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그들의 생각의 방향을 전환시킨다는 점에서는 이 책이 제 몫을 다하겠지요. 웃음 속에 우리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거리가 진지한 사색으로 발전하느냐는 의문에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그래서 러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의 저서를 읽어본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는 쉽게 만족하지 못할 글들입니다. 하나 더 지적하자면 글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글 전체의 맥락입니다. 예를 들어서 문단 A, 문단 B, 문단C로 구성된 글이 있다고 합시다. A, B가 서로 상반된 내용을 주장하지만 C까지 읽어보니깐 정말 작가가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A였습니다. 그런데 글의 일부분만 발췌하여서 인용한다면 B를 인용한 사람은 작가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를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지요. 러셀의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책들 중 수많은 책들의 ‘일부분’ 이 글 전체 내용과는 상관이 없이 그를 비난하는데 쓰여 왔습니다. 이 책은 그런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이 책만 읽고 러셀에 대해서 정반대의 주장을 가지고, 혹은 그의 주장의 일부분을 가지고 버트런드 러셀에 대해서 아는 척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실제로 그의 사상을 집약해서 정의하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4.  


그러나 저렇게 비판할 부분만 이 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은 그 단점을 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첫 문단의 의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삶은 어디에 바쳐져 있었을까요? 여기서 잠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노암 촘스키는 그의 연구실에 러셀의 좌우명을 붙여놓았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의 글입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었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글은 이 책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의 표지와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삶은 사랑에 대한 갈망과 탐구욕, 그리고 인류에 대한 연민에 바쳐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저작활동을 하고 반핵운동에 뛰어들고 굵직굵직한 이슈에 답해온 것이 이해갑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러셀이 대중들 속으로 뛰어들어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은 그가 대학교 교수 임용에서 외설 시비로 인하여 떨어졌을 때부터였겠지만, 그 사실이 그가 대중에 대해서 연민이나 사랑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대중과 갈수록 멀어지는 언어철학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저 글은 이 책이 가지는 의의를 새롭게 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러셀은 평생을 걸쳐서 스스로의 의견을 새롭게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주장은 세월이 지나가면서 다른 견해를 수용하면서 바꾸어나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것은 결국 사랑과 연민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랑이 지나쳐 네 번씩이나 결혼을 했겠습니다만, 아, 이렇게 쓰면 러셀이 저를 인습과 지배적 도덕에 사로잡혔다고 비판하려나요, 그러나 이런 결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비판과 풍자가 결국에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오늘날과 같이 서로를 감싸 안을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한 시대에 따뜻한 햇볕을 비춰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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