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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ㅣ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평점 :
들어가는 말
원래 이런 글을 굳이 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남기지 않았었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몇 마디 남기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먼저 쉽지 않은 책이었다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저는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련되어서 기초도 별로 없고, 마르크스의 저작물들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가 문맥에서 쓰는 용어의 의미를 모두 제대로 포획했다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 이 말을 굳이 쓰냐면, 이 책 '인지자본주의'의 저자인 조정환씨는 본질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네그리의 영향을 받아서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꼭 붙여야 된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그의 글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 분석은 그가 평소 주장하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괄호 안에 넣고 문맥을 고려해서 그의 생각이 마르크스주의와 유착에 빠지지도 않게 하고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낸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저작물들, 특히 ‘자본론’ 정도는 읽어보아야 그의 분석틀이 정말 옳은가 구분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멍하니 책만 쳐다보았다면 마치 모래알이 알알이 흩어지듯이 그의 텍스트들은 저에 이르러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일부의 의미라도 파악하고자 다른 책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과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그리고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 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네그리의 ‘제국(*)’ 을 완전히 읽고 싶었지만 그 텍스트의 난해함에 이르러 중간 중간 벽에 막혀서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이런 저런 요약과 다른 분들의 생각에 의존하여 제국의 큰 모습을 그려보는데 만족해야만 하였습니다.
제가 저렇게 읽은 책들을 나열하는 것은 나 이런 책들을 읽었어, 많이 읽었지, 라는 생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자본론’ 을 읽지 못했으며 결국 저자가 사용한 경제적 틀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어서 아래의 서평에서 경제적인 담론을 어쩔 수 없이 배제시켰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쩌면 한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이렇게 글을 쓰는 두 번째 이유를 밝힙니다. 아래에 글을 전개해나가며 위의 책들을 자주 인용할 것 같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용어나 어려운 사유는 문맥 속에서 뜻을 먼저 밝히려 노력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의미가 엇갈리거나 불분명한 이야기를 하게 될 가능성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는 저 위의 책들에서 가져왔으니 위의 책들을 참조해주시고, 그럼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신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1.
학문의 분야를 거칠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과학 계열과 인문 계열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실 과학 분야에 발을 디디고 서 있습니다. 특히나 큰 틀에서 보면 생물학 분야이지요. 그래서 사실 ‘인지자본주의’ 라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과연 ‘인지’ 라는 과학적 개념을 어떻게 인문학에다 접목시켰는가, 이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인문학자들 중에는 과학적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변용시켜서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수준으로 끼워 맞추는 행위를 하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인문학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과학적 개념을 억지로 인문학에다 접목시키려는 과학자, 혹은 정신분석학자들도 적지 않지요. 잠깐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정신과 의사 자크 라캉도 사실 이런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과연 여기에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초미의 관심사였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어도 저의 판단으로는 저자는 인지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책에서 언급하는 다른 과학적 개념들, 자기생성능력이나 조직 등의 개념을 책에 어느 정도 잘 녹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가 근거로 삼는 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투라나나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주장하는 구성주의 생물학과 그 테제는 저자와 같은 자율주의 이론가들의 구미에 당길만한 이론이라는 점을 차지하고서라도 말이지요.
저자가 말하는 인지 개념은 책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바렐라나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그리고 일반적 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인지 개념과 거의 동일합니다. 말 그대로 생물체가 이해가고 느끼는 등의 정신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인지를 다른 말로 변용하자면 ‘앎’이 되겠습니다. 앎 또한 대상에 대해서 정신적 과정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할 테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 앎은 절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인지발달의 최전선을 달리는 과학이라는 필드에서는 오늘의 앎이 내일의 모름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굳이 최신 경향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관찰하는 대상이 과연 진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위치에 있는가? 여러분들의 경우에는 이 글이 되겠지요. 과연 이 글을 내가 정말 보고 있을까? 한 쪽 눈을 감았다가 반대 편 눈을 감았다가 반복해보시면 이 글의, 이 화면의 위치는 좌우로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혹은 착시 현상과 그를 이용한 ‘옵티컬 아트’ 들을 예로 들어도 좋겠습니다. 시각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후각도, 우리의 말단 사지도 그런 속임수를 씁니다. 누가 사고로 다쳤습니다. 그런데 다친 부위를 정밀 검사를 해보니깐 어느 정도 운동능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다친 부위를 쓰려고 할까요? 아닙니다. 설령 운동능이 남아있어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운동능은 신경이 보존되고 근육도 여전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운동잠재능이 있는 경우에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현상을 ‘Learned disuse' 라고 부릅니다. 예시가 길었네요, 사실 위의 말들을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다’ 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인식은 절대 확실하지 않으며, 우리의 앎은 제한적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일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지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발화가 일어난 ‘문맥’ 속에서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맥은 환경이라는 말로 대체시킬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해보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인지 능력을 가진 개체만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겠지요. 저자가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한 인지 개념을 프란시스코 바렐라나 움베르토 마투라나에게서 가져왔다면 그 의미는 바로 위와 같은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인지에 관해서 시사점들을 밝혀놓습니다. 인지를 가진 개체는 그 자신의 인지적 행위에 의해서 세상을 조각해나가며 그 개체는 환경과 구조접속을 통해서 서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진화해나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2.
지금까지 인지자본주의의 ‘인지’ 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인지와 결합한 이 인지자본주의에 대해서 생각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뒤에 저자와의 문답에서 저자가 밝혔듯 인지자본주의나 요즘 많이 들려오는 신자유주의나 모두 사유하는 대상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답을 얻어내려면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두루뭉술하게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지자본주의로 규정하였기에 거기에 대한 해결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 에서 자기조절시장의 허상을 역사적으로 낱낱이 파헤치고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품으로 매겨서 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상품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연도 크게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화폐도 허구 상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동과 토지, 화폐 모두가 허구 상품인 셈입니다. 상품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품으로 포장시켜서 우겨넣고 시장경제라는 허상에 경제 주체들이 그들을 억지로 맞춰가려니 병이 생기는 겁니다. 현대 사회의 병폐는 그런 것들에 기인한다고 칼 폴라니는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을 상품화하는 사회에 대해서 조금 더 주목해봅시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상품화를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거칠게나마 큰 부분으로 둘로 나누면 육체와 정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품화는 육체에 관한 것과 정신에 관한 것으로 분화되겠지요. 먼저 육체를 상품화하는 그런 노동을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껏 이뤄진 자본주의하의 착취는 이 육체의 상품화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에서 중점적으로 따져본 것도 이 육체의 상품화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의 시대에서는 산업자본주의의 여명기였기에 육체의 노동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정신의 노동에 점차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농업이나 공업이 과학 기술과 접목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노동력을 집적해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지요.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노동력들은 남아돌게 됩니다. 이 남아도는 노동력을 가진 개인은 그들 자신의 자아를 찾아나가면 좋을 텐데 자본의 힘은 탐욕스러워서 그런 순진한 생각을 단숨에 부숴버립니다. 이는 비단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유연성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해서 해방되기는커녕 이제는 하루 24시간 내내 눈을 부릅뜨고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모든 부문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전에 상업자본주의나 산업자본주의가 상업과 산업으로만 구성된 자본주의가 아니듯, 지금 저자가 현대의 상으로 규정하는 인지자본주의도 이 인지에 관련된 노동으로만 구성된 자본주의는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단순히 몸만 제공하던 노동을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이다, 라고 그 위상을 낮춰버린 것입니다. 이는 이해못할만한 변화는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과학 기술의 생산에 더욱 더 무게추가 실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 라는 격언이 힘을 얻게 됩니다. 참 돈벌기 쉽지요. 직접 해주는 것은 없으면서 방법을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 그것이 다 아이디어가 되고 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는 인지에 관련된 노동들을 높은 가치를 가진 것처럼 치부하며, 지금도 수많은 부모들은 이 이성적 측면의 인지에 관련된 노동을 자신들의 자녀가 택할 수 있도록 여러 학원을 전전하고 계시겠지요.
인지의 또 다른 면인 감성적 측면도 부단히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요즘은 무슨 직업에 종사를 해도 서비스가 좋아야 돼, 손님을 잘 맞이해야 돼, 등의 말이 오르내립니다. 조금만 불친절하게 굴면 인터넷에다가 글을 올리지요. 어디어디는 좋지 않더라, 등으로 말입니다. 스튜어디스의 예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항상 그들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항상 웃는 얼굴로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이더라도 직장을 나서는 순간 항상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늘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그것이 크게 와전되지는 않을까, 이 직장을 얼마나 오래 다닐 수 있을까 등등 말이지요. 이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정동적 측면에까지 침범하여서 긍정적 감정을 수탈해나가고 공황이나 두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의 독을 퍼뜨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바로 위의 글에서는 인지라는 말과 정신, 혹은 더 거칠게 과학 기술과 같은 이성적 측면과 감정과 같은 정동적 측면의 합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사유를 전개해나가는데 제일 처음 문단에서는 우리는 인지에 관해서 말할 때 그 환경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은 인간에 내재된 것이고, 환경은 인간의 밖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연속해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는 상반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가집니다. 우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야 한다, 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이지요. 저 표현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들은 정말 불가항력적인 괴물들인데, 그 괴물들이 좁은 항해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으르렁 거리는 상황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식론에 이르러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 각각 재현주의와 유아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환경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내적인 유아주의, 관념론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정말 그 오디세우스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간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처음 문단의 마지막에 이르러 ‘환경과 구조접속을 통하여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 는 말을 한 것입니다. 환경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는 개체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인지가 정신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쓰였지만 그 정신 외부의 환경을 끌어들여야 하겠습니다. 외부의 환경은 작게 보면 그 개체가 속하여 자라면서 그 정신을 형성한 가족이 있을 수 있겠고, 넓게 보면 시대 상황 전반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외부의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정신이 있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내가 정신활동을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정신활동을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
이 ‘다중’ 이라는 개념은 이 책 ‘인지자본주의’ 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회적 차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있으면서도 그 이질성이 그들의 진보를 저해하지 않으며 서로 공동으로 소통하고 활동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말이지요. 앞서 해온 말들을 여기다 대입시킨다면 상호작용이 서로 열렬히 일어나는 집단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외부의 사람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마찬가지로 환경과도 끊임없이 구조접속을 통한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집단이지요. 우리의 몸으로 보자면 세포 하나하나가 모여져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들이 모여서 일종의 계(순환계, 소화기계..)를 만드는 그런 그림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지능력,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까지 노동을 끌고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의 예시는 쉽지요. 스마트폰을 통한 업무 보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과학기술의 발달은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착취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접속을 더욱 쉽게 만듭니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마치 공장이 파업의 장소로 점거된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이것의 예시도 쉽게 들 수 있겠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언제 어느 때든지 쉽게 접속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조접속은 우리에게 정신과 정신이 직접 맞부딪히며 상대와 상호작용을 하도록 합니다. 기존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상호작용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현대의 이런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사용자 자신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겠지만 온전히 각 개인의 이질성들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인지자본주의 시대, 혹은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 의 대항마로서의(이 부분은 사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썼지만 엄밀히 말씀드리면 ‘다중’ 의 대항마가 ‘제국’ 이라고 써야 옳습니다.) 주체인 다중이 대두되는 것이지요.
4.
그런데 이 ‘인지자본주의’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과연 이 인지자본주의가 다중의 특이성을 어떻게 원동력으로 삼아서 착취하는가, 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밝혀왔다시피 인지자본주의는 기존의 상업이나 산업자본주의와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여러 시공간의 재구성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한 예시를 통해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글루스라는 블로그 서비스가 있습니다. 원래 이글루스는 성인 인증을 거쳐서 등록 가능하던 그런 서비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초창기 시절에는 상당히 뛰어난 자료를 올리던 블로거들도 많이 존재하였습니다. 사진이면 사진, 문학이면 문학, 애니메이션이면 애니메이션 등등.. 각자의 특이성들은 밸리라 규정된 테마에서 서로 존중받으며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인만 이용 가능했다는 점이 어쩌면 한 몫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커뮤니티, 라는 비난도 동시에 받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특이성이 대기업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 대기업의 이름은 SK 커뮤니케이션즈. 이 대기업은 어느 순간 그 이글루스를 덥석 집어삼키게 됩니다. 저 블로그 서비스 내의 특이성들을 흡수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저 특이성을 흡수하여서 잘 포장 후 외부에 노출시킨다, 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최근에 네이트(SK 커뮤티케이션즈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의 메인에 이글루스의 글들이 종종 링크되는 현상으로 증명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자본주의(SK 커뮤니케이션즈)가 다중(이글루스의 기존 회원들)의 특이성을 흡수하는 사례입니다. 당연히 이런 반론도 있을 법 합니다. 사실 대기업에 의해서 저 회원들이 외부와 더 활발히 소통을 하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저때의 저 이글루스의 회원들을 다중이라고 규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 라고 말이지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저때의 회원들을 다중이라고 확실히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그들만의 커뮤니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인수를 함으로써 소통을 더 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애초에 이들은 그런 목적으로 인수를 한 것도 아니며 현재는 각종 규제와 약관 변경을 통하여 회원들을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데 외부와 제대로 소통을 한다는 말이 과연 얼마만큼 진정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그들이 외부에 소통을 하는 것처럼 특이성들을 묶어서 일방적으로 포장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특이성들이 소비되고는(메인 화면의 글 노출이나 주간지에 글을 싣는 등으로) 자본의 품으로 안기며(SK 커뮤니케이션즈의 이미지를 좋게 만든다거나 등의 반향을 통해서) 자본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5.
저자가 밝히는 다중의 힘은 경계를 넘고 가로지르는데 있습니다. 하나의 단일 목적으로 통일되었다면 그 집단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집단의 개개인 모두가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 특이성들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아무리 네그리의 제국이 억압하더라도, 아무리 인지자본주의하에서 삶이 수탈당하더라도 그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정말 새로운 삶을 향하여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겠지요. 이를 네그리는 그의 저서 ‘다중’에서 ‘삶정치적 힘’ 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쓴 이 ‘인지자본주의’ 는 수많은 경계를 뛰어넘으며 그 사유를 전개해나갑니다. 베르그송, 스피노자, 네그리, 바렐라, 마르크스 등등.. 이 책이야말로 정말 그가 말하는 ‘다중의 삶정치’ 를 일깨우는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 영역들 중 가장 근본적으로 저자의 사유를 구성하는 부분은 역시나 안토니오 네그리의 사유들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용어들은 삶정치나 삶권력 등 삶- 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중을 설명하기 위해서 쓰이는 말로 네그리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단어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미셸 푸코가 먼저 사용하기는 했지만 체계화시키고 이론화시킨 것은 네그리겠지요. 삶권력은 인지적인 사회적 삶 자체에 대한 제국의 직접적 통제력을 뜻하고 삶정치는 앞서도 밝혔다시피 삶권력에 대항하여서 다중들의 삶에 대한 욕망을 조직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자 조정환은 이를 그대로 인지자본주의에 반영하였고 그의 사유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가 아무런 비판 없이 그의 개념을 토대로 삼았기 때문에 만약에 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론의 명백한 증거를 내밀면 그가 세운 탑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그가 너무 삶정치, 삶권력 등의 개념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가, 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중의 행동 양식 중 어떤 것은 저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또한 저런 개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저런 말들이 전부는 아니리라고 봅니다. 이 책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모든 것을 삶정치나 삶권력과 연관지어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다중의 힘을 강조하다시피 서술해놓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서 세계가 다중의 혁명의 불길로 휩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지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면서 든 예시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입니다. 글에서 몇 번이고 서술하는 바로는 이때 인지자본주의의 위기의 정점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위기의 정점을 이미 예전에 찍었으니 지금은 위기일까요, 아니면 위기가 아닐까요? 혹은 위기는 위기이지만 2008년에 비해서는 완화된 위기일까요? 저자도 이런 반론을 염두에 뒀는지 이를 진자에 비교하면서 마치 진자가 왔다 갔다 하듯이 자본주의가 더 심화되는지, 아니면 완화되는지는 다중의 힘에 달렸다고 책에 서술합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을 자본주의의 병폐에서 붙잡아두는 것은 이 다중의 삶정치적 활동에 달렸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면서 하나의 예를 더 듭니다. 바로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아랍권 혁명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가장 삶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저자는 기대합니다. 저 혁명이 점차 범위를 넓혀서 유럽으로 뻗어나가고 그 다음은 아시아로 뻗어나가며 이윽고 전세계를 장악할 거라고. 그러나 지금 그 혁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리비아에서 발이 묶인 채 몇 달이고 교착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리비아 교민들은 급히 귀국을 했었지요. 현지인과 결혼을 했던 한 분은 이집트에 머물며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살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책에서는 인터넷이 끊겨도 말을 텍스트로 옮기는 기계를 통해서 고립된 나라의 현재 상황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은 허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전화기란 인터넷에다 접속하여서 혁명의 기폭제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밤낮을 꼬박세우거나 혹은 겨우 두 시간을 자면서 어쩌다가 연결되는 부인이나 남편의 연락을 기다리게 하는 역할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체된 리비아의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느새 혁명에 대한 관심이나 다중의 힘에 대한 생각은 이미 잊어버렸고 저자가 말한 대로 마치 강제로 점거되어 혁명의 장소로 이용된 컨베이어 벨트들은 다시금 본연의 역할로 특이성들을 소비시키고 있습니다. 왜 리비아에서는 다중의 삶정치적인 힘이 꺾이게 되었을까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다시금 다중들이 가십거리를 찾아 헤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전쟁,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폭력 때문입니다. 카다피는 맹렬히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병들은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고 혁명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저런 폭력은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만듭니다. 지금도 리비아에서는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력앞에서 삶정치와 같은 개념은 그저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흐지부지하게 결말을 짓지 못하고 오래 끌게 되며, 어느 순간 관심에서 벗어나버리게 되고 이윽고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은 요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국의 힘, 자본주의의 힘을 극복하려면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삶정치적인 힘만으로 우리는 다중의 행동양식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삶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다중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각각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개인이 여기서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다른 개인은 그래도 어디선가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다중은 게릴라전에는 능하지만 그 삶정치적 힘을 모두 한 곳에 모으는 것이란 힘들 것이라 짐작됩니다. 인지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삶정치적인 힘을 집적시켜야만 하는데 그 힘을 모아서 쓸 수가 없는 형세가 되어 버린 겁니다. 다시 리비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직 속단하기는 이릅니다만 현재의 리비아의 형세를 다중이 돌파해나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먼저 정말 모든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이 일어나 그 삶정치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어렵다는 전망을 도출해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기존의 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정말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UN, 혹은 그 제국의 주축을 이루는 나라의 군사력으로 힘을 제압하는 방법을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왜 저런 극단적인 예를 들게 되었냐면 민주주의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기존 제국들이 경제적 제제나 성명 발표와 같은 방법으로 이미 나서고 있기는 합니다만 리비아가 국제 정세에 나서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경제적 제제 수단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방법은 폭력을 제압하기 위한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쓴다는 문제 이외에도 제국을 전복하기 위한 다중이 제국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어폐가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빌린 이후에 과연 다중이 다중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정치외의 다른 개념을 다중을 설명하고 그 힘을 사용하는데 도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앞서의 두 가지 방법 이외의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는 삶정치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제국에 친화적이지 않은 그런 개념이겠지요. 그런 개념을 발견 못한다면 다시금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제국에 대해서 어차피 벗어날 수 없어, 와 같은 냉소주의적 태도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물론 제 예상이 틀려서 다중이 그들의 힘으로 무사히 혁명을 완수해낸다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6.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공저한 그의 저서 ‘앎의 나무’ 의 마지막 장에 대략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언어 안에서 존재하며, 그 언어는 항상 나와 다른 너를 향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언어가 너를 향하고 있는데 당연히 ‘나’ 또한 ‘너’ 를 향하고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행동은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며 모두다 윤리적입니다. 이는 나와 너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그리가 그의 제자 하트와 공저한 저서 ‘다중’ 에서도 그 결론은 ‘사랑’ 으로 귀결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저 두 책의 영향을 받은 ‘인지자본주의’ 의 결론도 어디로 수렴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 ‘인지자본주의’ 는 경제학적인 담론에서 정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그가 경제학적인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굳이 인지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저 신자유주의라던가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사유를 펼쳐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 형태의 변화를 중심에 놓다보니깐 현대 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두 측면을 가집니다. 이성으로서의 인지와 정동으로서의 인지입니다. 비록 낡고 고리타분한 개념 같지만 다시금 정동으로서의 인지, 즉 사랑의 개념을 끌어들여옴으로써 (물론 다중의 물리적 조직화도 같이 일어나야겠지만) 저자는 이 힘든 세상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지금껏 이성으로서의 인지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우리를 착취해왔고 정동으로서의 인지가 우리에게 지금껏 우울과 공황상태를 주입해왔다면 우리는 그 칼날을 반대로 돌려서 대항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억압이라는 뜻이며 곧 거대한 잠재력으로서의 작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사회가 아무리 너를 괴롭힐지라도 결국에는 극복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찬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솝 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로두스 섬에서 멀리 뛰기를 잘했다면서 큰 소리를 치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한 섬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섬이 로두스였던 겁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꽉 붙잡고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그런데 이 말은 이런 거짓말쟁이를 혼내 줄때만 쓰는 말은 아닙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라, 머뭇거리지 말라, 와 같은 문맥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각각 넓어진 인지능력을 통하여 상대방과 구조접속을 할 수 있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특이성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한 우리도 다중입니다. 이 다중은 인지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너무나 힘이 강력해, 어쩔 수 없어 등으로 일관해나갑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도록 합시다. 여기가 로두스니깐, 여기서 뛰어라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필드가 모두 인지적 능력의 로두스이기에 말이지요.
(*)서평자 주 : 제국은 초법적 권위를 가진 기구와 다국적 기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일전의 제국주의가 그들 나라의 외부를 착취해가며 그들의 영토를 늘려갔다면 이 제국은 그 구성원인 다중을 끊임없이 외부화시키며 착취합니다.
p. s. 아.. 무슨 글을 써도 만족스럽지 못하네요... 제가 담으려했던 내용의 반에 반도 못담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