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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
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평점 :
불온한 신화 읽기.
[가연] 오늘 이렇게 나와 주신 크리슈나님과 아르주나씨, 반갑습니다. 무신론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만나자고 하였으니 어려운 발걸음이셨을 텐데 개의치 않고 이렇게 대담장소에 나와 주시니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하겠습니다, 하하.
[아르주나] 그런데 저는 왜 ‘씨’ 입니까?
[가연] 하하, 크리슈나님은 아무래도 신이시니깐.. 아르주나씨도 아르주나님으로 부르는게 좋을까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주나] (크리슈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아니 뭐.. 제가 감히 신과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지요.
[크리슈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나저나 이렇게 부른 이유가 뭔가요? 만약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불러본 거라면 신을 만만히 여긴 죄를 물어야겠지만..
[가연] (당황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바로 말씀드리면, 최근에 어느 책을 읽었는데, 그게, 음.. 그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딱히, 음.. 나눌 사람이 없어서...
[아르주나] 그 책이라 함은 혹시 ‘마하바라타’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뜻하는 것인가요? 저도 그 글들을 봤는데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정말 기억력이 대단한 것 같던데. 어떻게 그 많은 대사들을 다 기억하고 썼는지..
[가연] 아하하.. 음, 그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중심되는 부분이라고 일컫어지는 부분을 해설한 책인데 말입니다,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느껴져서 말이지요. 그러니깐 크리슈나님께서 아르주나씨를 설득하는 장면말입니다.
[크리슈나] 아, 그거.. 그거 정말 힘들었었다네.
[아르주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을.. 그렇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크리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르주나를 설득시키느라 정말 다른 신들도 보기 힘든 무장을 다 갖추고 패션쇼를 한 게 아닌가. 정말 내가 왜 그랬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네.
[가연] 패션쇼.. 크리슈나님께서는 현대 용어에도 익숙하시네요.
[크리슈나] (머쓱한 표정으로) 일단은 나도 신이니깐 말이지. 화신이라고 해도 말야, 최고신 비슈누의 화신이잖나. 내가 8번째였나? 여하튼 여러 차원에 걸쳐서 존재하는 나를 그대의 좁은 식견으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되지.
[가연]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본다면 말이죠, 그.. 역사가들이 그러는데 최고신 비슈누신의 7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님과 생존기간이 겹친다고 하던데 말이죠.. 그럼 비슈누님은 7번째 화신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8번째 화신을 또 나투신 건가요?
[크리슈나] 틀렸네, 이 사람아. 6번째 화신이 아마도 파라슈라마라는 친구였을거야. 그 친구랑 라마찬드라랑 생존기간이 겹치지. 파라슈라마 그 친구가 성격도 참 대단하고 사는 것도 참 오래 살았지, 아마. 그리고 좀 더 부연하자면 말이지, 화신이 꼭 한 시대에 하나, 라는 말도 어이없는 거지. 누가 그렇게 정했나? 그대가 비슈누인가? 비슈누의 뜻을 그 누가 짐작하겠는가? 화신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존재야. 그것과 궤를 달리할 화신은 앞으로 다가올 화신인 칼키외에는 없으니. 그러니 말이네, 나는 신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며 그리고 화살에 맞아 죽은 생명이라네. 그 점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기를 바라네.
[가연] 아,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사실 ‘불온한 신화 읽기’ 라는 책을 읽었는데 말입니다. 그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바로 크리슈나님과 아르주나씨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부분만 떼서 바가바드 기타, 라고 부른다던데 말입니다. (아르주나를 쳐다보면서)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아무래도 본인들 이야기라서 흥미가 갈 듯도 한데..
[아르주나] 마하바라타를 읽을 때 그 부분도 같이 읽기는 했는데 뭐, 기억력이 참 대단하군, 누가 적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기는 했지만..
[가연] 했지만..?
[아르주나]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정말 이런 말들을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왜 그 대화가 인기를 끄는가, 그 부분도 잘 모르겠네요. 인간이 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이상한건가요?
[가연] 아니, 인간이 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너무나 당연하니깐.. 그 지혜를 좀 나눠주십사, 하고 인간들이 달라붙는 거지요. 그 때 당시를 지금 회상해달라고 부탁드리면 어려운 부탁이겠습니까?
[아르주나]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요. (신파조로) 당시 저는 참 힘든 상황에 빠져있었습니다. 대충 상황은 아시죠? 큰 형이 도박에 져서 패가망신하고 집날려먹고 나라날려먹고.. 여하튼 떠돌다가 13년이 지난 후 돌아와서 100명의 사촌들, 그러니깐 카우라바 형제들이랑 싸우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여튼 도박은 나쁜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제 카우라바 형제들이랑 싸울 상황이 되니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여기서 싸운다면 사촌들과 싸우는 거구, 싸우지 않겠다고 하면 이제 내 목숨을 가져다 바치는 꼴이니, 어떻게 해야 되는가..
[크리슈나] (말을 끊으며) 그래서 아르주나가 이제 궁상을 떠는 거지. 여기서 싸워서 사촌의 목을 베고 적을 싸그리 죽이면 이제 남자들이 별로 없으니 여자들 밖에 안 남을테니 그러면 결혼하려면 남자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아래 계층 남자들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자연스럽게 베다의 가르침은 깨지고 카스트는 무너지고. 그야말로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무너지는 일을 겪게 될 거 아닌가. 그걸로 끙끙 앓고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해줬지.
[가연] 뭐라고 하셨나요?
[크리슈나] 내버려두라고.
[가연] 네?
[크리슈나] 너무 어렵게 말했나? 그냥 내버려두라고, 그런 문제는.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도 물론 중요하지. 중요해. 그러나 그런 것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대에게는 그대가 가진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자명한 거지. 지금 여기서 네가 하여야 하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해라.
[가연] (불쑥 끼어들며) 세 가지 요가, 지혜의 요가와 사랑의 요가, 행위의 요가 중 행위의 요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크리슈나] (불쾌한 기색 없이) 그렇지. 네가 본 책 ‘불온한 신화 읽기’ 에는 이렇게 나와 있을걸, 아마?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네. 사실 무의미한 살인을 하지 말라, 라는 가르침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말이야. 그런데 저기 저 뚱하게 있는 아르주나는 전사계급이잖는가. 전사계급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적과 맞서 싸워 그들의 수급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사촌이 아니라 그냥 적이었다면 그대로 가서 활로 다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저기 등에 멘 간디바 들고 말이지. 이렇게 보편적인 가르침과 계급의 의무가 상충될 때 그대가 먼저 취해야 할 것은 계급의 의무이니, 나에 대한, 그러니깐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스스로 행해야 할 바를 다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의무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지. 그대는 다르마dharma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가연] 네.. 조금...
[크리슈나] 그래, 바로 그 다르마야.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다르마가 있는 법이지.
[가연] 그러나 아르주나씨가 꼭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요? 당돌한 제 말투를 용서해주세요, 허나 저는 개인적으로 판다바 형제들이 카우라바 형제들에 비해서 정말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아르주나씨의 큰 형인 유디슈티라가 주사위 도박을 별로 안했으면 나라를 안 빼앗겼을거잖아요. (아르주나가 살짝 쏘아보지만 이내 시선을 거둔다) 카우라바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맏형인 두리오다나에게 별 별 나쁜 점들을 다 뒤집어 씌어놓았지만 정말 나쁘다, 라고 여겨질 만한 것은 주사위 도박에서 고귀한 왕비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는 것 정도 외에는 특별히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두리오다나 입장에서도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이 다 들어왔는데 그냥 놓아줘야 된다니.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권력욕이란 독버섯같은 거 아니겠는가, 생각해봅니다만. 무엇보다도 마하바라타 전체에서 상당히 이상한 점은 카르나의 존재이지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그 후 별의 별 저주를 다 받으면서도 저기 저 아르주나와 대등하게 싸웠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지만, 카르나가 고결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 인물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요?
[크리슈나]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르주나에게 물어보지. 아르주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아르주나] 크리슈나여,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는 당신의 결정을 따를 것입니다. 그대를 경배하고 그대를 숭배할 것이니 그대에게 완전히 흡수됨으로서 궁극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크리슈나] 옳다, 아르주나여. 전쟁과 평화는 모두 나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이나 그 행위에 집중할지어다. 그리고 해야 할 의무에 충실할 것이다.
[가연] 어..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 말씀드리는데 여하튼 크리슈나님을 믿는 쪽이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이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제가 잘 이해를 못한 건가요? 하긴 두리오다나는 끝까지 크리슈나님을 보통 인간으로 여겼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감히 말하건데 독선이 아닐까요?
[크리슈나] 그렇지 않다. 나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네. 다시 말하자면 일종의 회색이지. 좀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지? 회색이라는 색깔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서, 다시 말하자면 선과 악이 섞여서 탄생한 색깔이야. 물론 여기 있는 이 아르주나와 같은 판다바 형제들이 선으로 보이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악으로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선 속에서도 악이 있고 악 속에서도 선이 있다네. 또한 악 처럼 보이는데도 선인 경우가 있다네. 마찬가지로 선 처럼 보이는데도 악인 경우도 있고 말이네. 모두 주어진 본성이라는 것이 있어, 그 본성에 충실하라는 이야기네. 두리오다나의 예를 들었는가? 두리오다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리석었으나 올곧기까지 한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윽고 신들에게 꽃을 선사받지 않았는가. 두리오다나가 죽을 때 어찌했던가? 그의 용맹을 당해내지 못했던 판다바 형제는 크샤트리아의 법도를 어기고 하체를 공격하지 않았나? 이는 선 속에 악이 있는 예이지. 그리고 선 속에서 악 처럼 보이는 경우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이 나, 크리슈나가 이런 저런 잔머리를 부린 것도 해당되겠지. 그러나 그것이 악인가? 그렇지 않다네. 누구에게나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라네.
[가연] ... 어리석은 인간입니다만, 하나 꼭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아르주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거기서 성당을 지으라고 왕이 예멜리안에게 시킵니다. 예멜리안의 예쁜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도저히 왕이 정한 기한 내에는 성당을 완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진 예멜리안에게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만 생각하라’ 고 말입니다. 예멜리안은 아내의 말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결국에는 성당을 다 쌓고 말지요. 크리슈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이 단편에서 나오는 아내가 이야기하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크리슈나] 진리는 어떠한 모습으로든 반복될 수 있는 법이지. 그리고 그 진리의 과실을 베어 물 수 있는 사람이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가연]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일종의 임시방편이 아닐까요? 제가 읽은 책 ‘불온한 신화 읽기에서는 이층의 사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덜 고결한 목표인 ‘일층’에 해당되는 것은 고결한 ‘이층’에 의하여 억제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기를 마치 이층의 링거를 버텨나가는 일층의 삶, 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모두에게 예멜리안의 아내와 같은 안사람이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신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스스로 설파하셨다시피 크리슈나님은 이미 전쟁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 알고 있으며, ‘그대가 승리할 것이다’ 라고 아르주나씨에게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은 설령 나쁜 결과가 예상될지라도 그저 그 길을 걸어나가야만, 행위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르주나] 그 말은 그릅니다. 방금 예시로 든 단편에서는,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예멜리안이라는 사람이 이윽고 성공한 까닭은 아내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자식이 부모를 대하듯, 애인이 애인을 대하듯 크리슈나님을 믿고 오롯히 따릅니다.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그저 구조만 빌린 채 크리슈나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그대는 비슈누신을 믿습니까? 아니겠지요. 그대가 믿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믿는 존재가 있기는 있습니까? 그대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두 발로 대지를 딛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대 나름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행위의 요가의 중요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의 인식 저편에서는 위대한 신들이 있고 위대한 베다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대를 옳아매는 운명이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운명을 그대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대의 진실된 자아는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육체에게 주어진 길은 그저 그대의 육체가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일 뿐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행위를 하면서 체념을 하는 것입니다.
[가연] 중세의 칼뱅이나 할 법한 소리군요. 아르주나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페르시아 신화가 문득 떠오릅니다. 위대한 영웅 루스탐은 칠난도를 거쳐 영광을 쟁취했지만 이윽고 자신의 아들 소라브와 맞서 싸우고 끝내 칼로 소라브의 심장을 찌릅니다. 하지만 신들의 무심함이었는지, 혹은 축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죽는 그 순간 소라브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루스탐에게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루스탐은 비탄에 젖어서 소라브를 살리기 위해서 페르시아 곳곳을 떠돌아다녔지요. 그들 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모든 존재들, 그 용력과 지력이 하늘을 뒤덮던 영웅들과 신의 사자나 다름없던 신수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 위대한 섭리 앞에서 그저 발버둥 치는 것에 다름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과 크리슈나님이 나눈 대화는 신에게 순응하는 사람을 찍어내는 틀에 지나지 않지요. 게다가 크리슈나님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들립니다. 방금 말씀하셨던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에서 크리슈나님은 본인이 계략을 쓴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악이 아니니, 그 까닭은 모두가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의 화신이신 크리슈나님조차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의무는 일종의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행위를 하면서 체념한다’ 는 것이 저에게는 그렇게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인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스트라는 틀에 묶여서 발전을 저해당하고 있지요. 죽을 때까지 그 카스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후에도 속박되는 그 끔찍한 것에서 말입니다. 공덕을 다 하면 상위 카스트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정말 그런지 현실의 삶이 중요한 저 같은 세속적 인간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럼에도 크리슈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뿐이지 않습니까. 나를 믿어라. 그리고 적을 섬멸해라. 그대가 죽이는 것은 육체요, 불멸의 영혼은 해를 입지 아니하니. 이런 식의 구원은 저기 저 서양의 유일신 종교에서도 보이는 모습이지요.
[크리슈나] (다시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마 더 이야기를 해도 팽팽히 대립각만 세울 것 같구먼. 헛수고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대화에 참여한 김에 그대의 이해를 위해서 몇 가지 개념을 설명하도록 하지. 사람에게는 영원한 자아, 즉 푸루샤Purusa가 있고 또한 물질인 프라크르티Prakrti가 있다네. 그런데 여기서 프라크르티는 특이한 것이야. 푸루샤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일체가 그 안에 내재되 있음이니. 이는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 일컫어지네. 이 말은 그로부터 모든 것이 발전되어 나오는 것을 말하며, 이윽고 결과가 원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이지. 모든 질료적인 것의 원인이라고 들 수 있겠지. 방금 전 아르주나가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진실된 자아와 육체를 구별하면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행위를 하면서 체념한다’ 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네. 그대의 모든 물질적 행위는 그대의 물질적 자아가 하는 일이고, 그대의 진실된 자아는 행위에 개입하지 않으며 관조자로 남아야 된다는 이야기라네. 그렇다면 이런 물질적 자아와 진실된 자아는 어떻게 구별가능한가? 앞서 말한 저 두 가지 개념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지. 이것이 앞서 그대가 말했던 세 가지 요가 중 지혜의 요가이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사랑의 요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아까부터 계속 말해왔지만 그대가 귀를 막아버린 다른 한 방법으로 가능하네. 신을 믿고 경배하는 것, 그대의 모든 행위가 신에게 바치는 헌신이 되는 것이며, 이로서 그대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불멸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는 까닭은 다르마를 따라 사는 이의 진실된 자아가 신에게 헌신하는 까닭이요, 행위를 관조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대가 카스트 제도의 실상을 말했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체념적 행위를 통하여 위로는 브라만부터 아래로는 수드라까지 모두가 나에게 이르는 길이 열린 것이라네.
[가연] (멍하니 크리슈나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며) 아무래도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생각보다 말씀들이 너무 어려워져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 인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요즘 인도를 보면 꼭 영적인 편의점 같습니다. 제가 사는 나라의 어느 학자가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야기한 내용인데요, 우리가 보통 인도를 생각하면 신비로움과 이국적인 느낌을 먼저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국적인 느낌은 여러 창작물들을 통해서, 혹은 입소문을 통해서 재생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인물들이 인도에 고생고생하며 찾아가서 구루들의 아쉬람에다가 돈을 바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말이지요.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책 ‘불온한 신화 읽기’ 에서도 마찬가지 지적을 합니다. 그들의 삶의 품격이 오를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이득을 뒤에서 챙기는 모습은 본래의 목적과는 상당히 멀어 보입니다만. 마하바라타와 같은 경전도 이렇게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을 수 있을 터인데, 사실 이럴 때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잘못이다, 라는 것이겠지만 혹시 이 외에 고견들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크리슈나] 사실 바가바드 기타가 쓰여 진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현대와 안 맞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지. 게다가 신성시되다보니깐 그 내용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이상하게 여기며 바라보게 되니 안 맞는 부분을 그대로 고집하게 될 테고 말이니.
[아르주나] 아까 말했지요, 정말 제가 이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이죠. 사실 이 마하바라타가 일종의 짜깁기일지도 모르지요. 그동안 전해 내려오던 저나 크리슈나님과 같은 분들의 자료를 모아서 말입니다. 당연히 일관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겠고.
[가연] 고견 감사합니다. 대화 도중 무례하게 말씀드린 게 있다면 용서해주시길, 하하. 많이 부족한 저를 인내를 가지고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 s. 톨스토이 단편선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 '페르시아 신화',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이옥순), '지구별 여행자(류시화)', '인도철학사(길희성) : 특히 크리슈나가 말하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