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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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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1955년의 어느 날, 당신이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 섬에 있었다면 정말 진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양이들이 낙하산을 메고 마치 공수작전에 임하듯이 엄숙하게 하늘에서 뛰어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지금이라면 정말 저런 일이 상상도 안 되고, 누구나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저었겠지만, 저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보르네오 섬의 지나치게 늘어난 쥐를 없애기 위해서 그 천적인 고양이를 영국 공군의 도움을 받아서 공수해온 것이지요. 이를 우리는 ‘보르네오 섬 고양이 공수 작전’ 이라고 후에 일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공수작전이 시행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원인은 말라리아에 있습니다. 보르네오 섬은 아열대 기후로 기온이 높고, 습지가 많아서 모기가 들끓었는데, 아시다시피 말라리아는 모기를 숙주로 하는 전염병입니다. 모기가 많으니 자연스레 말라리아의 유병률도 늘어날 수밖에요. 세계보건기구에서는 말라리아를 퇴치하기 위해서 그 숙주인 모기를 없애기로 마음을 먹고 마을에 DDT를 대량 살포합니다.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살포는 마을을 말라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만들었습니다만, 그 대신 흑사병이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너무 놀란 세계보건기구는 바로 조사에 착수하는데, 흑사병이 찾아온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DDT에 바퀴벌레가 오염이 되고, 바퀴벌레를 도마뱀이 먹고 오염되어버리고, 오염된 도마뱀은 별로 행동이 민첩하지 않았기에 고양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고양이들은 마찬가지로 DDT에 오염되어버리고, 결국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마을에 고양이들이 씨가 마르자, 고양이들의 또 다른 먹잇감이었던, 그리고 상대적으로 DDT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쥐들이 날뛰게 되고, 쥐를 숙주로 하던 흑사병이 마을을 마치 사신처럼 그의 소매로 휘감았던 것이지요. 이 늘어난 쥐들을 없애기 위해서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저 작전, ‘보르네오 섬 고양이 공수 작전’ 이 펼쳐졌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마을을 닥친 재앙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양이들은 무난히 쥐들을 포식했지만, 그렇게 쥐들을 모조리 먹어치운 후에는 다시 도마뱀에게 그 이빨을 들이대었고, 도마뱀들마저 고양이의 배를 채우는데 희생이 되자, 이번에는 그 도마뱀들의 먹잇감이었던 나방의 애벌레가 집들의 나무를 갉아먹으면서, 지붕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악의 연쇄반응은 바로 한 화학물질, DDT의 남용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요.

 

 

  환경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일컫어지는 ‘침묵의 봄’은 바로 저런 DDT와 같은 화학물질들에게 그 포격을 정조준 합니다. 유기인산화계열의 살충제든 염화탄화수소계열의 살충제든 어느 화학물질이든지 나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화학물질의 나쁨은 여러 연구를 통하여 뒷받침되고 저자인 레이첼 카슨이 듣고 수집한 경험들로부터 증명됩니다. 정말 미량의 DDT를 페인트에 섞어서 피부에 노출시켰는데 각종 문제점이 일어났습니다. 뼈마디가 아프고 정신상태가 혼미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살충제를 살포하는 화학적 방제법이 아닌 다른 방식의 방제법을 이용한다면, 예를 들어서 천적을 이용한다거나, 곤충을 불임시키는 화학 처리를 한다거나, 특정 초음파를 이용한다거나 등의 방식으로, 우리가 위험에 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DDT를 비롯한 화학적 살충제의 해악은 최근 연구들에서도 더욱 더 많이 밝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방세포에 잔류하여 차곡차곡 축적이 되던 화학물질들은 그 지방세포가 연소될 때, 마치 댐이 무너지듯이 우리의 혈류로 뿜어져 나옵니다.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이런 화학물질들은 생체를 교란시키고 이상 반응을 일으키게 하며 이윽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합니다. DDT가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초등학생들도 학교에서 배워갑니다. 생체축적물질이라는 사실까지 덤으로 말이지요.

레이첼 카슨이 이 책을 쓰고 난 뒤, 미국 전역에서는 DDT의 해로움에 대해서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DDT 등의 살충제를 쓰지 않도록 하는 운동이 점화되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누구나 생각해보면 자명해보이지만, 이 책이 설파하기 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잠깐 다른 방향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고자 합니다. 과학자에 가까운 저로서는 여기서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화학물질이 상당히 나쁜 것들이라는 것을 몇 번이고 밑줄 치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그녀가 가져온 모든 예시는 화학물질은 사악하고, 죽음의 비술에 쓰이는 물질이며, 고대의 악마를 불러낼만한 것이다, 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적절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은 72악마를 부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악마들을 사역하여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고 그랬었다지요. 마찬가지로, 이런 화학물질들도 꼭 사악한 물질들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DDT를 가지고 단적인 예를 들자면, 물론 DDT를 농업에서 퇴출시킨 것은 옳은 결정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제 작업들, 앞서 보르네오 섬의 이야기에서도 나왔듯 말라리아를 방제하는 것에서까지 쫓아낸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DDT가 쫓겨난 뒤, 두 배 이상 비싼 살충제가 DDT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환경적으로 그나마 친화적인 살충제이겠지요. 그런데 이 살충제는 동일한 비용으로 이전의 DDT가 커버했던 지역의 반밖에는 커버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을 생각해봅시다. 과연 그 곳에 있는 나라들이 두 배 이상 비싼 저 약들로 말라리아 방제를 쉽게 해나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DDT는 분명, 초기에 발견되었던 것처럼 기적의 약도 아니고, 이후 연구를 통하여 수많은 해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등의 질병을 통하여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이 살충제를 쓰면 앞으로 암이 걸릴 수 있으니 당신들에게 사용할 수 없겠습니다.’ 라고. 과연 그 사람들은 앞으로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는 암을 위해서 지금 당장의 말라리아를 그냥 참고 견딜까요?

물론 DDT 등의 화학물질의 효과가 단순히 시간이 흐른 후에 나타나는 것도 아닐 것이고, 그 중에는 즉각적으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 효과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DDT와 같은 해악이 알려진 화학물질들을 다시 사용하자, 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사악한’ 물질들을 안 쓰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악한’ 힘이라도 빌려야 살아나갈 수 있는 곳들에게서까지 엄격하게 종교재판 하듯이 잣대를 들이대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너무 신성하게 여기며 환경운동에 단편적으로 책 내용을 가져가는 자세는 위험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애초에 그런 태도는 저자 자신도 이 책에서 지양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충분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부분이 이 책 ‘침묵의 봄’ 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얼마나 ‘사악한’ 물질을 남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앞서 저는 첫 문단을 ‘이 모든 것은 DDT의 남용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라고 마무리 지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남용’ 입니다. 어쩌면 세계보건기구는 DDT를 가지고 성공적인 말라리아 방제 작업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적절한 곳에 적절한 양을 가지고 이용했다면 말이지요.

 

 

  MSG라는 화학 물질이 있습니다. 이 화학물질은 우리가 상품명 ‘미원’ 이라고 일컫는 물질인데, 요리에 집어넣으면 그 맛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다섯 가지 맛이 혀에서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그 맛은 정말 만들어내기 어렵지요. 그런데 이 MSG는 요즘 우리 식품계에서 퇴출당한 상태입니다. MSG를 많이 먹으면 소위 말하는 ‘중국 음식 증후군’, 그러니깐 마구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울렁거리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며, 시력도 나빠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2010년에 우리나라 식약청에서 MSG를 평생 먹어도 크게 문제가 없다, 라는 내용을 발표하였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이야기입니다. 저 MSG는 토마토에도 들어있고, 다시마에도 들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토를 많이 쓰는 이탈리아 음식이 감칠맛이 있고, 다시마를 우려낸 국물로 육수를 쓰는 국수가 맛있는 것입니다. 천연의 MSG와 합성된 MSG가 과연 분자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동일한 탄소수에 동일한 결합구조일텐데 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적절한 양입니다. 그저 토마토에 들어있는 정도의 MSG를 요리에 쓴다면, 다시마로 우려낼 정도의 MSG를 쓴다면 크게 문제가 없고 동시에 맛있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다만 저렴한 가격으로 맛을 내려고 하다 보니 음식점에서 MSG를 많이 쓰게 되고, 이윽고 이런 저런 증후군들이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욕심에서 기인합니다. 이제 다시 DDT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DDT도 MSG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영웅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 영웅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인간이라는 말이 있던가요, 마찬가지로 사실 이런 화학물질은 ‘그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에 사악함을 부여하고, 선함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 있었던’ 물질을 찾아서 쓰는 것도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이 선한 용도에 맞게 소량을 쓰고 욕심을 버리며 깊은 연구를 한다면 이 책에서 순수한 악처럼 보이는 DDT도 선한 물질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충분한 연구도 없이, 아니, 하다못해 충분한 고려도 없이 비용 절감 등과 같은 문제들을 위해서 적절하지 않은 양을 적절하지 않은 곳에 쓰게 만드는 인간의 욕심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의 욕심을 잘 줄일 수 있느냐에 우리 인간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것이 이 책 ‘침묵의 봄’ 이 진실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p. s. 책 자체는 좋은 책이지만... 너무 제가 반항정신이 투철한 것이려나요..ㅎㅎ

       하지만 화학물질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라는 글들은 분명 많이 올라올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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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3-10-22 01:0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태우스라고 합니다. 님의 리뷰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렇게 좋은 리뷰를 읽을 수 있다니, 오늘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연 2013-10-22 12:57   좋아요 0 | URL
헉.. 알라딘의 그 마태우스님이신가요? 이런 초 마이너블로그에 찾아와주셔서 순간 사칭이 아닌가, 잠깐 생각했습니다만.. 하하하하하... 그럴 리 없겠죠? 좋은 리뷰라고 칭찬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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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왜 분노하지 않는가.

 

 

 

 

 

1.

 

 

  2012년의 초입에 서서 2011년을 되돌아보면, 2011년 한 해는 무언가 ‘분노’로 가득 찬 한 해 같습니다. 나는 꼼수다, 라는 방송이 촉발한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가장 많았었던 것 같고, 특히 2011년 마지막에는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오던 김근태 전 의원이 사망하기도 했었는데, 그 사망의 원인에는 이근안씨가 한 고문의 후유증이 크게 차지하고 있으리라는 기사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던 한 해였었지요. 그런데 분노라는 감정은 사실 바람직하다고는 보기 어렵겠습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동시에 복수심도 느끼게 되고, 치욕도 느끼게 되는데,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치욕은 자신이 타인에게 비난받는다고 상상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고, 복수심은 타인의 슬픔을 통해서만 자신이 스스로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슬픔이라고 합니다. 모두 슬픔과 관련되어 있는 감정들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좀 힘들겠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분노도 '슬픔' 이라는 감정으로 해석해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언제 분노할까요? 네, 우리는 우리 뜻대로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좌절과 함께 분노를 느낍니다. 퀴블러 로스가 제시하는 사망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보면, 어떤 사람이 심각한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을 때, 먼저 난 걸리지 않았어, 라고 부정합니다.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이 바로 분노입니다. '왜 내가 이런 것에 걸리지?' 라고 말입니다. 나는 전혀 원하지 않았는데, 내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런 일이 찾아오다니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는 분노를 피상적으로 본 것에 불과합니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우리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을 때 그런 일이 가능하지요. 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에 내가 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동시에 그 '무엇인가' 의 구성원들과 내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다시 말하면, 그 '무엇인가' 에 유리되지 않고 '나' 라는 존재가 있는 경우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발전할 수 있겠습니다. 이 '무엇인가' 는 사회도 될 수 있겠고, 사람도 될 수 있을 것이며, 무엇이든 '나'가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나' 라는 존재가 지향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분노는 그 '무엇인가' 에서 우리가 유리되는 경우, 떨어져나가는 경우에 느끼는 슬픔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이 문장을 조금 더 다듬으면 다음과 같이 진술 할 수 있겠습니다. 배제되어짐으로부터 오는 슬픔이 바로 분노다, 라고 말이지요.

 

 

2.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라는 책은 러시아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책입니다. 혹자는 그 책에서 '어머니의 사랑' 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단순히 아들 하나만을 사랑하는 존재에서부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대모(大母)로의 변모' 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다른 이는 '어머니에서 동지로의' 사회주의 동지 의식의 확산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여기서 언급하면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배제' 에 대한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살짝 훑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인 닐로브나 부인은 망나니였던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과 자신 단 둘 뿐으로 하루하루 생을 영위해나갑니다. 그런데 아들 파벨 블라소프는 다른 젊은이들이나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수염도 얌전히 깎고 책을 읽는 등 모범적은 모습을 보이지요. 그런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던 어머니 닐로브나 부인은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아, 내 아들이 사회주의자구나'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부인은 위험하다며 아들을 말리는 것보다도 아들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들을 위해서 위험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그러다가 점차 사회주의에 대해서, 인민의 권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지요. 그런데 이들 모자(母子)외에도 또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아들의 동료인 우크라이나 인, 안드레이입니다. 안드레이는 닐로브나 부인에게 말합니다. 주위를 보면 으스스하고 더러우며 모두가 지쳐있고, 싸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되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이상으로 인간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나를 인간적으로 대한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그들은 야수처럼 덤벼들어서 살아있는 마음도 인정하지 않고 인간다운 얼굴을 발로 밟아버립니다. 그런 모욕을 참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한 층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기려 들지요. 그래서 안드레이는 이야기합니다.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안드레이의 얼굴은 매우 슬픕니다. 왜일까요? 당연합니다. 앞서 정의한 개념인 배제되어짐으로부터 느끼는 슬픔인 '분노' 때문입니다. 안드레이는 그의 지향점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는 현실과는 갈수록 멀어져만 가고, 현실에서는 그 이상은 결핍되어있으며 그 자신은 다른 계급들에 의해서 강제로 현실로부터 분리되어버린 상태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두가 화합하는 사회를 그리는 그 자신마저도 그 화합하는 사회를 위해서 자신을 가로막는 이들을 격리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제가 격리를 가져오고 격리가 결핍을 가져오는 현장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현실, 그 결핍은 끊임없이 그를 꿈꾸게 만들고, 동시에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게 하여 좌절을 가져오고, 그 좌절을 통해 분노를 키우며, 이윽고 그 분노로 그들의 적에게 복수를 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적의 슬픔으로는 자신의 슬픔을 가실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들, 그러니깐 안드레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원했던 세상은 그들의 적마저도 슬픔이 없는, 모두가 공평한 세상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3.

 

 

  이제 이 책 '왜 분노하지 않는가' 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사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이 실현된 궁극적인 이상사회는 바로 윗 문단에서 이야기했던 저 우크라이나인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당하지 않고 이상이 결핍되지 않은 상태에 놓인 사회겠지요. 책에서 소개하는 인권선언이 바로 그 사회의 초석을 이루는 내용입니다. 책에서는 루스벨트가 말한 4가지 자유를 언급합니다.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경제적 결핍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저자는 환경의 자유를 더하여 5가지 자유를 이야기하고, 그 자유를 이루게 되면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권에 대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언론의 자유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장 우리 사회만 생각해봐도, 언론의 자유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다른 나라들, 폐쇄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훨씬 나은 나라겠지요. 하지만 언제나 이러한 자유는 ‘훨씬 더 나은’ 국가들과 비교를 해서 성취되어야 될 것이지, 절대 ‘지금 보다 못한’ 국가들과 비교를 해서 머무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자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의 자유?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도 박해가 일어나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에 놓여있지만, 국가 내 소수종교들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경제적 결핍의 자유겠지요. 제가 이렇게 글을 컴퓨터에서 두드리는 동안 편의점에서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20대 학생들이 분명 있을 것이며, 또한 제가 힘들게 일을 할 때 큰 의자에 등을 대고 앉아 비서의 보고를 받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요. 물론 이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이지만, 방금 말한 것처럼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 앉아서 비서의 보고를 받으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사실은 실제로 정말 열심히 일을 해서 그 자리에 편하게 앉아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게으른 사람들에게까지 부가 돌아가는 것은 사실 일에 대한 모욕일수도 있을 것이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정말 게으른 사람들은 그리 자주 눈에 띄지는 않으며, 사회의 벽에 부딪혀 쓰러지고 좌절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 열심히 일을 하면 너희들도 저렇게 잘 살 수 있어’ 라고 속삭이는 것은 마치 마약을 투여하면서 불치병이 낫는다고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실제로는 출발점이 다른 경우가, 주어지는 기회가 다른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이 책은 이런 자유를 신장시키고 인권선언을 세계 어디에서든 존중받는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2048운동이지요. 이 책에서 주장하는 2048운동은 1948년 인권 선언 초안을 만들었던 해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2048년까지 ‘인류가 미래의 전쟁을 방지하고, 가난을 사라지게 하며,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건을 창조할 수 있는’ 합의로 나아가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서 세계 모든 사람들을 인권에 대해서 교육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언급합니다.

 

 

4.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의 실망스러운 부분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런 2048운동의 핵심이 되는 것으로 2048운동 웹사이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www.2048.berkeley.edu가 바로 그것인데, 이 사이트로 들어가 보시면 버클리 법대의 홈페이지가 나올 뿐, 다른 사이트가 나오지 않습니다. 앞의 월드 와이드 웹(www)을 빼면 더 가관입니다. 백지 상태로 ‘no real content for now' 라는 문장만 나오고 있지요. 책에서는 이 홈페이지가 운동의 핵심이며 이를 이용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의견을 집적하겠다고 말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장밋빛 미래는커녕 운동 자체도 흐지부지되었다고 보는 게 옳은 이야기겠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책에서 또 언급하는 것으로는 비영리기업과 영리기업의 합작이 있습니다. 영리기업이라고 해서 꼭 나쁜 것이 아니며, 비영리기업과 마찬가지로 인권 신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가 이 책의 주장인데, 사실 이 문장자체로는 옳은 문장입니다. 비영리기업이라고 해서 꼭 좋은 기업은 아닐 것이며, 영리기업이라고 해서 꼭 나쁜 기업은 아니겠지요. 이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정말 그런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영리기업이 항상 좋은 기업이 될 수는 없겠지만, 보통 인간이 타락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돈, 자본일 테고, 그 자본과 항상 상호작용하는 영리기업이 항구적으로 인권 신장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영리기업의 목표는 그 단어에도 들어있듯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니깐 말입니다. 저자는 국가에서 영리기업이 인권 신장 운동에 참여하는 만큼 금전적 이익을 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렇다면 그 나라의 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국민의 세금이 국가의 주 수입원이라는 것을 알며,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일자리가 많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도 알 것이며, 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역에서 이익을 보아야 한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무역에서의 흑자가 국가의 수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흑자를 만드는 것은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지출보다 수입이 많으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영리기업들이 채찍을 들고 정리해고를 해가며 국가의 수입을 올리는 동안, 소위 말하는 양심적 영리기업들은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겠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의 ‘책임감 있는’ 갑부들과 다보스 포럼의 이야기도 이 책의 문제점이라고 들 수 있겠습니다. 다보스 포럼은 정, 재계 수뇌들이 모여서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포럼인데, 이 책에서는 다보스 포럼을 마치 ‘인권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고위 관료들이 머리를 짜내는’ 그런 모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대략 ‘이들을 강제력을 가지는 인권을 지향하는 운동의 잠재적 협력자로만 생각해야 할 것’ 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책 외에 경제에 대한 다른 책을 보면 다보스 포럼을 악의 소굴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비싼 사교클럽에 지나지 않고, 구체적인 의결은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 그런 포럼이라고 말이지요. 사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지금껏 구체적 의결을 내린 적도 없는, 그리고 미국의 입김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그런 다보스 포럼이 잠재적 협력자라도 될 수 있을까요? 이미 한 국가의 영향이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크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인권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것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등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도 잠재적 협력자가 될 수 있으리라고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책에서는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으며 그저 흐지부지하게 웹사이트에서, 그것도 지금은 운영도 안 되고 있는 곳에 의견을 올려 달라, 라고만 이야기하고 있지요.

 

 

5.

 

 

  위와 같은 이유로 사실 이 책은 그리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하나의 시사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지요, 분노는 배제됨으로부터 오는 슬픔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감정, 맹자의 말을 조금 빌려오자면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슬픔의 원인이 타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들어맞겠지만, 설령 본인에 기인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물론 분노는 말씀드렸다시피 바람직한 감정은 아니겠지만, 이는 반대로 보면 도리어 바람직한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과 함께 되고자 하는 욕구, 배제됨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는 앞으로의 사회에 있어서 인권 신장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다섯 가지 자유를 떠올리게 하고,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현실의 사례를 떠올리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분노를 느끼게 하고, 그 근원이 되는 슬픔을 느끼게 하며, 이윽고 다른 사람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 세우는 그런 일련의 일들의 초석을 쌓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이 책에서 언급하는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천릿길도 한걸음부터’ 가 되겠군요. 그래서 이 책은 이렇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 앞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일은 많겠습니다만, 할 일이 많다고 그저 던져두기만 한다면, 천릿길이 멀다고 한 걸음조차 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분노하라, 분노가 우리의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

 

 

 

 

 

 

 

p. s. 으아.. 힘들다... 사실 이 책은 0.5권 정도...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가 1.5권이니깐 합쳐서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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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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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1.

 

 

  일전에 막을 내린 인기가 드높던 ‘뿌리 깊은 나무’ 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드라마라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못 보신 분을 위해서 잠깐 한 줄로 요약하여서 이야기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떤 고난을 겪었는가, 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훈민정음을 잘 이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 시대, 그러니깐 세종대왕이 갓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히 천대받던 문자였지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이야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과 중국의 문자가 서로 맞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널리 알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사대부들의 반대와 지도부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의식부족으로 실제로 한글이 조금씩 이용되게 된 시기는 반포 후 100년이 지난 뒤였고, 실제로 우리가 오늘날에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은 현대 한글의 아버지인 주시경 선생이 연구를 거듭하고 나서였지요.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더라도 어쨌든 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는 드라마적인 과장이 섞여있기도 하지만 제법 준수하게 한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를 잘 드러내었던 수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제가 감명 깊게 본 부분은 바로 세종과 세종의 한글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극중에서는 밀본이라고 이름 붙여져있습니다만)의 수장인 정기준(극중에서는 정도전의 동생의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기준은 세종에게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겨우 말합니다. ‘그대가 준 문자를 통해서 백성은 지혜를 가지게 되겠지만 그만큼 더 지배층에게 쉽게 속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크게 웃으면서 정기준의 말에 반박합니다. ‘때로는 백성들은 질 것이고 때로는 이길 것이나 그것은 상관없다. 그것이 역사다. 네 말 대로 백성들이 속더라도 결국에는 글자가 가진 지혜와 더불어 싸우고 또 싸워나갈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정말 감명깊게 본 장면이었습니다만 볼 당시에는 감명깊다, 라는 생각만 했을 뿐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인민의 탄생 - 공론장의 구조 변동’ 을 읽으면서 그 부분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저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2.

 

 

  처음 이 책의 ‘책머리에’ 부분과 ‘서론’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내용 자체도 흥미로웠으며 어떤 방식으로 역사와 사회과학을 교차시켜서 풀어나갈 것인지 기대가 되었었지요. 자신만만하게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서양산 이론에서 우리나라는 극복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과거를 죽였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근대가 과연 조선시대에서 어떻게 기원하였는지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탐색 여행을 펼치겠다고 합니다. 서론 중간 부분에 저자가 유길준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고 언급하기에 ‘아, 저자는 마치 여행기처럼 유길준의 생을 더듬어 자연스레 근대의 인민의 탄생을 밝히려나보다.’ 라는 생각도 했었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저의 기대는 뒤의 ‘개화기 인민’부터 시작되는 챕터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저자에 대한 의구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걸까, 라는 생각 말이지요. 사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져서 발간된다고 하여 실망감을 조금 덜어보려고 했었지만, 각각의 권에서 다루는 것이 '근대적 인민의 탄생 과정' 과 '인민의 시민으로의 전환 과정' 이니 이 책의 논리 전개나 나중에 나올 책의 논리 전개가 크게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수많은 이론들을 적용시키지만) 결론적으로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해독할 수 있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의 맹아가 틔워졌다.’ 라고 말이지요.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료를 가져오지만, 중간에 저자는 기존 역사 연구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거시사와 미시사가 제대로 통합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행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연구가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이르러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서 연구를 하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자신만만함에 비하여 책을 읽는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다지 독창적일 것도 없는 내용이며 대학에서 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짐작할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나라와 비교해봐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학생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근거에 비해서 훨씬 풍부한 내용으로 책이 채워져 있지만 그 뿐입니다. 설령 저자의 주장이 독창적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책 내부에 이미 모순이 심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민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 책 읽는 인민의 탄생, 곧 문해인민의 탄생 때문이라면 왜 책에서는 외국의 예를 들어서 그들도 일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독해’ 라는 능력이 배양되지 못했다, 라고 이야기할까요?

또한 한 가지 꼭 언급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책 머리에’에서 밝혔다시피 서양에서 들어온 사회과학의 무분별한 적용이 우리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서양산 사회과학이 아닌 다른 준거틀을 사용하여서 우리나라의 근대를 분석하는 게 옳겠지요.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버마스부터 시작해서 베네딕트 앤더슨, 미셸 푸코 등 담론장 혹은 공론장과 관련된 서양 학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이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당한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서양산 사회과학을 벗어나기 위해서 쓴 책에 서양산 사회과학으로 주장을 펼친다니 말입니다.

 

 

3.

 

 

  사실 이 책이 이런 한계, 혹은 모순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라는 개념과 인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을 가지고 그 개념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근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를 파악하겠다는데 서구의 이론이 적용되지 않으면 다르게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야심차게 말했던 서양산 사회과학이 찢어놓은 한국 사회를 제대로 분석해내겠다는 논지는 처음부터 내부에 오류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분석되어지는 게 옳을까요? 물론 이렇게 비판을 한다고 해서 그러면 근대가 어떻게 맹아를 틔웠는지 알기 위해서 유교적 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 속해 있는 사람은 외부를 보지 못하는 법이며, 좀 더 자세히 수학적으로 부연한다면 A와 B라는 두 집합이 있고, 집합 사이에 B는 A라는 집합의 부분집합이라는 과계가 있다고 할 때, B로 A의 모든 면을 판단하는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이미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조선이라는 집합에 포함되어있는 유교라는 집합을 가지고 조선을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답은 두 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명제 ‘서양산 사회과학이 무분별하게 적용되었다’ 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서양산 사회과학을 적용하여 우리나라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근대의 인민으로 탄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던가, 아예 새로운 틀을 찾는 것이 옳겠습니다. 새로운 틀은 서양산 사회과학적 이론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론이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유교처럼 내부에 이미 속해있던 틀도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어느 틀이든 소위 말하는 서양산 학문의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대화, 혹은 현대화는 일종의 서양화, 와 동일시 된지 오래며, 이런 현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두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변 국가들의 예를 끌어들여오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하는 것이 그나마 최상의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의 중간부분에 보면 베트남이나 일본을 비교대상으로 가져와서 함께 분석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사실 정말 이 책에서 필요한 근본적인 것은 ‘무엇이 근대인가?’ 라는 질문에 먼저 엄밀히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근대’ 라는 개념을 서양에서 들어온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내용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겠지요. 뿌리깊은 나무, 를 앞서 언급하였지요. 세종이 말했습니다. 백성은 지고 또 지겠지만 문자가 가진 지혜와 더불어 싸워나갈 것이라고. 제가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했던가요, 저 대사 안에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다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입니다. 저 대사야말로 근대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근대를 살아가는 인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근대는, 그리고 현대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 등과 같은 어려운 말은 모두 옆으로 제쳐두고, 우리가 우리의 말과 함께 편지든, 블로그든, 트위터든 어떠한 것이든지 자유로이 우리의 말을 쓰며 싸워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나가는 시대, 라고 말이지요.

 

 

 

 

 

 

 

 

 

 

 

 

 

 

p. s. 아이구 추워죽겠네요..

p. s. 2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서 중에도 이 책의 부제와 똑같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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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네히트 2012-02-01 09:37   좋아요 0 | URL
저도 뿌나가 생각났었는데요^^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가연 2012-02-03 21: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 뿌. 나.를 정말 재미있게봤었었지요
 
[부채, 그 첫 5천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부채, 그 첫 5000년.

 

 

 

 

 

 

1.

 

 

  신간평가단을 하면서 가끔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는 책의 평점을 어떻게 주는가, 입니다. 여기 알라딘에서는 마이리뷰를 통해 작성한 리뷰에 책에 대한 평점을 기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별 5개를 만점으로 두고 별 1개씩의 단위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점수 체계는 사실 세밀하게 만들어졌다고는 보기 어려워서, 각 책마다 고유한 점수를 매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불만족스럽겠지요. 저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별 다섯 개는 정말 창의적이며 논리가 빈틈이나 비약이 없이 잘 짜여있다, 고 여겨지는 책들에게만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항상 제 생각이 옳다고 여길 수 없기에 그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별 두 개는 잘 안주는 편입니다. 별 한 개는 아무래도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읽은 책인 이상 부여하지 않고 말이지요. (읽지도 않았거나 건너뛰면서 읽었다면 아예 리뷰를 쓰며 별점을 매길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면 대부분의 책들은 별점이 3개에서 4개 사이에 머물게 됩니다. 만약에 별점을 소수점단위로 매길 수 있다면 아마 더 세세한 별점을 줄 수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저 대부분의 책들은 리뷰를 쓸 때마다 별점을 3점을 주어야 할지, 4점을 주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껏 리뷰를 써오면서 이 책 ‘부채, 그 첫 5000년’ 보다 더 별점이 헷갈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3점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라치면 지은이의 다음 문단에 나오는 주장에 설득되어 4점을 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가운데 제 마음은 3점과 4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지요.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 수많은 생각을 접어두고 일단 이 책에 4점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점수를 매기는 데 왜 이렇게 민감한가, 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이 책에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 드리는 것들을 들어보시면 제가 왜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으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2.

 

 

  이 책, ‘부채, 그 첫 5000년’은 상당히 독창적인 책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화폐와 시장의 발전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는 기본적인 관념들을 다 뒤집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물물교환이 있고, 그 후에 그것이 발전하여 화폐가 생겼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오늘날에 이르러 신용거래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먼저 부채, 쉽게 말해서 태초에 빚이 있었고, 이 빚의 척도가 있었으며, 그 척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에서는 물건과 물건의 교환이 일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이 빚의 ‘척도’가 일종의 화폐역할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화폐는 화폐이지만, 신용화폐이며 주화로 만들어진 화폐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먼저 부채를 바탕으로 한 신용거래가 있었으며, 그 후에 주화를 사용하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주화로 사용된 금, 은과 같은 귀금속들은 그것들이 폭력과 결합하게 되면서 화폐로 쓰이게 되고, 그 결과 약탈 또는 수탈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이 주장에 대해서 근거를 내세우기 위하여 애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과 동시에 인류학적인 접근을 시도합니다. 먼저 애덤 스미스가 글에서 주장했던 물물교환과 주화, 시장경제의 발전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서조차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료의 추적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반론을 펼치며 그가 외면해왔던 실제의 사회상, 즉 폭력과 노예제도가 뒷받침된 사회를 꼼꼼히 드러냅니다. 축의 시대, 중세시대 등으로 개념을 구분하면서 말입니다. 폭력과 노예제도가 없던 사회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면, 저자는 그런 사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자료 조사를 통하여 그 실상을 드러냅니다. 실질적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은 기계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 착안해야 하며, 인간인 이상 인간들끼리 가지는 정(情)이 있으며, 그 정을 통해서 서로간의 부채가 자연스럽게 상쇄되고 순환된다는 이야기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마치 기계로 취급한 애덤 스미스의 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발전되어온 주류경제학의 단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이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인류학적으로 인도의 리그 베다, 브라흐마나와 같은 고문서에서부터 이집트의 로제타석과 상형문자에 기록된 문헌들, 성경이나 불교의 교리, 이슬람의 이야기까지 자신이 가져올 수 있는 자료는 모두 가져오면서 태초에 있었던 부채의 존재를 입증합니다. 또한 사실 실질적인 증거라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만, 언어학적으로도 접근하여 truck(거래하다), barter(교환하다)와 같은 단어가 애덤 스미스의 시대보다 1, 2세기 앞선 시대에서는 trick, rip off, bamboozle과 같이 속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가져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물물 교환에서부터 화폐가 발생하였다, 라는 주장은 의외로 연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에 단 하나의 반례만 가져오더라도 쉽게 파훼될 수 있지요. 그래서 저자는 그 반례로 남미의 원시 부족인 남비콰라 족이나 콩고의 렐레 족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실로 인류학자들이나 가능한 방법이 아닐 수 없지요. 어쨌든 이로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말대로 신용사회가 먼저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도 신용사회가 아닌가, 왜 오늘날은 옛날에 있었던 신용사회처럼 굴러가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답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전의 사회와 다른 비인간적이고 객관적인 신용화폐이며 이는 우리 인류가 소위 말하는 축의 시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사회의 요소들이 변용을 거쳐서 자본주의 제국의 시대에 침투하였기에 변질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3.

 

 

  그런데 이 책의 문제점은 저렇게 많은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체계적으로 제시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좋게 말하자면 독자들에게 불친절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중구난방으로 자료를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책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부채에 대해서 인도의 베다, 구약성서와 같은 고문헌들을 가져오면서 ‘원초적 부채 이론’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이론은 우리가 우리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면, 이 빚은 엄밀히 말하자면 도대체 누구에게 지고 있는 것이고, 누구에게 이 빚을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따라 이런 저런 물물 교환을 통하여 형성된 시장이 정부보다 먼저 형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시장에서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정부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한 근거들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채감이 어디서 기시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하나 제안된 것이 바로 이 ‘원초적 부채 이론’ 입니다. 고대에 창작된 베다의 시를 참조하면 우리가 지고 있는 부채감은 신에게 빚을 지고 있고, 죽음에 빚을 지고 있으며, 좀 더 확장하여 말하면 ‘산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존재를 보장해주는 사회의 연속성과 영속성’에 빚을 지고 있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학적 증거로 고대 인도유럽어의 부채, 라는 단어가 죄의식, 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라는 사실로 뒷받침되고 말이지요. 이윽고 신에 대한 이런 부채감은 인간에게 끌어내려져 신과 동일시 된 인간, 고대 이집트의 경우 파라오(태양신 ‘라’의 아들과 종종 동일시된)가 그 예가 되겠지요, 에게 권력을 줍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한참 위와 같이 ‘원초적 부채 이론’ 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을 하고 나서는 그 다음 장에서는 단칼에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라면서 잘라버립니다. 방금 전까지 열을 올려서 설명하던 내용은 사실상 저자 본인과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저자는 저자 본인의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런 식으로 부채를 설명하는 방식은 일종의 '국가의 논리' 이며, 우리 모두가 상환이 불가능한 빚을 안고 삶을 시작하게 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이제 독자들은 당황함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아니, 방금 전에 보이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확 뒤집어 버리다니’ 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드러납니다. 한 번도 당황스러운데 많은 부분에서 이런 태도를 보이니 그 많은 자료들이 도리어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어쩌면 이는 자료의 과잉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쌓아보니 참 많고 다양하더라, 이 자료들을 다 이용하고는 싶은데 마땅히 본인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바로 이용할 만한 곳이 없으니 억지로 새로운 단락을 만들어 끼워 넣는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료가 산만하게 쌓이게 되고, 독자들이 저자의 중심 개념을 파악하는데 힘들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됩니다.

 

 

4.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저자는 책에서 ‘인간경제’ 라는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 ‘인간경제’ 는 일종의 원시화폐가 쓰이던 경제 체제를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원시화폐라는 말을 싫어하고 사회적 통화라는 말로 대체하는데, 이 사회적 통화는 국가나 시장이 없는 곳에서 흔히 보게 되는 조개껍질이나 깃털화폐, 섬유화폐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배워온 관념이 남아있기에 이런 조개껍질이나 깃털이 발전하여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주화로 변화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 조가비 구슬이나 깃털 화폐는 실질적으로는 어떤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역할을 합니다. 그것의 예로 원주민들에게서 보이는 피의 부채, 신부값 등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이 주장 자체는 사실 크게 보면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칼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 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내용이 언급됩니다. 칼 폴라니는 말합니다. ‘우리의 시장경제가 어째서 무너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상품화 할 수 없는 것을 상품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상품화 할 수 없는 것이란 바로 인간 자신을 가리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과도한 발달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팔 수 있는 것은 다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가공하여 팔려고 하다 보니, 실제로 찬찬히 살펴보면 팔 수 없는 것들, 말하자면 인간까지도 상품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여기서 칼 폴라니가 말하는 팔 수 없는 고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인간경제와 맞닿아있습니다. 이 경제에서 쓰이는 사회적 통화는 서로 비교 불가능한 인간 존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통화이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를 인정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통화이지요. 심지어 칼 폴라니와 이 책의 저자의 지향점마저도 똑같습니다. 현실 자본주의의 잘못된 모습을 밝힌다, 라고 말이지요.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애덤 스미스가 중세 페르시아 자유 시장 이론가들의 이론을 표절한 것 같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부채가 화폐에 우선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하여 그 근거로 내세운 ‘인간경제’ 부분은 용어만 다르게 썼을 뿐 이미 다른 학자에 의하여 그 의의가 정교화 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칼 폴라니의 저서를 표절한 것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책의 저자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도출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애덤 스미스도 정말로 저자의 생각대로 표절을 한 것일까요? 애덤 스미스도 나름대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그 결론을 이끌어낸 것이 아닐까요? 책의 뒷부분에서는 이슬람 자유 시장 이론가들의 책 구절과 애덤 스미스가 지은 책 구절이 서로 비슷한 것 같으니 영향을 받았다, 라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만 그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근거로 보기에는 모자랍니다. 저자의 문제제기와 주류 경제학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훌륭합니다만 책의 일부가 실제로 확실한 근거를 들지 못하는 상태로 애덤 스미스 죽이기에 할애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5.

 

 

  위의 단락들에서 언급한 의미들로 판단하자면, 이 책은 마치 문이 닫힌 방바닥에 구슬들을 가득 쏟아놓은 것과 같아서, 방 바깥으로 구슬이 빠져나가지는 않지만 실제로 보배로 쓰기에는 상당히 부족한 느낌을 줍니다. 결국 독자 자신이 책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렬해야만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마치 오천 조각으로 나뉜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랄까요. 다 맞추고 나면 분명 훌륭할 거라는 것은 알지만 맞추기가 어려운 그런 퍼즐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문제를 제쳐두더라도 저자의 마지막 말은 쉽게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앞서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빚은 꼭 갚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부채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요. 얼핏 보면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만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말의 깊은 곳에는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는 부지런한 사람은 그 부지런함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해치는 사회이며 동시에 설령 본인이 하기 싫다고 할지라도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착취나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이고, 도리어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즐기는’ 사회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부채를 꼭 갚아야 한다는 관념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게을러 질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인생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경제 질서는 조금 더 자기 파괴적인 경향이 줄어들겠지요. 물론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서 제안하는 ‘희년 정신’, 굳이 풀어 말하자면 부채 탕감 정신은 사실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런 희년 정신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희년 정신이 가능할 수도 있는 시점에 이르는’ 노력마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저자가 책을 읽으며 그 많은 구슬을 하나씩 꿰어온 우리들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부채는 원래 고유한 특질을 가진 인간들 사이의 자유로운 약속이었으며, 우리는 우리 사회의 존립을 위해서 그 타락한 약속을 순수한 상태로 되돌리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말입니다.

 

 

 

 

 

 

p. s. 그러니깐 4점... 여러분은 몇 점을 주고 싶으세요?

 

같이 읽어볼 만한 책 : 슬픈 열대 - 레비 스트로스,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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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2012-01-25 10:24   좋아요 0 | URL
대.단.한. 리뷰네요^^* 이 리뷰를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읽는다면... 감탄하겠습니다. ㅎㅎㅎ 정독의 대가십니다!!!

가연 2012-01-27 21:19   좋아요 0 | URL
ㅠㅠ 감사합니다. 부끄럽네요ㅠㅠㅠ

희선 2013-10-11 00:5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말 들었던 것 같네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빚을 지고 있다는, 나라에서 진 빚을 국민도 지는 것이라고... 이것을 꼭 갚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하지만 개인이 다른 곳에 진 빚은 갚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빚은 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다른 말이 된 것인지도...^^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게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는 것이겠죠 표절이라는 것은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한데... 지금은 사람이 상품이기도 하군요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구슬이 많지만 꿰어도 보배가 되기 어려운 흠집 있는 구슬인가 싶기도 한데 꼭 그렇지도 않군요 제대로 꿰기가 어려운 것이군요


희선

가연 2013-10-16 17:19   좋아요 0 | URL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좀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

희선 2013-10-14 00:49   좋아요 0 | URL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하잖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말 뜻을 예전에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꼭 나와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람은 다른 사람한테 도움을 주기도 하잖아요 자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한테 도움을 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빚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지...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살면 더 좋은 사회가 될 텐데요 그렇다고 제가 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도 합니다 가끔...^^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바꿀 수 없다, 이 말 늘 생각해야겠어요 바로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희선

가연 2013-10-16 17: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 바꿀 수 없다. 가끔은 양영순의 1001일이라는 만화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 만화에 자신의 하루하루를 만들기 위하여 기도를 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그런 내용이 나왔었는데..
 
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
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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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신화 읽기.

 

 

 

 

 

[가연] 오늘 이렇게 나와 주신 크리슈나님과 아르주나씨, 반갑습니다. 무신론자나 다름없는 사람이 만나자고 하였으니 어려운 발걸음이셨을 텐데 개의치 않고 이렇게 대담장소에 나와 주시니 그 그릇의 크기를 짐작하겠습니다, 하하.

 

 

[아르주나] 그런데 저는 왜 ‘씨’ 입니까?

 

 

[가연] 하하, 크리슈나님은 아무래도 신이시니깐.. 아르주나씨도 아르주나님으로 부르는게 좋을까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주나] (크리슈나를 힐끗 쳐다보다가) 아니 뭐.. 제가 감히 신과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지요.

 

 

[크리슈나]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짓는다) 그나저나 이렇게 부른 이유가 뭔가요? 만약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해서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냥 불러본 거라면 신을 만만히 여긴 죄를 물어야겠지만..

 

 

[가연] (당황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바로 말씀드리면, 최근에 어느 책을 읽었는데, 그게, 음.. 그 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딱히, 음.. 나눌 사람이 없어서...

 

 

[아르주나] 그 책이라 함은 혹시 ‘마하바라타’ 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뜻하는 것인가요? 저도 그 글들을 봤는데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정말 기억력이 대단한 것 같던데. 어떻게 그 많은 대사들을 다 기억하고 썼는지..

 

 

[가연] 아하하.. 음, 그 마하바라타에서 가장 중심되는 부분이라고 일컫어지는 부분을 해설한 책인데 말입니다,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느껴져서 말이지요. 그러니깐 크리슈나님께서 아르주나씨를 설득하는 장면말입니다.

 

 

[크리슈나] 아, 그거.. 그거 정말 힘들었었다네.

 

 

[아르주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을.. 그렇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크리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르주나를 설득시키느라 정말 다른 신들도 보기 힘든 무장을 다 갖추고 패션쇼를 한 게 아닌가. 정말 내가 왜 그랬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네.

 

 

[가연] 패션쇼.. 크리슈나님께서는 현대 용어에도 익숙하시네요.

 

 

[크리슈나] (머쓱한 표정으로) 일단은 나도 신이니깐 말이지. 화신이라고 해도 말야, 최고신 비슈누의 화신이잖나. 내가 8번째였나? 여하튼 여러 차원에 걸쳐서 존재하는 나를 그대의 좁은 식견으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되지.

 

 

[가연]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본다면 말이죠, 그.. 역사가들이 그러는데 최고신 비슈누신의 7번째 화신인 라마찬드라님과 생존기간이 겹친다고 하던데 말이죠.. 그럼 비슈누님은 7번째 화신 기간이 다 끝나기 전에 8번째 화신을 또 나투신 건가요?

 

 

[크리슈나] 틀렸네, 이 사람아. 6번째 화신이 아마도 파라슈라마라는 친구였을거야. 그 친구랑 라마찬드라랑 생존기간이 겹치지. 파라슈라마 그 친구가 성격도 참 대단하고 사는 것도 참 오래 살았지, 아마. 그리고 좀 더 부연하자면 말이지, 화신이 꼭 한 시대에 하나, 라는 말도 어이없는 거지. 누가 그렇게 정했나? 그대가 비슈누인가? 비슈누의 뜻을 그 누가 짐작하겠는가? 화신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인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존재야. 그것과 궤를 달리할 화신은 앞으로 다가올 화신인 칼키외에는 없으니. 그러니 말이네, 나는 신이지만 동시에 그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며 그리고 화살에 맞아 죽은 생명이라네. 그 점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기를 바라네.

 

 

[가연] 아,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사실 ‘불온한 신화 읽기’ 라는 책을 읽었는데 말입니다. 그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바로 크리슈나님과 아르주나씨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부분만 떼서 바가바드 기타, 라고 부른다던데 말입니다. (아르주나를 쳐다보면서)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아무래도 본인들 이야기라서 흥미가 갈 듯도 한데..

 

 

[아르주나] 마하바라타를 읽을 때 그 부분도 같이 읽기는 했는데 뭐, 기억력이 참 대단하군, 누가 적었는지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기는 했지만..

 

 

[가연] 했지만..?

 

 

[아르주나] 솔직히 말하면 내가 정말 이런 말들을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고, 왜 그 대화가 인기를 끄는가, 그 부분도 잘 모르겠네요. 인간이 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이상한건가요?

 

 

[가연] 아니, 인간이 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너무나 당연하니깐.. 그 지혜를 좀 나눠주십사, 하고 인간들이 달라붙는 거지요. 그 때 당시를 지금 회상해달라고 부탁드리면 어려운 부탁이겠습니까?

 

 

[아르주나]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요. (신파조로) 당시 저는 참 힘든 상황에 빠져있었습니다. 대충 상황은 아시죠? 큰 형이 도박에 져서 패가망신하고 집날려먹고 나라날려먹고.. 여하튼 떠돌다가 13년이 지난 후 돌아와서 100명의 사촌들, 그러니깐 카우라바 형제들이랑 싸우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여튼 도박은 나쁜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제 카우라바 형제들이랑 싸울 상황이 되니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여기서 싸운다면 사촌들과 싸우는 거구, 싸우지 않겠다고 하면 이제 내 목숨을 가져다 바치는 꼴이니, 어떻게 해야 되는가..

 

 

[크리슈나] (말을 끊으며) 그래서 아르주나가 이제 궁상을 떠는 거지. 여기서 싸워서 사촌의 목을 베고 적을 싸그리 죽이면 이제 남자들이 별로 없으니 여자들 밖에 안 남을테니 그러면 결혼하려면 남자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아래 계층 남자들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면 자연스럽게 베다의 가르침은 깨지고 카스트는 무너지고. 그야말로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무너지는 일을 겪게 될 거 아닌가. 그걸로 끙끙 앓고 있었다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해줬지.

 

 

[가연] 뭐라고 하셨나요?

 

 

[크리슈나] 내버려두라고.

 

 

[가연] 네?

 

 

[크리슈나] 너무 어렵게 말했나? 그냥 내버려두라고, 그런 문제는.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도 물론 중요하지. 중요해. 그러나 그런 것은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그대에게는 그대가 가진 의무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네가 할 일은 자명한 거지. 지금 여기서 네가 하여야 하는 행위 그 자체에만 집중해라.

 

 

[가연] (불쑥 끼어들며) 세 가지 요가, 지혜의 요가와 사랑의 요가, 행위의 요가 중 행위의 요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크리슈나] (불쾌한 기색 없이) 그렇지. 네가 본 책 ‘불온한 신화 읽기’ 에는 이렇게 나와 있을걸, 아마?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고,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제어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네. 사실 무의미한 살인을 하지 말라, 라는 가르침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말이야. 그런데 저기 저 뚱하게 있는 아르주나는 전사계급이잖는가. 전사계급이 하는 일이 무엇인고 하니 적과 맞서 싸워 그들의 수급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사촌이 아니라 그냥 적이었다면 그대로 가서 활로 다 공격하지 않았겠는가. 저기 등에 멘 간디바 들고 말이지. 이렇게 보편적인 가르침과 계급의 의무가 상충될 때 그대가 먼저 취해야 할 것은 계급의 의무이니, 나에 대한, 그러니깐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스스로 행해야 할 바를 다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의무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지. 그대는 다르마dharma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가연] 네.. 조금...

 

 

[크리슈나] 그래, 바로 그 다르마야.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다르마가 있는 법이지.

 

 

[가연] 그러나 아르주나씨가 꼭 잘못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나요? 당돌한 제 말투를 용서해주세요, 허나 저는 개인적으로 판다바 형제들이 카우라바 형제들에 비해서 정말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아르주나씨의 큰 형인 유디슈티라가 주사위 도박을 별로 안했으면 나라를 안 빼앗겼을거잖아요. (아르주나가 살짝 쏘아보지만 이내 시선을 거둔다) 카우라바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맏형인 두리오다나에게 별 별 나쁜 점들을 다 뒤집어 씌어놓았지만 정말 나쁘다, 라고 여겨질 만한 것은 주사위 도박에서 고귀한 왕비의 옷을 벗기려 들었다는 것 정도 외에는 특별히 없지 않을까요? 게다가 두리오다나 입장에서도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이 다 들어왔는데 그냥 놓아줘야 된다니.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권력욕이란 독버섯같은 거 아니겠는가, 생각해봅니다만. 무엇보다도 마하바라타 전체에서 상당히 이상한 점은 카르나의 존재이지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그 후 별의 별 저주를 다 받으면서도 저기 저 아르주나와 대등하게 싸웠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지만, 카르나가 고결한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 인물도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요?

 

 

[크리슈나]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르주나에게 물어보지. 아르주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아르주나] 크리슈나여,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는 당신의 결정을 따를 것입니다. 그대를 경배하고 그대를 숭배할 것이니 그대에게 완전히 흡수됨으로서 궁극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크리슈나] 옳다, 아르주나여. 전쟁과 평화는 모두 나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대에게 찾아올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말하노니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이나 그 행위에 집중할지어다. 그리고 해야 할 의무에 충실할 것이다.

 

 

[가연] 어..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로 말씀드리는데 여하튼 크리슈나님을 믿는 쪽이 선이고 믿지 않으면 악이라는 말인가요? 아니면 제가 잘 이해를 못한 건가요? 하긴 두리오다나는 끝까지 크리슈나님을 보통 인간으로 여겼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감히 말하건데 독선이 아닐까요?

 

 

[크리슈나] 그렇지 않다. 나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네. 다시 말하자면 일종의 회색이지. 좀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겠지? 회색이라는 색깔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서, 다시 말하자면 선과 악이 섞여서 탄생한 색깔이야. 물론 여기 있는 이 아르주나와 같은 판다바 형제들이 선으로 보이고 카우라바 형제들이 악으로 보일 수 있겠지, 그러나 선 속에서도 악이 있고 악 속에서도 선이 있다네. 또한 악 처럼 보이는데도 선인 경우가 있다네. 마찬가지로 선 처럼 보이는데도 악인 경우도 있고 말이네. 모두 주어진 본성이라는 것이 있어, 그 본성에 충실하라는 이야기네. 두리오다나의 예를 들었는가? 두리오다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네. 그는 죽을 때까지 어리석었으나 올곧기까지 한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윽고 신들에게 꽃을 선사받지 않았는가. 두리오다나가 죽을 때 어찌했던가? 그의 용맹을 당해내지 못했던 판다바 형제는 크샤트리아의 법도를 어기고 하체를 공격하지 않았나? 이는 선 속에 악이 있는 예이지. 그리고 선 속에서 악 처럼 보이는 경우를 들라고 한다면 바로 이 나, 크리슈나가 이런 저런 잔머리를 부린 것도 해당되겠지. 그러나 그것이 악인가? 그렇지 않다네. 누구에게나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법이라네. 

 

[가연] ... 어리석은 인간입니다만, 하나 꼭 질문하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중에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아르주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거기서 성당을 지으라고 왕이 예멜리안에게 시킵니다. 예멜리안의 예쁜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도저히 왕이 정한 기한 내에는 성당을 완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실의에 빠진 예멜리안에게 그의 아내가 말합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만 생각하라’ 고 말입니다. 예멜리안은 아내의 말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결국에는 성당을 다 쌓고 말지요. 크리슈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는 이 단편에서 나오는 아내가 이야기하는 바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크리슈나] 진리는 어떠한 모습으로든 반복될 수 있는 법이지. 그리고 그 진리의 과실을 베어 물 수 있는 사람이 꼭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가연] 그런데 이런 식의 사고는 일종의 임시방편이 아닐까요? 제가 읽은 책 ‘불온한 신화 읽기에서는 이층의 사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상대적으로 덜 고결한 목표인 ‘일층’에 해당되는 것은 고결한 ‘이층’에 의하여 억제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기를 마치 이층의 링거를 버텨나가는 일층의 삶, 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모두에게 예멜리안의 아내와 같은 안사람이 존재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신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스스로 설파하셨다시피 크리슈나님은 이미 전쟁의 향방이 어디로 향할지 모두 알고 있으며, ‘그대가 승리할 것이다’ 라고 아르주나씨에게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은 설령 나쁜 결과가 예상될지라도 그저 그 길을 걸어나가야만, 행위에 집중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르주나] 그 말은 그릅니다. 방금 예시로 든 단편에서는,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예멜리안이라는 사람이 이윽고 성공한 까닭은 아내에 대한 믿음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자식이 부모를 대하듯, 애인이 애인을 대하듯 크리슈나님을 믿고 오롯히 따릅니다.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그저 구조만 빌린 채 크리슈나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그대는 비슈누신을 믿습니까? 아니겠지요. 그대가 믿는 존재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믿는 존재가 있기는 있습니까? 그대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두 발로 대지를 딛는 오만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대 나름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행위의 요가의 중요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대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의 인식 저편에서는 위대한 신들이 있고 위대한 베다의 가르침이 있으며, 그대를 옳아매는 운명이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운명을 그대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대의 진실된 자아는 알고 있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육체에게 주어진 길은 그저 그대의 육체가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일 뿐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행위를 하면서 체념을 하는 것입니다.

 

 

[가연] 중세의 칼뱅이나 할 법한 소리군요. 아르주나씨의 이야기를 들으니 페르시아 신화가 문득 떠오릅니다. 위대한 영웅 루스탐은 칠난도를 거쳐 영광을 쟁취했지만 이윽고 자신의 아들 소라브와 맞서 싸우고 끝내 칼로 소라브의 심장을 찌릅니다. 하지만 신들의 무심함이었는지, 혹은 축복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죽는 그 순간 소라브는 모든 것을 알게 되고 루스탐에게 그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루스탐은 비탄에 젖어서 소라브를 살리기 위해서 페르시아 곳곳을 떠돌아다녔지요. 그들 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모든 존재들, 그 용력과 지력이 하늘을 뒤덮던 영웅들과 신의 사자나 다름없던 신수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삶이라는 것은 그 위대한 섭리 앞에서 그저 발버둥 치는 것에 다름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과 크리슈나님이 나눈 대화는 신에게 순응하는 사람을 찍어내는 틀에 지나지 않지요. 게다가 크리슈나님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처럼 들립니다. 방금 말씀하셨던 선과 악에 관한 이야기에서 크리슈나님은 본인이 계략을 쓴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악이 아니니, 그 까닭은 모두가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의 화신이신 크리슈나님조차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의무는 일종의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행위를 하면서 체념한다’ 는 것이 저에게는 그렇게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인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카스트라는 틀에 묶여서 발전을 저해당하고 있지요. 죽을 때까지 그 카스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 후에도 속박되는 그 끔찍한 것에서 말입니다. 공덕을 다 하면 상위 카스트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정말 그런지 현실의 삶이 중요한 저 같은 세속적 인간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럼에도 크리슈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교과서적인 이야기뿐이지 않습니까. 나를 믿어라. 그리고 적을 섬멸해라. 그대가 죽이는 것은 육체요, 불멸의 영혼은 해를 입지 아니하니. 이런 식의 구원은 저기 저 서양의 유일신 종교에서도 보이는 모습이지요.

 

 

[크리슈나] (다시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아마 더 이야기를 해도 팽팽히 대립각만 세울 것 같구먼. 헛수고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왕 이렇게 대화에 참여한 김에 그대의 이해를 위해서 몇 가지 개념을 설명하도록 하지. 사람에게는 영원한 자아, 즉 푸루샤Purusa가 있고 또한 물질인 프라크르티Prakrti가 있다네. 그런데 여기서 프라크르티는 특이한 것이야. 푸루샤를 제외한 세계의 모든 일체가 그 안에 내재되 있음이니. 이는 모든 가능성을 내포한 것으로 일컫어지네. 이 말은 그로부터 모든 것이 발전되어 나오는 것을 말하며, 이윽고 결과가 원인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이지. 모든 질료적인 것의 원인이라고 들 수 있겠지. 방금 전 아르주나가 이야기하면서 특별히 진실된 자아와 육체를 구별하면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행위를 하면서 체념한다’ 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네. 그대의 모든 물질적 행위는 그대의 물질적 자아가 하는 일이고, 그대의 진실된 자아는 행위에 개입하지 않으며 관조자로 남아야 된다는 이야기라네. 그렇다면 이런 물질적 자아와 진실된 자아는 어떻게 구별가능한가? 앞서 말한 저 두 가지 개념 푸루샤와 프라크르티에 대한 흔들림 없는 지식으로 가능한 것이지. 이것이 앞서 그대가 말했던 세 가지 요가 중 지혜의 요가이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사랑의 요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아까부터 계속 말해왔지만 그대가 귀를 막아버린 다른 한 방법으로 가능하네. 신을 믿고 경배하는 것, 그대의 모든 행위가 신에게 바치는 헌신이 되는 것이며, 이로서 그대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불멸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는 까닭은 다르마를 따라 사는 이의 진실된 자아가 신에게 헌신하는 까닭이요, 행위를 관조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대가 카스트 제도의 실상을 말했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체념적 행위를 통하여 위로는 브라만부터 아래로는 수드라까지 모두가 나에게 이르는 길이 열린 것이라네.

 

 

[가연] (멍하니 크리슈나를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며) 아무래도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생각보다 말씀들이 너무 어려워져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현대 인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요즘 인도를 보면 꼭 영적인 편의점 같습니다. 제가 사는 나라의 어느 학자가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야기한 내용인데요, 우리가 보통 인도를 생각하면 신비로움과 이국적인 느낌을 먼저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국적인 느낌은 여러 창작물들을 통해서, 혹은 입소문을 통해서 재생산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인물들이 인도에 고생고생하며 찾아가서 구루들의 아쉬람에다가 돈을 바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말이지요.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책 ‘불온한 신화 읽기’ 에서도 마찬가지 지적을 합니다. 그들의 삶의 품격이 오를 것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이득을 뒤에서 챙기는 모습은 본래의 목적과는 상당히 멀어 보입니다만. 마하바라타와 같은 경전도 이렇게 쓰이는 경우도 종종 있을 수 있을 터인데, 사실 이럴 때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잘못이다, 라는 것이겠지만 혹시 이 외에 고견들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크리슈나] 사실 바가바드 기타가 쓰여 진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현대와 안 맞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지. 게다가 신성시되다보니깐 그 내용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이상하게 여기며 바라보게 되니 안 맞는 부분을 그대로 고집하게 될 테고 말이니.

 

[아르주나] 아까 말했지요, 정말 제가 이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이죠. 사실 이 마하바라타가 일종의 짜깁기일지도 모르지요. 그동안 전해 내려오던 저나 크리슈나님과 같은 분들의 자료를 모아서 말입니다. 당연히 일관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겠고.

 

 

[가연] 고견 감사합니다. 대화 도중 무례하게 말씀드린 게 있다면 용서해주시길, 하하. 많이 부족한 저를 인내를 가지고 상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 s. 톨스토이 단편선 '머슴 예멜리안과 빈 북' , '페르시아 신화',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이옥순), '지구별 여행자(류시화)', '인도철학사(길희성) : 특히 크리슈나가 말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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