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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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보편성을 추론할 수 있는 몇몇 클러스터(cluster), 예컨대 문화, 국가, 주권, 민족,가정 등 동질적이고 영속적이며 심원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클러스터들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파괴되거나 해체되어 그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는 현대의 이러한 특성을 '액체성'(liquid)으로 규정하고 있다.  바우만 교수가 말하는 '액체성'이란 우리 삶의 기준이 소멸하고, 국가기능 약화로 인해 시장의 장악력이 강해지는 일련의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던 국가 장치가 축소되고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는 결과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소비시장의 중심에서 언저리로 내몰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각과 그 대안을 모색하는 지표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한번에 끝나는 일년 정도 걸리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기획 없이, 그리고 내가 무엇을 논의하겠다는 논제에 대한 일람표도 만들지 않고 실험을 시작했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을 기록하고자 했고, 사건들이 부각되었다가 사라지는 발전 과정을 지켜보고자 했다. 그 사건들을 요약하고,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읽고 흐르는 ‘사물의 질서’에서 장소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처방이기도 한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라’는 말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 시대의 본성을 연역하는 것은 일 년 동안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 사소한 것에 남겨진 총체성의 성격이다. 때때로 참으로 사소하고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파편들일지라도….”

난파선의 작은 파편처럼 유동하는 액체의 세상에서 부유하는 현대인에게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현대의 모습을 44편의 편지로 옮긴다.  의미없이 제각각 떠도는 작은 파편에서 세계의 질서를 읽어내려는 노력의 산물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확대하는 일반화의 작업은 사회학자로서의 저자가 취할 수 있는 추상적 사유의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땅 위에 굳건히 선 농사꾼이 출렁이며 떠도는 뱃사람들을 바라보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나에게 또는 내가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살면서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조금은 낡은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에야 비로소 변화를 감지하듯이.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농사꾼인 동시에 어부인 셈이다.

 

"삶을 선택하는 일들에는 차근차근 읽고 하나하나 잘 따라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설명서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로마의 시인 루칸이 사랑에 관해 남긴 아주 기억할 만한 의견까지 동의하자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일처럼 운명에 인질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삶이란 정말 불쾌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무서운 것일까?  그럴 것이다.  더구나 틀림없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말 곤란한 문제는 살아가는 일에는 또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P.374)

 

나는 가끔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며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나는 절대적이고도 확고하게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의 경로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을 실감하고 생생히 기억하며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무 살 때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인생의 반을 허비한 지금의 시점에서도 그렇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지식이란 이성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말은 이 책에서도 유용하다.

 

"즉 교육은 표면에 드러나는 각양각색의  인간 경험 밑바탕에는 분명 불변하는 세계의 질서가 놓여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분명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들이 있다는 가정 또한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가정은 지식이란 분명 선생들로부터 학생들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으며 또 이런 방식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켰다.  또한 두 번째 가정은 선생들이 다음과 같은 자기 확신에 물들게 만들었다.  선생인 자신들은 반드시 자기의 학생들이나 피보호자들이 따라하고 모방하기를 바라는 본보기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만큼 타당성을 갖는 그러한 본보기다운 태도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는 확신 말이다."   (P.201)

 

 유동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영원하다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의 확신과 상반되는 어떤 실재를 현실에서 보게 될 때 그 고체성의 확신은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에 꽂힌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학과 같은 미련함을 버리지 못한다.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기는커녕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며 때로는 분노한다.  액체에 떠있는 고체는 쉽게 뒤집혀지고 떠밀리기 마련이다.  두 발을 뻗대고 힘을 쓸 수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힘만 낭비할 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할 것이며, 이 세계의 이상함과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던 카뮈의 확신을 믿기로 하자.

 

2012년에 우리는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선택을 했다.  어차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좋든 싫든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변화의 일면에는 언제나 불만과 실망이 섞이게 마련이고 부지불식 간에 그렇게 쌓인 실망과 불만이 예고도 없이 새로운 변화를 몰고올 것이라는 점이다.  작은 사건의 면면을 살펴 미래의 또는 현재의 큰 변화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 이 책은 그 바탕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상을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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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금융 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제윤경.이헌욱 지음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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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흥 또 못 알아 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홧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 먹을 수 있나…….』

사회란 무엇인가? 아내는 또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하였든 딴 나라에는 없고 조선에만 있는 요리집 이름이어니 한다.    -술 권하는 사회 中에서-

 

위에서 인용한 글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일부이다.  일제 강점기의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절망을 그린 이 작품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은 술을 강권하는 분위기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뭔 얘기냐고?  맞는 말이다.  다들 건강 염려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은 이제 더이상 술을 권하지 않는다.  권하여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어떤가?  빚 말이다.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요즘 사람들에게 빚을 권한다면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나는 주식투자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지인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야말로 주식의 주자도 모르는 주식 문외한이었다.  '적은 돈으로 그저 배워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투자했던 백오십만 원을 한달 반만에 모두 날렸다.  '경험삼아 한 일이니 그만 잊고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하자'는 마음도 있었으나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나 자신이 맥없이 당한 듯하여 그대로 물러나기에는 뭔가 개운치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서점에 들러 주식에 관한 책이라면 모조리 사서 읽었다.  새벽 2, 3시를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는 '제발 잠 좀 자라'며 핀잔아닌 핀잔을 퍼부었다.

 

근 반 년 정도를 그렇게 책만 읽었다.  그때 읽었던 주식 관련 서적만 해도 줄잡아 200권은 넘지 싶다.  그 후 나는 아내에게 주식투자를 다시 해보겠다며 당당하게 500만 원을 요구했다.  아내는 혀를 끌끌 차며 못 미더워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코 물러설 것 같지 않았던 나의 결심에 아내는 마지 못해 돈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주식투자의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원금을 돌려주고도 매달 일정액을 아내의 손에 쥐어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01년에 있었던 미국의 9.11테러와 그 여파가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강타했을 때 나는 주식투자를 그만두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천재지변과 같은 사건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아주 작은 징조라도 감지했어야 주식투자자의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은 조금 씁쓸했지만 미련은 남지 않았다.

 

내가 주식투자에 매달렸던 그 기간 동안 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었다.  소위 '고수'라는 사람들도 만났고, 가진 돈을 몽땅 잃고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도 만났었다.  그 중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군산에 살던 한 아줌마인데 남편 몰래 주식을 하다가 큰 돈을 잃고, 그것을 회복하려고 사채를 빌려 투자했으나 그마저도 다 잃고 돈을 갚을 길이 막막해진 그 분은 유서를 써 놓고 가출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들을 남겨둔 채 차마 죽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그 여인이 막다른 골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두 배, 세 배의 미수금을 제 돈처럼 투자할 수 있도록 배려(?)한 증권사의 꼼수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신용 사업자인 금융기관은 신용 소비자인 개인을 한순간에 채무노예로 만들 수 있다.  금융기법이 발달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금융기관은 대부분의 수익을 예대마진에서 취한다.  결국 어떠한 감언이설을 동원하여서라도 대출을 늘려야만 그들의 수익이 증가하는 구조인 셈이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과도한 돈을 대출하였다 한들 은행으로서는 손해볼 장사가 아니다.  채무 불이행의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빚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보다는 빚을 권하는 사회.  그 중심에는 언론과 국가도 예외일 수 없다.  빚을 통한 레버리지(지렛대)효과를 강조하는 언론, 복지보다는 빚을 통하여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국가.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에게도 맘 놓고 기댈 수 없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소비자신용의 증가는 금융회사와 기업에는 크게 이익이 되지만 소비자에게는 상처뿐인 영광이다.  소비자신용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소비자의 파산증가로 이어진다.  따라서 소비자신용의 증가를 통해서 금융회사와 기업이 수익을 얻고 국가 경제가 성장하였다면 그로 인한 부담도 소비자만이 아니라 금융회사, 기업, 사회 전체가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소비자신용의 증가에 따른 이익은 금융회사, 기업, 국가 모두가 누리면서 그에 따른 손해는 소비자들만 부담하라고 하는 매우 이상한 논리가 판치고 있다."    (P.123)

 

이 책에서는 가계부채 1000조 시대를 살고 있는 가난한 서민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모순을 저자는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대출을 권장하고 그 놀음에 속아 평생 빚만 갚으며 살게 만드는 사회가 과연 제대로 된 사회인가?  우리 모두가 곰곰이 되짚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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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2013년!

어쩐지 서먹하고 낯선 이름이다.  매년 그랬다.  여름이 오기 전에 익숙해질 테지만 그때까지는 이 낯선 친구와 데면데면한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지난 해(年)가 툭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다.  익숙했던 것과의 이별은 매번 한줌의 회한과, 쓸쓸함과, 그리움과, 동경이 교차하며 뒤섞여 가벼운 혼란 속으로 빠트린다.  그럴 때마다 내게 질서를 부여하고 더이상의 방황을 막아주었던 것은 시간과 기다림이었다.  나는 오늘도 시간 속에서 기다리는 연습을 한다.

 

 

책 제목을 보았을 때 저자가 혹시 장 지오노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고, 가능성도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그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지난 20여 년 동안 100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한 사람의 인생이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간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심심한 일일까?  삶은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긴 시간의 고통과 지루함을 단 한방에 날려버릴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의 저자 리즈 머리의 삶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삶이 결코 무의미하다거나 시시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을 현실에서 목격함으로써 커다란 용기를 얻곤 한다.

 

 

 

 

 

 

 

여행 에세이,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성용의 『생활여행자』와『여행생활자』이다.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이나 <인도방랑>도 빼놓을 수 없다.  일상에 묶여 죽음처럼 짙은 음영 속에서 살면서 햇빛 찬란한 거리를 숨쉬고자 하는 욕구를 나는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서 대신하고 있다.  '언젠가'라는 미래형이 '영원히'가 될 수 있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한동안 여행 에세이를 읽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끌었나 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순간 떠오르는 것은

 

되르테 쉬퍼의 <내 생의 마지막 저녁식사>이다.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인 루프레히트 슈미트의 일상을 담은 책인데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눈물을 찔끔거리며 읽었던 기억은 또렷하다.  우리가 모든 가식과 위선을 떨쳐버리고 가장 순수하게 누군가를 대할 수 있는 시간은 때어날 때와 죽을 때 뿐이지 싶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둔 사람의 일상은 수채화저럼 담백하고 투명하다.  그 모습에 나는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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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다.

여러 행사가 겹치는 연말의 특수성도 그 까닭이려니와 무엇보다도 내 몸이 버텨주지 못한 원인이 더 크다 하겠다.  며칠 동안 심한 몸살을 앓았다.  만사가 귀찮고, 속이 메슥거려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하루 반나절 동안 곡기를 끊고 지내다 보니 기운은 점점 떨어져 급기야는 팔자에도 없는 링거를 맞기까지 했다.  살다보니 별 일을 다 겪는다.

 

그렇게 앓아 누웠다가 조금 나아져 슬슬 일을 시작하려니 벌써 2012년의 마지막 주일이란다!

세월 참 빠르다.  어제 밤에는 쏟아지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섰다.  눈이 소복이 쌓인 거리를 적당히 걸었다.  발 아래서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느낌이 좋았다.

 

기사를 보니 교수들이 뽑은 2013년의 새해 희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제구포신(除舊布新)이 선정됐다고 한다.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낸다는 의미의 이 사자성어는 노나라의 좌구명이 춘추를 해석하여 엮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용어로서 서울대 이종묵 교수님이 추천했단다.  이와 더불어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자는 뜻의 '원융회통'(圓融會通)과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 한다는 뜻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이 있었으나 대학교수 626명 중 30%의 지지를 받은 '제구포신'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제 단 하루만 남은 2012년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거세개탁'(擧世皆濁)을 뽑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지은 '어부사'에 실린 고사성어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 있기 어렵다는 뜻이다. 정권말이면 어김없이 불거지는 권력형 비리와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 그리고 대선 후보자들의 구호처럼 들리는 '비리척결!'  더구나 현 정권에서 보여졌던 사회 지도층의 비리는 극에 달한 느낌이었고, 대선을 치르면서 계층간, 새대간의 갈등이 한층 고조되었다.  새 정부의 해법을 기대하지도 않지만 더 심화시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제 다음주 화요일이면 2013년 계사년(癸巳年)의 새해가 밝는다.

지난 해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잊고 새해에는 나를 비롯한 모든 블로거님들의 가정에 행복만 가득하기를... 

 

 

 

 

 

어부사(漁父辭) - 굴원

 

屈原旣放(굴원기방) 游於江潭(유어강담) 行吟澤畔(행음택반)-굴원이 죄인으로 몰려 추방돼 시를 읊조리며 강가를 방황하는데

顔色樵悴(안색초췌) 形容枯槁(형용고고)-얼굴빛은 초췌하고 형색은 수척할세라

漁父見而問之曰(어부견이문지왈) 子非三閭大夫與(자비삼려대부여) 何故至於斯(하고지어사)-어부가 굴원에게 묻는다. “삼려대부가 아니오? 어찌하여 여기까지 왔는가?”

 

屈原曰(굴원왈) 擧世皆濁(거세개탁) 我獨淸(아독청) 衆人皆醉(중인개취) 我獨醒(아독성) 是以見放(시이견방)-굴원이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흐려 있는데 나 혼자 맑고 깨끗할 뿐 모두가 욕심에 취해있고, 나 혼자 이성이 밝고 청렴하므로 이를 죄로 몰아 이렇게 쫓겨 이 곳에 왔노라.”

 

漁父曰(어부왈) 聖人不凝滯於物(성인불응제어물) 而能與世推移(이능여세추이)-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얽매임 없이 꽉 막히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니

世人皆濁(세인개탁) 何不?其泥而揚其波(하불굴기니이양기파)-세상 사람들 모두가 흐려 악에 물들어 있다면 어찌 뻘속에 함께 있으며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며

衆人皆醉(중인개취) 何不飽其糟而?其?(하불포이조이철기리)-많은 사람들이 사리사욕에 취해 있다면 그 술 찌꺼기라도 먹고 그 박주(薄酒)라도 마시면서 세인과 더불어 살지 않고 혼자 모나게 하고

故深思高擧(하고심사고거) 自今放爲(자령방위)-어째서 깊이 생각하고 고상한 행동을 해 스스로 자신을 원지로 추방당하게 하는가.”

 

屈原曰(굴원왈) 吾聞之(오문지)-굴원이 말하기를 “내 듣자하니

 

新沐者必彈冠(신목자필탄관) 新浴者必振衣(신욕자필진의)-새로 머리를 씻은 이는 반듯이 관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이는 반듯이 옷을 털어 입는데

安能以身之察察(안능이신지찰찰) 受物之汶汶者乎(수물지문문자호)-어찌해 맑고 깨끗한 몸으로 저 더러움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寧赴湘流(영부상류) 葬於江魚之腹中(장어강어지복중) 安能以皓皓之白(안능이호호지백) 而蒙世俗之塵埃乎(이목세속지진애호)-차라리 상수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고 말지언정 결백한 몸에 어찌 세속의 더러움을 뒤집어 쓸 수 있겠는가.”

 

漁父莞爾而笑(어부완이이소)-어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호의를 표시하고,

鼓?而去乃歌曰(고설이거내가왈) 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뱃전을 두드리며 떠나면서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창락지수탁혜) 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遂去不復與言(수거불복여언)-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떠나 버리곤 다시 말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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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의 기세만큼이나 대선 후유증이 심각하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지난 대선에서 보았던 며칠 동안의 열병이나 가벼운 감기 수준의 패배의식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로 분출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정치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책임이 결코 적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21일 새벽 트위터에 "오랜만에 술 마시고 대취해서 울었다. 원래 술 마시면 꺼이꺼이 잘 운다"라고 적었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백모(27)씨는 "선거날부터 이틀째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속이 메슥거리고 입맛이 없다."고 호소했다.(서울신문 2012년 12월 22일자)

 

이것은 비단 온라인과 SNS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대선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건만 오프라인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지지했던 사람들을 기준으로 철저히 양분되고 있다.  대선 전에도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더라도 얼굴을 돌릴 정도로 반목하며 지내던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는데 대선 후에는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한 신경정신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자신이 당연히 믿었던 것, 반드시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거기서 오는 실망감 자체가 매우 컸을 것이다.  물론 집단적인 현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쉽게 내려진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작금의 상황은 예전처럼 쉽게 봉합되고 마무리될 상황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과거의 참여정부나 현 정부의 출범 초기에도 일시적인 대선 후유증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과는 표출되는 양상이 확연히 달랐었고,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결과에 승복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국민들 전체를 극단적으로 양분시켰고, 이러한 결과는 이념적 문제보다는 세대간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과 그 이하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적극적 배려와 희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기성세대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자신들의 밥그릇과 영달을 위해 청년들의 희망을 꺾은 셈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세대가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며 그 보답으로 지금의 청년 세대는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우리들을 돌볼 것이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좋다는 식의 우둔한 욕심은 기성세대의 자세가 아니었다.  한 치 앞을 헤아리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작태는 자라는 후손들에게 모범은커녕 불신과 분노만 심어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선거는 3포세대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넘어 자제력을 잃게 하는 분노의 단계로 발전시켰다.  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까?  그 원인은 이번 선거의 특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애초부터 이번 선거는 진보와 보수,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의 극단적 대결 양상을 띠었다.  예전의 대선에서 보였던 전략적 제휴(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는 일체 성립되지 않았고, 정치권은 안보와 평화, 동과 서, 노와 소, 남과 여, 성장과 분배 등 충돌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끌어들여 전쟁과 다름없는 대결의 장으로 만들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도층마저 어느 한 쪽 편에 설 것을 요구받았다.  정치권에서 조장한 이러한 대결 구조는 방송 매체에 의해 부풀려지고 격화시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년층이나 노년층 모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투표에 올인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는 수적 열세에 있는 젊은 층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그렇다면 다음 선거라고 이런 구도가 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다들 공감하겠지만 여당을 적극 지지했던 5,60대의 장년층이 5년 후라고 해서 급격하게 감소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무도 자명한 이 현실 앞에서 청년층이 그들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도 지금처럼 높은 투표 열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청년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예컨대 여당의 후보가 지금의 당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비록 패배했다고 할지라도 일시적인 감정으로 툭툭 털고 자신의 본업으로 되돌아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약이나 국정 운영 능력으로 검증받기보다는 방송과 조직력, 지역 기반을 등에 업고 겉껍데기 뿐인 허상의 이미지에 투표한 이번 선거는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은 듯 보인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 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여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헨리 죠지의 "진보와 빈곤, 187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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