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의 기세만큼이나 대선 후유증이 심각하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지만 지난 대선에서 보았던 며칠 동안의 열병이나 가벼운 감기 수준의 패배의식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로 분출되고 있다.  이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정치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책임이 결코 적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게 사실이다.  소설가 이외수씨는 21일 새벽 트위터에 "오랜만에 술 마시고 대취해서 울었다. 원래 술 마시면 꺼이꺼이 잘 운다"라고 적었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백모(27)씨는 "선거날부터 이틀째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 속이 메슥거리고 입맛이 없다."고 호소했다.(서울신문 2012년 12월 22일자)

 

이것은 비단 온라인과 SNS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대선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건만 오프라인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지지했던 사람들을 기준으로 철저히 양분되고 있다.  대선 전에도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더라도 얼굴을 돌릴 정도로 반목하며 지내던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는데 대선 후에는 노골적으로 외면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한 신경정신과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자신이 당연히 믿었던 것, 반드시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거기서 오는 실망감 자체가 매우 컸을 것이다.  물론 집단적인 현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쉽게 내려진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작금의 상황은 예전처럼 쉽게 봉합되고 마무리될 상황이 전혀 아니라고 본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과거의 참여정부나 현 정부의 출범 초기에도 일시적인 대선 후유증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과는 표출되는 양상이 확연히 달랐었고,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다.  결과에 승복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국민들 전체를 극단적으로 양분시켰고, 이러한 결과는 이념적 문제보다는 세대간 갈등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한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과 그 이하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적극적 배려와 희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보여준 기성세대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했다.  자신들의 밥그릇과 영달을 위해 청년들의 희망을 꺾은 셈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세대가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며 그 보답으로 지금의 청년 세대는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우리들을 돌볼 것이다.  당장 먹기는 곶감이 좋다는 식의 우둔한 욕심은 기성세대의 자세가 아니었다.  한 치 앞을 헤아리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작태는 자라는 후손들에게 모범은커녕 불신과 분노만 심어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선거는 3포세대로 대변되는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넘어 자제력을 잃게 하는 분노의 단계로 발전시켰다.  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까?  그 원인은 이번 선거의 특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애초부터 이번 선거는 진보와 보수,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의 극단적 대결 양상을 띠었다.  예전의 대선에서 보였던 전략적 제휴(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는 일체 성립되지 않았고, 정치권은 안보와 평화, 동과 서, 노와 소, 남과 여, 성장과 분배 등 충돌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끌어들여 전쟁과 다름없는 대결의 장으로 만들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도층마저 어느 한 쪽 편에 설 것을 요구받았다.  정치권에서 조장한 이러한 대결 구조는 방송 매체에 의해 부풀려지고 격화시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년층이나 노년층 모두 전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투표에 올인했다는 얘기다.  그 결과는 수적 열세에 있는 젊은 층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  그렇다면 다음 선거라고 이런 구도가 변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다들 공감하겠지만 여당을 적극 지지했던 5,60대의 장년층이 5년 후라고 해서 급격하게 감소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무도 자명한 이 현실 앞에서 청년층이 그들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있기나 한 걸까?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도 지금처럼 높은 투표 열기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내 생각에 청년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예컨대 여당의 후보가 지금의 당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비록 패배했다고 할지라도 일시적인 감정으로 툭툭 털고 자신의 본업으로 되돌아 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약이나 국정 운영 능력으로 검증받기보다는 방송과 조직력, 지역 기반을 등에 업고 겉껍데기 뿐인 허상의 이미지에 투표한 이번 선거는 쉽게 봉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젊은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은 듯 보인다.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도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 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이나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하는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도 받게 되는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여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기나긴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 상태로 전락한다.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급기야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 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으며 나라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헨리 죠지의 "진보와 빈곤, 187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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