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예보되어 있는 주일!

밖에는 수상한 바람이 '솨,솨' 소리를 내며 마른 잎을 훑고 지나간다.

이런 날은 알 수 없는 우울과 새삼스러운 추억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촉촉하게 젖어오곤 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모양도 정리되지 않은 우울이 얕은 빨랫줄에 걸려 있다.

그 위로 심술궂은 바람이 그 형태의 우울로 미이라를 만들려는 듯 잔혹하게 습기를 걷어낸다.

나는 고든 라이트후트(Gordon Lightfoot)의 "Second cup of coffee"를 듣고 있다.

 

I'm on my second cup of coffee and I still can't face the day
I'm thinking of the lady who got lost along the way
And if I don't stop this trembling hand from reaching for the phone
I'll be reachin' for the bottle, Lord, before this day is done
I'm on my second cup of coffee and I still can't face the day
The room was filled with laughs as we danced the night away
But my sleep was filled with dreaming of the wrongs that I had done
And the gentle sweet reminder of a daughter and a son

이런 노래를 들으면 슬픔은 언제나 물질로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즉, 보이지 않는 슬픔이 어딘가로부터 날아 와

먼저 내 얼굴의 가장 높은 부분인 코를 찡하고 달구면

전이된 슬픔은 코와 가장 가까운 눈물샘을 자극하고

눈에 보이지 않던 슬픔은 비로소 맑은 액체의 눈물로 체화한다. 

이런 과정은 열이나 전기의 전도현상과 흡사하다.

이렇게 보건데 슬픔을 어찌 상상 속의 개념이라고 단정할 수 있으랴. 

나는 슬픔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기로 했다.

 

탄생에서부터 수동적인 인간은

비록 그 행동의 8할이 수동성을 띤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가을의 시간 속으로

누군가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지 않으려 한다.

나는 슬픔이 짙게 깔린 가을의 시간을 향해

내 두 발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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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십서 1 : 손자병법, 오자병법 - 중국의 모든 지혜를 담은 10대 병법서
신동준 역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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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부터인지 뚜렷이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학 책을 즐겨 읽게 되었다.  학창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껏해야 "꿈의 해석" 정도를 읽어보았을 뿐,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말이다.  내가 심리학에 빠져든 것도 기실 2009년도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불어닥친 심리학 열풍에 나도 모르게 편승한 것이 주된 계기였지만 쉽게 사그라질 줄로만 알았던 심리학의 매력은 올해로 벌써 그럭저럭 3년이 되어가고 있다.  꺼질 듯하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잔불처럼 요즘도 나는 생각날 때마다 심리학 서적을 뒤적이곤 한다.

 

내가 읽었던 심리학 서적은 대학이나 연구목적을 위한 전공서적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벼운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어떤 전문적 깊이를 논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 독서도 아니었지만 심리학과 관련된 여러 영역으로 내 관심의 폭이 조금씩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가령 종교단체에서 주관하는 힐링 프로그램이나 템플 스테이, 또는 심리학 강의와 같은 색다른 것에 호기심이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귀차니즘의 전형인 내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든다.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듯한 새로운 느낌이다.  그럴 때마다 'Curiosity killed the cat.'이라는 속담이 생각나 두렵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가던 중 나는 우연찮게 병법서를 만났다.(인문학 열풍이 불었던 것도 한참 전인데 그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난 인문학 서적을 이제야 알아보다니!)  심리학 서적과 병법서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고 뜬금없이 병법서를 들먹이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 서적이 주로 다양한 인간 심리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식으로 다루는 데 반해 병법서는 인간 심리의 기저에 있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시시때때로 변하는 피상적 심리가 아닌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변의 심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의 심리를 다룬 책이 병법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작은 실수로 인해 백두난간 황천길로 떨어지고마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데 그 무엇보다 유용한 것은 상대의 심리가 아니었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일상에서의 피상적인 심리가 결코 아니다.  자신의 생명을 앞에 둔 자의 본원적 심리, 아프게 응시하고 있는 자기 내면의 심연,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는 원초적인 본성이 바로 그것이다.  병법서는 탈출구가 없는 천애절벽의 끝에서 만나는 인간의 절박함을 다룬다.

 

나는 병법서를 읽을 때마다 좀 더 겸손해지는 느낌이 든다.  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 내 속에도 약간의 비겁함과 비열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 우쭐할 것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 그런 여러 가지 상념이 오가곤 한다.

 

<무경십서>는 병법서의 집대성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손자병법>, 오자서의 <오자병법>, 사마양저의 <사마법>, 그 외에 <울료자>, <당리문대>, <육도>와 <삼략>을 "무경칠서"라 하고, 이에 더하여 <손빈병법>, <장원>, <삼십육계>를 더하여 "무경십서"라고 한다.  작가 신동준은 <손자병법>을 필두로 무경십서 전권을 다루고 있다.  병법서를 원문과 함께 해석하고 해설을 덧붙인 형식이다.  자칫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고전의 이미지를 불식시키 듯 현대적인 사례를 부록으로 첨부하여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제 겨우 그 제1권을 읽고 웬 호들갑이냐 싶겠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깊은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1권에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나온다.  심리학의 '심'자도 몰랐던 그 옛날에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혜안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적이 편히 쉬고 있으면 심리전 등으로 피로하게 만든다.  배불리 먹고 있으면 식량을 탈취하는 등 굶주리게 만든다.  안정된 곳에 영채를 세워 굳게 지키고 있으면 기습공격 등으로 동요하게 만든다."   (P.359)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그 옛날의 병법서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기본심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칼싸움이나 하던 원시시대의 전쟁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나의 마음과 적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결국 병법의 요체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도의 측면과 많이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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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때가 되면 어김없이 오고 또 가는 계절의 순환을 생각할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정해진 길을 쉼없이 반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휩싸이곤 한다.  그리고 우리네 인간도 저들처럼 누군가 몰래 정해놓은 길을 어김없이 걷고 있는 것일까?  오직 그 길을 걷는 우리만 모른 채, 하는 생각도 함께.  그렇다면 테잎을 갈아 끼우듯 죽음도 그처럼 쉽게 대면할 자신이 있을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담담하게.

 

요즘 나는 비록 잠깐이지만 매주 주말이면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의 즐거움을 심어줄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매주 만나서 아이들 각자에게 한 권의 책을 빌려주고 주제를 달리 하며 토론도 하고, 강의도 해보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은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돈을 받지 않고 진행하는 봉사 차원의 수업이라서인지 아이들은 특별한 사유도 없이 빠지는 것이 다반사였고, 그렇게 한두 번 빠지기 시작한 아이들은 결국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혈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기보다는 내 성의를 몰라주는 아이들이 야속했고, '이쯤에서 그만 둘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  그럼에도 결국 그만두지 못한 것은 매주 빠지지 않고 나오는 몇 안 되는 아이들의 정성과 열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논술을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전문 강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글쓰기를 전업으로 하는 작가도 아니었으니 내 강의를 듣는 아이들의 시큰둥한 반응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두어 달을 억지춘향으로 나갔나보다.  수업하는 나도 힘들고 듣는 아이들도 힘들어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대학시절의 낙서장을 읽던 중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짧은 소설이라도 쓰고 싶은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만 쥐어뜯었던 기억.  나는 그때 장난처럼 썼던 소설의 첫머리만 프린트하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다음에 이어질 적당한 이야기는 아이들의 상상력에 맡기기로 했다.  그렇다고 각자가 생각나는 대로 써보라고 하면 숙제가 될 터이니 나는 아이들로부터 대략의 스토리 라인만 듣고 그 이야기에 약간의 살을 붙여 그럴 듯하게 쓰는 일은 내가 하기로 했다.

 

방법은 이랬다.  아이들 각자가 상상한 이야기를 칠판에 적고 그 중 가장 개연성 있고, 흥미있어 보이는 스토리를 투표로 선정한다.  그 스토리를 바탕으로 일주일 내내 내가 글을 쓰고, 프린트를 하여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아이들은 그 글을 읽고 이어질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고, 또 발표하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그저 입으로만 했던 이야기들이 활자로 찍혀지고, 한 주 한 주 점차 소설의 형태를 갖추어 가는 것에 열광했다.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햇다.  그리고 창조의 기쁨과 성취욕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아이들이 이끌어가는 한 편의 소설은 그들이 읽었던 어느 소설을 모방한 것도 있고, 이치에 맞지 않는 비약을 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상황 자체를 차근차근 설명만 해줄 뿐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다.  어차피 젊음이란 사리나 이치가 아닌 동물적 감성으로 세상을 헤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시기가 아니던가.  나는 매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큼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게 진행하다 보니 이야기의 진척은 마냥 더딜 수밖에 없고, 그 결말이 궁금한 아이들은 조바심을 내지만 나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달쯤 전에 시작한 글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아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의 전부를 보여줄 수도 없고, 매주 어느 정도의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지만 지난 주까지 썼던 이야기를 조금만 옮겨본다.(참고로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실명을 썼다.)

 

‘크리스마스라고 달라질 게 있을까? 그렇게 며칠만 더 지나면 2009년도 조용히 잠들겠구나.’ 이런 생각이 때로는 사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그렇게 한 일 년쯤 보내면 멀쩡히 존재하던 기억들도 모두 어둠 저편으로 사라질 듯했다. 시간은 잊혀지고 중력은 반대로 작용했다. 미라는 지면으로부터 5cm쯤 떠서 유영하며 도시라는 거대한 세트의 엑스트라들을 구경하였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마음에도 한기가 불어닥치고 옷깃을 여며 봐도 차가움은 그대로 스며들었다. 스물넷의 그녀는 곧 사라지고 스물다섯의 낯선 그녀가 불쑥 찾아오겠지.

며칠째 눈도 내리지 않고 찬바람만 불었다.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 사무실 창문 밖으로 하얀 부스러기가 푸슬푸슬 떨어지더니 이내 지나는 행인들의 머리에 스티로폼 알갱이처럼 달라붙었다.

“잘 지내?”

미라는 흩어지는 눈발을 먼 발치에서 힘없이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응. 너는?”

“나도 그럭저럭.”

“나한테 화 많이 났었지?”

“화가 날 일이 뭐 있겠어? 전화도 하지 않고 찾아간 내가 잘못이지.”

미라의 자조 섞인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그날 엄마, 아빠가 갑자기 찾아와서 집으로 끌려갔었어.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라 너한테 전화할 생각도 못했어. 미안해.”

수진의 사과에도 미라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일상의 겉도는 말들이 눈 내리는 도시의 거리를 웅웅거리며 떠도는 듯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위에서 밝힌 방식의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줄곧 내 머리를 어지럽혔던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이 아이들로 하여금 현실과 점차 멀어지도록 부추긴다는 사실이었다.  초등학교 입학부터(어쩌면 유치원 시절부터인지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이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 학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젊은이들이 현실을 차근차근 제대로 배워야 할 시기에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산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하등 이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에서 제시한 50여 권의 작품과 작품 탄생에 얽힌 뒷얘기가 사실일지라도 작가에게 찾아온 우연한 영감과 작가의 천재적인 창조성만으로 작품은 탄생되지 않는다.  비록 그 작품의 시발점에서는 우연적 기회와 순간의 아이디어가 한 몫을 담당했겠지만 작가의 수많은 현실 경험과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가 읽고 있는 명작의 탄생은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명작을 선물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공부라는 틀에 갖혀 현실을 잊은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소설 쓰기'를 통하여 최소한의 현실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  창조의 기쁨은 크지만 그 씨앗은 언제나 현실의 토양에서 자라기에.

 

"어쩌면 이 이야기들도 문학적 허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 작가들의 창조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은 도처에 영감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도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란 한 순간에 사람의 두뇌를 압도하다가도 다음 순간에 까맣게 잊히곤 한다.  그러나 준비가 된 사람은 영감이 머리를 스치는 그 찰나의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그 순간을 붙잡을 수 있다."   <작가의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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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힘들더라도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

한 권을 골라 한편의 리뷰라도 써야지,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한곳으로 생각이

모아지지 않는다.

 

어제는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화창하게 개었다.

아파트 화단의 단풍나무가 유난히 곱다.

생명의 색깔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정처없다고 했던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순간에 고정된 생명의 색깔은

그 얼마나 곱고 영원한가!

 

요즘은 유명작가의 소설을 위주로 책을 읽었다.

소설에도 시대에 따른 유행이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그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조각들을 버리기가

아까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이를 먹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기록되지 않은 생각들은 뒤늦게 떠올리려 해도

도무지 의식의 이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스쳐 지나간 사물이나 집중하지 않고

읽었던 책들도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던

젊은 시절에 비하자면 나는 요즘 너무나 자주 깜박깜박한다.)

 

내가 정리, 비교할 작가는 알랭 드 보통, 밀란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신경숙이다.

어떤 문학적 소양도 없이 내가 그저 직관적으로 느낀

생각들이기에 다른 분들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비평가가 아닌 단순 독자이기에.) 

 

우리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매혹되는 까닭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을 사유하는 생각의 메커니즘을 간소화시켜준다는 데 있다.  즉, 우리는 사물을 보고, 그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추상적 개념으로 인지하고, 그와 관련된 파생적 사유로 확장하는 단계를 순서적으로 밟게 되는데, 밀란 쿤데라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두 단계로 축소시킨다.  사물을 보는 행위와 그에 상응하는 파생적 사유가 그것이다.  인지 단계를 건너뛰는 밀란 쿤데라의 서술 방식은 독자들에게 사물의 묘사를 적극적으로 피력하지 않고, 대신에 주인공의 심리적, 철학적 사유로 이를 대체한다.  이러한 방식은 사물과 내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아닌 감적적 일체감을 느끼도록 한다.  독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환경과의 완전한 일체감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느끼는 물아일체의 감정은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바닷가에서 이상한 노스탤지어에 잠겼던 몇 분 동안 그녀는 불쑥 죽은 그녀의 아기를 떠올렸고 행복의 파도가 그녀를 감쌌다. 머지않아 그녀는 이러한 감정에 스스로 경악하리라. 그러나 감정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그냥 그렇게 생겨나고 모든 검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나 한번 내뱉은 말에 대해선 자책할 수 있지만 감정에 대해선 그럴 수 없으니 우리는 감정에 대해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은 아들의 기억이 그녀를 행복으로 충만하게 했고 그녀는 단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해답은 명확했다.: 장-마르크 곁의 그녀 존재는 절대적이며 아들의 부재 덕분에 그녀가 절대적일 수 있음을 의마한다. 그녀는 아들이 죽어서 행복했다. 장-마르크와 마주 앉은 그녀는 큰 소리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의 반응이 어떨지 예측할 수 없었고 그가 그녀를 괴물 취급할까 봐 두려웠다.<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중에서>

 

신경숙의 소설은 다분히 시적이다.  그녀가 서술하는 방식은 극도의 리얼리즘, 사물을 눈 앞에서 보는 듯한 현장감, 또는 추상적 개념의 이미지화에 있다.  이러한 서술은 심상(image)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과 소설의 단절된 경계를 일시에 무너뜨리도록 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은 현실을 잊고 오로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한 경험은 힘든 현실을 잊고 소설 속으로 무작정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녀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독자를 끌어들이는 가독력에 있다.

 

너를 도시에 데려다주고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밤기차를 탔던 그때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네 나이와 같다는 것을 너는 아프게 깨달았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력은 독자들과의 거리두기에 있다.  나는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호객꾼이 없는 술집을 연상하곤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그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긴다는 듯한 그만의 방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작가를 개의치 않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교묘한 방식으로 독자들이 느끼는 의식의 물꼬를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에는 철저한 계산과 적절한 구성, 불필요한 문장의 배제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자신의 글을 수없이 고치고 다듬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흔이 되려 한다는 것, 그것도 내가 긴 여행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중에서>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서는 여러 편의 수필에 소설의 스토리 라인을 덧씌운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때로는 수필이 주(主)고 소설은 그저 단절될 수 있는 각각의 수필을 이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만 할 뿐이라고도 여겨진다.  그것은 자칫 소설로서의 매력을 상실케 하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서 보여지는 지적 풍자와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위트가 알랭의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녹아있기에 독자들은 결코 그의 책을 놓지 못한다.  

  

유혹을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렵다. 너무 빨리 넘어가면 헤퍼보일 수 있고, 너무 미적대면 상대가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엘리스는 자존심을 구길 위험을 무릎쓰고, 집에 가서 이야기나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다시는 못 만날 위험을 감수하면서 예의 바르게 작별 인사를 해야할까?
얌전빼는 태도와 모호한 태도에는 공통적으로 초조함이 배어있다. 머뭇거리면 상대의 관심을 잃을까봐 당장 잠자리로 가는데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 다음에 버려질까봐 두려워서 잠자리로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중에서>

 

나는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몇 권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는 줄창 소설만 읽어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소설은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 고유의 영역을 넘어 다른 장르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소설과 철학, 소설과 시, 소설과 수필 등 작가의 취향에 따라 그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구성과 문체에 집중하던 지난 날의 소설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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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깊은 무더위에서 청명한 더위만 골라 

한 두레박쯤 퍼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나른한 오후에 동면하는 의식이

진지한 일상을 저만큼 물러나게 하였을 때, 

싸늘한 사무실 한켠에 바람소리가 들릴 듯한

청명한 더위를 휘휘 풀고

깊은 오수에 잠기고 싶은 그런 날이다.

 

어제, 그제 이틀은 금방 눈이라도 올듯

쌀쌀하더니 오늘은 제법 푸근하다.

양지를 피해 그늘로만 숨어들던 시간이

엊그제인 것만 같은데

밖에서는 이제 손바닥 만한 볕이라도

아쉽게 느껴진다.

 

짐짓 무심한 일상이

과거를 향해 미끄러지듯 순항하는

금요일의 짧은 오후에도

계절에 실려가는 녹음(綠陰)의

순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우연한 석양이 노랗게 변해가는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한 주의

마지막 날을 힘겹게 밀어낼 때 나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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