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굳이 정치 이야기를 꺼내 드는 사람들의 성향은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되는 듯합니다. 자신의 이념이나 확고한 정치 철학에 기반하여 상대방을 끝까지 설득하겠다는 부류와 나와 상반되는 정치 철학을 가진 반대 진영의 사람들에게 최근 이슈가 되는 정치인의 부적절한 행위를 슬쩍 던져봄으로써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그에 상응하는 논리적 반격을 조목조목 열거하는 부류. 전자는 주로 나이 혹은 직책을 무기로 상대방의 의견은 일체 받아들이지 않는 막무가내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서열이든 직책이든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교양인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자보다는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동안의 대화나 행동으로 볼 때 상대방이 나와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대화의 분위기 상 어쩔 수 없이 정치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최대한 양보하고 배려하여 그들 진영 사람들의 잘못을 슬몃 던져보는 것입니다. 이것도 물론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최근에 보도된 뉴스를 곁다리로 삼아 조심스럽게 꺼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직 사회에서 정치 이야기는 주로 윗사람의 전유물인 경우가 다반사이지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랫사람은 그저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들으련다.' 하는 태도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히 듣고만 있게 됩니다. 무척이나 따분하고 지루한 시간이 아닐 수 없지요. 물론 윗사람과 정치 성향이 같은 경우라면 신이 나서 동조하거나 한발 더 나아감으로써 점수를 따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최근 이슈가 되는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자신의 정치 성향을 교묘하게 덧씌우는지요. 예컨대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이것이 마치 현 정권에서 비롯된 부정부패의 전형인 양 비판하며 열을 올리고,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이보다 더한 투기가 보수정권 하에서도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성행되던 것인데 이제서야 겨우 드러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겠지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부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자에 대한 부러움이 지나치면 시기와 질시, 편견과 배척의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을 부추겼던 건 아마도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와 패거리 정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서로의 잘못을 눈감아주고,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의 부패는 오히려 관대하게 처벌하는 사례가 반복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사회 전체의 불신만 가중시켜 왔던 것이지요.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는데 남이 사는 땅은 오죽이나 배가 아프겠습니까. 그러니 그런 비리를 제보할 수밖에요. 과거에도 배가 아픈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겠지만 이런 비리를 말할 수 없었던 건 공익 제보를 한 사람이 오히려 징역을 사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힘은 그만큼 무서웠고 서민들은 끽소리도 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았던 것이지요.

 

배가 아픈 사람이 땅을 산 사촌을 사회에 고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정점에 와 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민들의 민주적 성숙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이지요. 나를 고발할 사촌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어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혹여라도 있다면 그들이 배가 아프지 않도록 베풀며 사세요. 누가 그러더군요.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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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1-03-1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함은 우익인데 사상은 좌익이었던 분이죠 ^^

꼼쥐 2021-03-12 17:1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고인이 되신 전우익 작가.
이따금 그분이 그립습니다.

잉크냄새 2021-03-1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라고도 하시더군요.

꼼쥐 2021-03-12 17:22   좋아요 0 | URL
담배꽁초를 문 전우익 작가의 얼굴 표지가 인상적이었죠.
 
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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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보았던 어느 방송사의 뉴스 한 토막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뉴스의 내용인 즉,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할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사는 고등학생과 초등학생 형제가 있었는데, 어느 날 치킨이 먹고 싶다는 동생 손에 이끌려 치킨 골목을 찾았지만, 형이 가진 돈은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전부였고 그 돈으로는 어디에서도 치킨을 살 수 없었다고 했다. "치킨! 치킨!" 보채는 동생을 달랠 방법이 없었던 형은 그저 난처할 뿐이었는데, 그때 마침 이를 목격한 치킨집 사장님 한 분이 형제에게 선뜻 따뜻한 치킨을 대접했고, 고등학생 형은 1년이 지난 뒤에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여 꾹꾹 눌러쓴 손편지를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에 보냈단다. 사연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치킨집을 돈쭐('돈'과 '혼쭐'이 결합한 신조어) 내주겠다며 주문과 도움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였다.

 

서현숙 선생님이 쓴 <소년을 읽다>에도 이와 비슷한 대목이 나와 울컥 목이 메었었다. <소년을 읽다>는 저자가 소년원에서 1년 동안 국어수업을 하며 그곳의 학생이었던 소년들과 교감을 나누었던 경험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저자는 수업이 없는 어느 토요일 '멘토'의 자격으로 소년들의 면회를 갔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짜장면과 컵라면을 사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참석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인 근철이가 저자에게 정성스러운 편지를 쓴 것은 물론 너무 죄송스럽다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부탁을 했던 장면에서 나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뉴스의 한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근철이가 느낀 고마움 너머, 거기에 미안함이 있다. 어른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고마움에 미안함이 왜 찰떡처럼 들러붙어 있는지 말이다. 마음의 일이어서 그렇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마음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그렇다. 바다는 푸른 물결이 가득 차서 끊임없이 넘실거린다. 사람 안에는 마음이 가득하다. 마음은 단단하지 못한 채로 항시 흔들린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움으로 꽉 차서 넘실거린다."  (p.77)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나는 꽤나 오랫동안 읽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부로 구성된 책의 계절을 따라 나는 마치 저자와 함께 네 계절을 모두 모두 살아보기라도 할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읽어나갔던 것이다. 아이들 틈에 끼어 국어 수업을 함께 듣는 듯도 하였고,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쿵쿵 뛰는 것만 같았다. 잊고 있었던 오래 전의 기억들이 길을 잃은 빛나는 별이 되어 가슴속에서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시간에는 농도가 있다. 어떤 시간은 묽은 채로 주르르 흘러, 지나고 나면 아무 흔적이 없다. 어떤 시간은 기운이 깃들어 찐득하다. 그런 시간은 삶에 굵고 뜨거운 자국을, 원래의 모습과 달라진 흔적을 남긴다. 좀처럼 잊지 못하게 마련이다. 오늘을 통과한 아이들의 영혼에는 어떤 자국이, 흔적이 그려졌으려나. 아마 전과 다른 무늬가 아로새겨지지 않았을까. 내 마음에 들려왔다.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는 소리."  (p.36)

 

무거운 철장을 대여섯 번 통과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소년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품성과 험상궂은 외모의 아이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다들 추측한다. 저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소년들을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과자나 젤리를 먹고 싶어 하고, 걸그룹 스티커에 환호하는 평범한 소년들이었다. 저자는 책 읽기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에게 적은 분량의 책을 서로 돌아가며 읽어주는 수업을 진행하고, 그들이 읽었던 책의 작가를 초대하고, 그들이 맞이하는 작가를 진심으로 환대하는 체험을 통해 삶에서 필요한 관계를 배운다. 진실한 독자가 된다는 건 어쩌면 작가가 설정한 관계의 틀에 완벽히 공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한 작품의 좋은 독자가 되어간다.

 

"한 사람의 영혼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그곳, 지금 거기에 있을 소년에게 미안하다.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찾아가서 얼굴 내밀고, 글이나 몇 줄 읽다가 오는 국어 선생 주제에 엄살 피우는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나 역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p.167)

 

우리는 종종 겉으로 드러나는 몇몇 외부적이 요소를 통해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그런 비교가 마치 절대적인 가치인 양 확대 해석하며, 내가 적어도 너보다는 낫다는 암묵적인 비교우위에 기뻐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평가의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 학교 성적이 우수하다고 해도 그것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요, 스포츠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서열상 우위에 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인간의 다양한 기능 중 한 부분에서 재능이 있다는 것일 뿐.

 

나는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소년들의 변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성장기의 소년들이야 변화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는 까닭에 변화는 곧 일상이요, 달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쓴 서현숙 선생님이 아이들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른'의 변화란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소년들을 읽다'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한 명 한 명의 소년들을 읽음으로써 저자 스스로가 달라지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게 이 책에 대한 나의 솔직한 평이다.

 

책에 등장하는 소년들 각자의 사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마저 이해된다는 것은 아니다. 소년들은 저마다 '이런 곳이 아닌 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기성세대가 제공하는 환경과 소년들을 향한 애정 어린 관심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행을 베푼 어느 치킨집 사장님에게 '돈쭐을 내주겠다'는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처럼 말이다. 며칠 전에도 소주와 번개탄을 사간 손님의 극단적 선택을 막은 마트 주인의 미담에 시민들이 "돈쭐을 내주자"라며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살 만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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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멋진 경치를 보아도, 한껏 흥이 올라 기분이 좋아졌을 때에도 나도 모르게 '끝내준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끝내준다'는 말은 스스로 끝을 낸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내가 아닌 제삼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끝이 난다는 뜻이지요. 결국 우리의 삶도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종료된다는 점에서 '끝내주는' 것이지요. 사해 만물이 이렇듯 끝내주는 것 투성이입니다."

 

봄 날씨처럼 산뜻한 하루였습니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 한 분을 만나 함께 점심을 먹고,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들고 가까운 공원을 찾았습니다.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커피의 향취라니... 공원 벤치에 앉아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아버지뻘의 큰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나는 언제나 친구처럼 지내곤 했습니다. 몇 년 전 그분이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오전에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그분의 전화를 받고 앞뒤 재지 않은 채 흔쾌히 응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습니다.

 

첫 문장은 그분이 오늘 내게 들려준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끝이 존재한다는 건 아쉽고 슬퍼할 게 아니라 한껏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지요. 윤석열 씨가 검찰총장직을 그만둔 것도 무척이나 잘한 일인 듯합니다. 임기 내내 그분은 자신의 처와 장모, 측근의 비위를 감싸주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듯합니다. 자신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던 그분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렇지요. 그분은 타인에게는 충성하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온 힘을 다 바쳤던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둘러 표현하기를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는 입장문과 함께 총장직을 내려놓았지만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국민'이 곧 자신의 가족과 측근이라고 이해했습니다.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도 누군가의 공익 제보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고, 그들이 저질렀던 욕망의 실체도 서서히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말하자면 '끝내주는' 일이지요. 이렇듯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닌,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끝을 보게 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끝이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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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3-0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끝내준다‘가 새롭게 다가오네요!

꼼쥐 2021-03-06 20:10   좋아요 1 | URL
늘 쓰는 말인데도 뭔가 새롭죠? 저도 그랬습니다.
 
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나로 삽니다 - 15인의 여성 작가들이 말하는 특별한 마흔의 이야기
리 우드러프 외 지음, 린지 미드 엮음, 김현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중년이 되어 내가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배울 것들이 남아있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그 오랜 세월, 숱한 경험 뒤에도 여전히 변할 수 있는, 놀랄 수 있는, 그리고 삶이 나를 뜻밖의 곳으로 인도할 여지를 남겨둬야 하다니. 말하자면 석 달 동안 걸을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신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그 상황에 대처해나가는지, 그리고 그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쓸모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나가는지. 이미 그들이 충분히 쓸모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p.175)

 

인간의 기대수명을 80으로 본다면 마흔은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가 된다. 그래서인지 마흔이란 나이는 누구에게나 제법 특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누군가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 날 문득 40대의 나이가 된 자신을 발견했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이 구상했던 삶의 목표를 이루었으나 그 헛헛함에 방향을 잃을 수도 있고, 육아와 집안일에 치여 나이도 잊은 채 하루하루를 분주히 살아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흔은 삶의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일 수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마흔의 나이에 바라보는 자신의 꿈, 가족, 우정, 사랑, 자아, 일, 결혼, 아름다움, 시간의 흐름 등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15인의 여성 작가들이 말하는 특별한 마흔의 이야기, <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나로 삽니다>는 책을 읽는 독자에 따라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자신의 현재일 수도 있고, '그래, 그랬었지.' 하면서 추억할 수 있는 자신의 과거일 수도 있겠다.

 

"삶의 이 시점은 마치 긴 날숨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너무 지치고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 삶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할 일이 많은 것 같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십 대에 접어든 지금,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여전히 걱정이고 절대 다시 오지 않을 날들에 슬픔을 느낄지라도 우리는 지금 이대로를 감사하게 여길 거라 생각한다."  (p.16 '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15인의 여성 작가들이 인생의 반환점인 사십 대를 어떻게 겪고 있는지, 그들의 인생관은 어떻게 달라졌으며, 사랑과 우정, 가족을 바라보는 생각이나 관점은 어떤 변화를 보여왔는지, 시간의 대가로 얻은 지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상실과 죽음을 조금씩 체감하면서 다가올 미래는 또 어떻게 준비하고 맞을 것인지 등 각양각색의 주제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각각의 여성 작가들이 내세운 소제목만 보아도 재미있다. '사는 건 똑같은데 집세만 올랐지'를 쓴 메건 디움, '우리가 외모를 논할 때 나누는 이야기들'을 쓴 슬론 크로슬리, '나는 서른아홉에 배우가 됐다'를 쓴 질 카그맨,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사람들'의 줄리 클램, '해볼 건 다 해봤고, 이제 나로 삽니다'의 수진 림 등 각자가 하고픈 말은 다 다르지만 길다면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그들이 깨우쳤던 많은 이야기들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뭉클하게 만든다.

 

"이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사람들이 어른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이유는 진짜 힘이 들기 때문이다. 나이를 몇 살 먹었건 간에 정말 엄청난 일을 당하면 누군가가 달려와 나를 도와주길 바라게 된다."  (p.204)

 

오늘 오전에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치매 검사를 받을 엄마를 대학병원으로 모셔 가기 위해 휴가를 내고 시골에 와 있다는 전화였다. 코로나로 인해 일체의 외부 활동이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요즘 들어 부쩍 이상한 말을 한다는 거였다. 오전에 통화를 했었는데 그 사실을 깜빡하고 오후에 다시 전화를 거는 등 심상치 않다는 게 친구의 설명이었다. 나 역시 요양병원에 모신 엄마의 전화를 시도 때도 없이 받고 있는지라 자식 된 자의 불안감을 잘 알고 있었다. 동병상련의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의 전화에 괜스레 목이 메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불쌍해지는 거지." 했더니 친구 왈, "사는 게 고통이지." 하였다. 하루 종일 하늘이 어둡다. 비가 오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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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갛게 세수를 한 도시의 건물들과는 달리 하늘엔 여전히 먹장구름이 가득하다. 공기 중에 섞인 미세먼지가 어제의 비에 씻겨 맑아진 탓인지 하늘과 땅의 선명한 대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추적추적 내리던 삼일절 휴일의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그로 인해 비롯된 암청색의 우울이 하루를 넘겨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날씨에 따라 기분마저 널을 뛰는 걸 보면 나는 그저 나이만 먹었을 뿐 여전히 철들지 않은 어린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주말 휴일과 삼일절로 이어진 3일간의 연휴. 단지 3일 만에 만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유난스레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2월에서 3월로 달을 넘겨 만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가 내려 날씨가 조금 쌀쌀해지기는 했지만 볼에 닿는 바람은 이제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낄 만큼 부드러워졌다. 그런 봄기운 탓인지 사람들은 실없는 농담에도 까르르 웃음이 터지고, 이따금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순진한 장난기도 얼굴 가득 번진다.

 

연휴 동안 동해안으로 나들이를 갔던 행락 차량들의 고속도로 고립 뉴스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보태며 혀를 끌끌 찼다. 대설 예보가 내려졌었는데 차를 끌고 강원도를 간 것부터가 잘못이라며,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으니 눈길에 고립되어 고생을 한 것도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쌤통이라는 거였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평생 쓸모 있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소위 성직자라는 전광훈 씨와 같은 목사 나부랭이도 대통령을 향해 막말에 가까운 욕을 해대는 데 말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그가 믿는 하느님에게도, 그를 따르는 신도들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지만 시간만 나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던가. 하물며 일반인들이야 오죽하랴.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의 삶이란 본디 쓸데없는 짓의 비율이 7할은 넘도록 미리 설계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쓸데없다고 여겼던 철없는 행동들이 먼 훗날 더 오래 기억되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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