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는 매물로 나온 폐가 한 채를 보러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 있는 단독주택이지만 사람이 집을 비운 지는 채 1년이 되지 않아서 집은 비교적 멀쩡할 거라는 집주인의 얘기만 듣고 갔었는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고 보니 건물 주변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은 온통 잡초와 잡목으로 우거져 이곳이 과연 사람이 살던 곳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어떻게든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보려고 사람의 키 높이만큼 자란 잡초를 한 손으로 젖히자 숨어 있던 모기와 벌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몇 발자국 내딛지도 않았는데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어린 아카시아 나무의 가시와 억새풀 등 외부 침입자의 진입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보이는 잡초의 등등한 기세에 눌려 나는 그만 진입을 포기한 채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어기제가 존재한다는 걸 나는 처음으로 목도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드러내는 낯선 생명체에 대한 적의는 그 폐가의 마당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도 조용히 간직하고 있었던 듯 보였습니다.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겁도 없이 그들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려 했었고, 그곳의 생명체들은 단합하여 낯선 침입자의 진입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나는 순하고 여리게만 보았던 강아지풀도 그곳에서는 위협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노란 달맞이꽃의 대궁도 억세디 억센 잡목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논두렁이나 시골길에서 보았던 친숙한 존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식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예전에 같은 직장의 동료였던 한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문득 폐가의 여린 식물들이 내게 보였던 날 선 적의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책이었을 뿐이지만 낯선 이방인이었던 나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느껴졌습니다. 식물들도 그렇게 살고자 애쓴다는 걸 나는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습니다. 과거 한때 직장 동료였던 그분은 올해 초 내게 전화를 걸어 시간이 되면 언제 식사나 같이 하자는 말을 전했었습니다. 그리고 내내 연락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던 것입니다. 그분은 놀랍게도 자신이 지금 골육종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렸습니다. 허리가 아파 척추관 협착증 치료를 받으러 내원했다가 우연히 종양이 발견되었고,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암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전화를 하겠다고 해놓고 오랫동안 전화를 하지 못해 미안했다는 그분의 말에도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은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다음 주 월요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면서 몸이 좀 나아지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폐가에서 보았던 식물의 생명력, 그 날카로운 적의를 그분도 머릿속 깊이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인이 된 위지안 교수의 에세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가 머릿속에서 똬리를 틀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밥이나 먹자'는 그분의 말이 영원히 빈말로 남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그분 역시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