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성마른 성격을 타고 태어난 까닭도 있겠으나 나이가 들수록 몸의 반응이 한없이 느려지는 탓이다. 누구나 몸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앞설 수는 없겠지만 생각의 속도가 저 멀리 훌쩍 앞서간 탓에 전에 했던 생각을 몸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면 종국에는 생각과 몸이 따로 노는 사태가 벌어지곤 한다. 생각은 생각대로, 몸은 몸대로 각자가 갈 길을 간다는 건 한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생각과 몸의 속도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조금 서글퍼진다.


아침 산행길에 늘 마주치는 사람 중에는 키가 훤칠하고 인물도 좋은 할아버지 한 분이 있다. 그분의 성함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는 까닭에 나는 속으로 '멋쟁이 할아버지'로 부르고 있지만, 우리는 등산로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저 '안녕하세요?' 하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가벼운 목례를 나눌 뿐 어떠한 사적인 대화도 나눈 적이 없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할아버지는 한 손에 호두 두 알을 굴리며 꼿꼿한 자세로 걸으셨는데 올해부터는 이따금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셔서 내심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었다. 지팡이의 등장과 함께 할아버지의 시그니처였던 호두알도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해가 짧아진 탓에 내가 아침 산행에 나서는 5시 30분에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아 등산로의 구배와 숲의 형체만 겨우 가늠할 뿐 거미줄과 같은 세세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오늘처럼 먹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은 날에는 어둠의 농도는 더욱 짙어지게 마련, 늦잠에 빠진 사람들도 덩달아 늘어나곤 한다. 그 덕분에 호젓한 등산로를 홀로 독차지한 기분도 들었다. 산의 능선에 놓인 운동 기구 주변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 언제 오셨는지 '멋쟁이 할아버지'가 조용히 인사를 건네셨다. 그리고 내게 뛸 수 있을 때 많이 뛰라며 당신은 이제 근육이 약해져 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며 쓸쓸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안타까운 마음에 매일 운동을 하시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렇기야 하지만 노화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40년생이란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평행봉에 걸고 스트레칭을 할 정도로 유연하고 훌라후프를 십여 분 넘게 돌리기도 한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내게 사적인 대화를 길게 하셨던 것은 아마도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서로의 표정을 감출 수 있었던 어둠이 한몫했던 게 아닐까. 어둠이 깊을수록 밝아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 사소한 것들의 의미를 아주 작은 것인 양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던 게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보슬비 2025-09-02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랜만에 장에서 화초를 구입 했는데, 화초를 판매 하시는 사장님이 많이 나이 드셨구나를 느꼈어요. 약 10년정도 보아왔는데, 초기에는 괄괄하신 아저씨처럼 느꼈는데, 오늘은 할아버지 같아 기분이 이상했어요. 젊을 때 십 년과 나이들어서 십 년은 또 다르구나 생각했는데 꼼쥐님의 글을 읽으니 많이 공감되네요

꼼쥐 2025-09-03 16:28   좋아요 0 | URL
저도 매일 아침 등산로에서 뵙는 어르신이지만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신 모습에 저으기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꼿꼿한 모습 그대로 늙어가실 줄 알았거든요. 하긴 저도 이제는 슬슬 꾀가 나고 아침 운동을 거를 생각만 하는 걸 보면 나이가 들고 몸이 약해지는 걸 피할 수는 없나 봅니다. 누구도 말이죠.
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