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살이
애니 딜러드 지음, 이미선 옮김 / 공존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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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유명 작가를 제외하면 '작가'라는 직업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사실이 그렇다기보다 나의 인식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와 같은 인식의 출발점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졌을까 몰라도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작가는 밥 빌어먹기도 힘들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다. 그런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듣고 자랐던 나는 '작가'라는 직업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 공포에 가까운 거부반응을 갖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게다가 집안 형편마저 팍팍했던 나로서는 직업 선택 목록에도 오르지 않은 '작가'를 평생 직업으로 갖게 된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누군가의 명함에 '작가'라는 두 글자가 이름 앞에 놓일라치면 '이 사람은 과연 제 때에 밥은 밥은 먹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한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설마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있었다. 2011년 30대 초반의 시나리오 작가였던 최 모 씨는 자신이 살았던 월세방 현관문에 '그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를 남긴 채 사망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지병이 있었고, 직접적인 사망 원인도 지병에 의한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와 같은 글귀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비정함은 충분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렇듯 작가는 되기도 어렵지만 평생 직업으로 선택하기에도 꽤나 어려운 직업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내에서는 말이다.


"글쓰기는 한 줄의 단어를 펼쳐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줄은 광부의 곡괭이이고 목각사의 끌이며 의사의 탐침이다. 글 쓰는 이가 휘두르는 대로 그 줄은 그에게 길을 파서 내준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땅에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것이 막다를 골목일까, 아니면 진짜 주제를 찾아낸 것일까? 그 답은 내일 나타날 수도 있고 내년 이맘때쯤 나타날 수도 있다."  (p.11)


미국 작가 애니 딜러드가 쓴 <작가살이(The writing life)>의 첫 대목은 그렇게 시작된다. 1장 '글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2장 '나는 어디에서 글을 쓰는가?', 3장 '누가 내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주는가?', 4장 '글 쓰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5장 '어떻게 나만의 글을 써낼 수 있을까?', 6장 '나의 글쓰기는 어떻게 흘러가는가?', 7장 '글의 영감은 어디서 오는가?'의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장의 소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용 자체는 무척이나 평이하고 쉽게 쓰인 듯 여겨지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독자는 여러 생각할 거리가 넘치는 까닭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책에 머무는 그 시간만큼은 꽤나 즐거울 거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세상이 아니라 문학을 공부한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그는 세상을 놓칠 수가 없다. 햄버거를 사거나 비행기를 타면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보고한다. 그는 자신이 읽을 책을 주의해서 선택한다. 결국은 그것이 그가 쓸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배울 것을 조심해서 선택한다. 결국은 그것이 자신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112)


직업으로서의 작가가 되는 길이 예전보다 넓어진 게 사실이다. 일인 출판이 늘고,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책으로 내놓고 있다. 말하자면 유입되는 작가의 수가 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책에 대한 수요는 나날이 감소한다. 전에도 그랬지만 출판계는 그야말로 지독한 레드오션으로 변해가는 셈이다. 이런 마당에 작가를 꿈꾼다는 건 자살 행위와 진배없다. 물려받을 유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럼에도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더러 있다. 우리는 그들의 용기 덕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문화강국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을 누릴 수 있고, 작금의 혼란을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재미있고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을 수도 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현실일 터,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글 쓰는 것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매번 즉시 그것을 모두 써 버리고, 뿜어내고, 이용하고, 없애 버리라. 책의 나중 부분이나 다른 책을 위해 좋아 보이는 것을 남겨두지 말라. 나중에 더 좋은 곳을 위해 뭔가를 남겨두려는 충동은 그것을 지금 다 써먹으라는 신호이다. 나중에는 더 많은 것이, 더 좋은 것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들은 샘물처럼 뒤에서부터, 아래로부터 가득 차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려는 충동은 수치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일이기도 하다 아낌없이 공짜로 푹푹 나눠주지 않으면 결국 본인에게도 손해이다."  (p.129)


'작가'가 되겠노라 호언장담하는 이를 나는 존경한다. 그들의 용기를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일개 무명의 독자로서 고통 속에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고통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가감 없이 생생하게 전달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작가'를 꿈꾸는 당신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구비한 셈이다. 나는 기꺼이 당신의 독자가 될 것임을 약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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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던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제47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지지율 20%를 밑도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와 기자회견도 있었다. 겨울 모드로 변한 날씨의 변화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굵직굵직한 뉴스 때문인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으로 들떴던 문학계의 열기는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2024년 한 해도 저물고 있다.


군에 입대한 아들이 휴가를 나왔었고, 남자들에게 첫 휴가가 늘 그렇듯 집에서 잔 날보다 친구 혹은 선배의 자취방에서 자고 들어오겠다는 연락을 몇 번인가 받았고, 취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명태에 붙은 균의 소식이 서결이와 거니의 소식보다 더 빠르게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들 말을 잊은 채 혀만 끌끌 찼고, 한 나라가 이렇게도 망할 수 있구나, 하는 탄식이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다.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바닷가의 루시>를 읽고 있다. 나는 이미 작가의 소설 몇 권을 읽어보았는데,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 들곤 했다. 내가 속한 현실과 유리되어 작가가 꾸며 놓은 조용한 세상에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은 책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들었던 것이다. 7살 소녀 앨리스가 토끼굴을 타고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도착하는 것처럼. 독자들이 스트라우트 소설에 매료되는 까닭은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속한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한 발 물러설 수 있다는 점.


"좋은 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훌륭한 생활은 하기 힘들다. 감각으로만 경험한 좋은 날들로 이루어진 삶은 충분하지 않다. 감각의 삶은 탐욕의 삶이다. 감각의 삶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반면에 영혼의 삶은 더 적은 것을 요구한다. 시간은 풍요롭고 그 흐름은 달콤하다.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하루를 좋은 날이라고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삶은 훌륭한 삶이다. 십 년, 이십 년 동안 과거의 다른 날과 거의 똑같은 날은 결코 좋은 날이 아니다."  (애니 딜러드의 '작가살이' 중에서)


주중에 잠시 쌀쌀했던 날이 있었지만 아름다운 가을 풍경이 동화처럼 이어지고 있다. 다음 주에는 수능일이 있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잔잔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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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김인자 지음 / 푸른영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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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를 읽는 게 여행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행에 대한 욕구나 갈망을 한 바구니 키울 뿐이다. 그렇다고 여행 에세이가 여행을 부추기는 광고 서적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따금 여행 에세이를 읽고, 풍선처럼 부푼 여행 욕구를 안은 채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지로부터 지금 막 돌아왔을 때의 노곤한 피로와 예상을 뛰어넘은 여행 경비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어느 여성 잡지의 연말 부록처럼 '이제 내가 여행을 또 떠나면 성을 갈겠다'는 여행 결별 선언이 짐을 정리하는 내내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긴장감을 날려버리기엔 파파야나 망고향기가 있는 국경도 멋지지 않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나는 그런 국경을 본 적이 없다. 하여 마음 속 국경에 사과나무를 심기로 했으니 훗날 나무가 자라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누구든 와서 따 드시라. 그리고 전해주시라. 지상 어딘가 사과나무가 있는 매우 멋진 국경이 있노라고. 그곳에 가면 당신은 그리운 이에게 사과나무가 있어 등지고 싶은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노라는 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  (p.141)


김인자 시인의 여행 에세이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은 어쩌면 작가의 여행 결산서와도 같은 책이다. 작가가 여행했던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그곳에서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주제로 쓴 것도 아닌, 여행자로 살았던 20년의 여행기록을 묶은 책이기 때문이다. 풍경보다 만났던 사람들의 인물사진을 우선순위에 두고 순수한 인간애를 책에 담으려 했다는 작가의 서문은 꽤나 인상적이어서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과정을 여행하는 초보 여행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나와 직업군이 다른 어느 개인이 아닌, 삶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 메이트'쯤으로 여겨질지도...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당도한 서쪽 바다, 밀항을 꿈꾼 건 아니었다 네비게이션을 무시한 채 달렸고 걸었다. 딴엔 죽음이 나를 앞지르거나 따라오지 못하도록 없는 지도를 만들고 숨은 길을 찾느라 몇 번인가 바퀴가 빠질 뻔했다. 죽음이 멀미처럼 아련해질 무렵 바람이 일러준 대로 작은 포구에 도착했고 울기 좋은 방 하나를 얻어 짐을 풀었다."  (p.330)


1부 '사하라 사막에서 히말라야까지', 2부 '트럭여행과 크루즈와 캠퍼밴', 3부 '삶과 죽음, 나로부터의 결별', 4부 '섬, 천년의 기다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차라리 한 줄 아름다운 '구도(求道)의 서(書)'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웅숭깊은 사색의 결과물이 결합되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내처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음으로써 독서를 갈무리하는 일반적인 독서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문장 앞에서 그 뜻과 의미를 오래 음미하다가 다시 책을 읽는 식으로 독서, 음미, 쉼, 독서, 음미 등 불규칙적인 독서를 이어갔다.


"욕망을 긍정한다고 타락이나 방종을 허락하는 건 아니지만 살면서 행복대신 일등이나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여행은 그런 나를 반성하게 했다. 고통과 시련은 집 밖을 그리워 한 죄의 대가로 달게 받겠다. 그리고 깊고 따스하고 흔들림 없는 영혼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좋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아니오'라고 말해준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p.364)


어제오늘 날씨가 초가을처럼 따사로웠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날씨처럼 밝았다. 그러나 우리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모르는 이의 불행이 우후죽순처럼 발발할 터, 우리가 그들의 눈물마저 닦아줄 수는 없겠지만 너무 티 나게 웃고 있지는 말자. 다만 언제, 어느 곳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나의 행복보다 너의 불행을 우선순위로 생각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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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좋았던 하루였다. 금방이라도 단풍이 들 것만 같은 투명한 바람이 햇살과 어울려 어울렁더울렁 춤을 추는, 혹은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햇살이 시간 가득 풀린... 지칠 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미끄러질 듯 맑은 하늘에 이따금 구름이 떠가고 어디선가 들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구름을 쫓아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한 채 대통령 탄핵 집회에 나갔던 하루이기도 했다. 화려한 가을볕이 이울고 마침내 저녁 어스름이 안개처럼 깔리는 시간. 사람들이 세상을 뜨는 까닭은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에 침묵을 남겨주기 위해서임을 나는 최근에 말 대신 차라리 한줄기 눈물을 택한 10.29 참사 유족들을 통해서 배웠다.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렇게 쉼 없이 내 곁을 떠나가는데 가슴 한켠 침묵의 공간은 왜 이다지도 넓어지지 않고 속절없이 지워지는가. 침묵은 인간 슬픔의 정점. 언어를 잃고, 울음을 잃은 사람들이 마침내 다다르는 슬픔의 설원. 그리하여 침묵은 어떤 울음보다 더 힘이 세다.


어둠을 향해 건네는 침묵의 시선은 무심하다. 무심하다 못해 때론 허허롭다. 현명함이란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의 길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삶의 영역에서 한 계단 더 내디뎠을 때나 발견할 수 있는, 찰나의 기쁨이 아닌가. 사이토 다카시의 저서 <내가 공부하는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현대인은 유난히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휴대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반면 공부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혼자서 몰입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닌, '충실한 고독'이라고 할까. 함께 공부를 할 동료를 만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혼자의 힘으로 가는 것이 공부다. 공부에 몰입하는 동안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배움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나만의 공부에 빠져들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반갑게 느껴진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불신임하고 있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 가을, 하야하기에 얼마나 좋은 시기인가. 본인을 위해서, 그리고 국민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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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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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사의 제목부터 혐오와 차별, 증오와 냉대의 마음이 가득했다. ''성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한국 교회'였다. 사실 이 기사를 미국에서 썼다면 당장 소송에 걸리는 것은 물론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신문사가 파산할 수도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이 기사를 4명의 기자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조악한 기사였다. 논리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 한마디로 읽을 만한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한국 개신교의 주창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신도들은 이들의 말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성장 배경에는 독재 권력과 족벌 자본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들 세력을 비호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목사들은 소득은 있지만 일반인들처럼 투명하게 세금을 납부하지도 않는,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 정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을 반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외국인과 성 소수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성 소수자를 성오염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염이라는 것은 '공기나 물, 환경 따위가 더러워지거나 해로운 물질에 물듦'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 소수자들도 자신의 몸에 붙은 어떤 더러운 물질을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다수인 이성애자로 바뀔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성 소수자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독히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획득되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정치적인 성향이다. 만약 작금의 상황에서 같은 논리로 소수자를 비하하고 차별하는 기사를 쓴다면 '정치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절대적 소수이기 때문에 '정치오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차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서론이 무척이나 길었다.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67번째 천산갑>을 읽는 독자 중 작가와 성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거나 이들을 혐오하는 독자라면 다소 언짢고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누나가 있는 대가족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작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쓴 이 소설은 어떤 장면에서는 성 소수자의 삶을 이해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때론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성애자인 일반인이 읽기에는 말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 냄새가 고약하다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치욕감이 뒤따랐다. 어떻게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변태들이나 그럴 수 있었다. 어떻게 엉덩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쳐 죽일 변태 놈들만 가능했다. 어떻게 엉덩이를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냄새가 고약하지 않은가? 인체의 숨결에는 수백 가지의 모습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 고약한 냄새는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심지어 사랑한다면, 고약한 냄새는 향기로 변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된다."  (p.389)


<67번째 천산갑>은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다. 우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그와 그녀로 존재할 뿐 특정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애자인 그와 이성애자인 그녀는 어린 시절 동반 출연한 영화가 4K로 복원돼 낭트 영화제에 초대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이 이채롭다.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동성 연인 J를 잃고 공허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대만에 사는 그녀는 유명 정치인의 아내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트로피 와이프'로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흔한 모습, 이를테면 원 오브 뎀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름이 밝혀지게 된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희귀 동물인 천산갑을 키워 그 비늘을 약재로 팔겠다는 생각으로 수십 마리의 천산갑을 산 위의 집에 들여놓았는데 이상하게도 천산갑들은 어린 '그'에게만 친밀감을 보였고, 이를 우연히 목격한 매트리스 광고 감독의 눈에 띄어 '그'는 '그녀'와 함께 천산갑이 등장하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게 된다. 낭트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그'와 '그녀'도 낭트에 갈 예정이었지만 '그'의 엄마와 동물을 잡으러 갔다가 그만 시간을 놓치고 만다. 수십 년 동안 헤어져서 지내던 두 사람. 동성 연인 J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영화제를 핑계로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 말 때문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말을 뱉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는 그의 몸을 가까이하면서 신호를 보냈었다. 그가 자신을 짜릿하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 시절 그녀는 정말 멍청이였다.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도 그때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게이미가 틀림없이 자기 아들을 짜릿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걸. 게이미에게 감사해야지."  (p.470)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아시아계 여성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성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같은 처지에 놓인 두 남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신선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권력과 자본에 결탁한 한국 개신교가 동성애자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혐오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무척이나 집요하기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옆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동성결혼 접수 거부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만 세계 질서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소설에서 두 사람이 낭트로 향하는 여정은 그나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는 듯 밝은 모습이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큰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인생은 정말 한 편의 곰팡이 핀 옛날 영화다. 필름에 스크래치가 너무 많아서 화면 전체에 비가 내린다. 내리려면 내리라지. 상관없었다. 그 어떤 기술도 없지만, 두 사람의 이 낡은 영화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p.474)


혐오는 혐오로만 남을 뿐 결코 사랑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지금은 큰소리를 칠지언정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떵떵거리던 보수 세력이 지역 정당으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임을 그들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예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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