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햇살이 따사로웠던 주말의 어느 봄날, 나와 친구들은 낡은 텐트를 둘러메고 산을 올라 양지바른 언덕의 묏등 잔디밭에 텐트를 쳤다. 강원도의 봄은 언제나 지축을 뒤흔들 듯한 바람과 함께 시작되는데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좁은 텐트 안에서 바람을 피하며 쏟아지는 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겠다 생각할 즈음 한두 살쯤 어린 동네 후배들이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하고는 뭐 하느냐며 다가왔고, 이런저런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무리 중 한 명이 라이터에 불을 붙여 마른 잔디를 태우기 시작했다. 쉽게 끌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작게 시작된 불장난은 바람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불길은 묘의 주변을 둘러싼 어린 소나무까지 옮겨 붙었다. 더럭 겁이 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쯤이었고, 누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다들 손에 솔가지를 꺾어 들거나 상의를 벗어 들고 번지는 들불을 끄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들불과 사투를 벌인 결과 간신히 불길을 잡긴 했으나 그곳에 있던 아이들의 몰골은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눈썹이 그슬린 것은 물론 숯검정이 묻어 가관이었다. '들불처럼 번지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그야말로 들풀처럼 번지고 있다. 어찌나 많은지 각각의 선언문을 일일이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선언문이 더러 있었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하여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경희대 시국선언문과 '어째서 사람이 이모양인가!'라는 질책으로 시작하여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말씀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니 방관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아무도 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매섭게 꾸짖어 사람의 본분을 회복시켜주는 사랑과 자비를 발휘하자는 것입니다.'로 끝을 맺고 있는 천주교 사제 1466인 시국선언문이었다. 물론 '당신은 더 이상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연세대의 시국선언문에도 눈길이 갔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의 시국선언문을 숫제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꼼꼼히 읽고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한 번 번진 들불은 끄기 어렵다. 타오르는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리 날고 저리 건너뛰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무서움을 잘 안다. 그러므로 들불은 발원 자체를 차단하는 게 최선이다. 그렇지 않다면 발화의 초창기에 사람들 모두가 합심하여 꺼야만 불길을 잡을 수 있다. 들불이 번져 숲으로 옮겨 붙었다면 그 피해는 장담하기 어려워진다.


엊그제 28일에는 대통령의 모교인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김건희 특검에 뜻을 모은 동료 시민들, 전국 각 대학의 동료 교수·연구자들과 함께 윤석열 정부의 조속한 퇴진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는 서울대 시국선언문. 이 정도 됐으면,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과하고 물러나는 게 순리이겠으나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는 당사자인 그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는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도 전혀 없는 철면피 무뢰배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부인을 사랑하는 사랑꾼임을 자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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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11-3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움을 아는 자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꼼쥐 2024-12-01 15:15   좋아요 0 | URL
문제는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지 않는 자를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점이죠. 국민 대다수의 고민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