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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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사의 제목부터 혐오와 차별, 증오와 냉대의 마음이 가득했다. ''성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한국 교회'였다. 사실 이 기사를 미국에서 썼다면 당장 소송에 걸리는 것은 물론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신문사가 파산할 수도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이 기사를 4명의 기자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조악한 기사였다. 논리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 한마디로 읽을 만한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한국 개신교의 주창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신도들은 이들의 말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성장 배경에는 독재 권력과 족벌 자본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들 세력을 비호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목사들은 소득은 있지만 일반인들처럼 투명하게 세금을 납부하지도 않는,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 정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을 반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외국인과 성 소수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성 소수자를 성오염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염이라는 것은 '공기나 물, 환경 따위가 더러워지거나 해로운 물질에 물듦'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 소수자들도 자신의 몸에 붙은 어떤 더러운 물질을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다수인 이성애자로 바뀔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성 소수자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독히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획득되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정치적인 성향이다. 만약 작금의 상황에서 같은 논리로 소수자를 비하하고 차별하는 기사를 쓴다면 '정치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절대적 소수이기 때문에 '정치오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차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서론이 무척이나 길었다.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67번째 천산갑>을 읽는 독자 중 작가와 성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거나 이들을 혐오하는 독자라면 다소 언짢고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누나가 있는 대가족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작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쓴 이 소설은 어떤 장면에서는 성 소수자의 삶을 이해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때론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성애자인 일반인이 읽기에는 말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 냄새가 고약하다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치욕감이 뒤따랐다. 어떻게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변태들이나 그럴 수 있었다. 어떻게 엉덩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쳐 죽일 변태 놈들만 가능했다. 어떻게 엉덩이를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냄새가 고약하지 않은가? 인체의 숨결에는 수백 가지의 모습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 고약한 냄새는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심지어 사랑한다면, 고약한 냄새는 향기로 변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된다."  (p.389)


<67번째 천산갑>은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다. 우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그와 그녀로 존재할 뿐 특정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애자인 그와 이성애자인 그녀는 어린 시절 동반 출연한 영화가 4K로 복원돼 낭트 영화제에 초대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이 이채롭다.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동성 연인 J를 잃고 공허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대만에 사는 그녀는 유명 정치인의 아내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트로피 와이프'로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흔한 모습, 이를테면 원 오브 뎀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름이 밝혀지게 된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희귀 동물인 천산갑을 키워 그 비늘을 약재로 팔겠다는 생각으로 수십 마리의 천산갑을 산 위의 집에 들여놓았는데 이상하게도 천산갑들은 어린 '그'에게만 친밀감을 보였고, 이를 우연히 목격한 매트리스 광고 감독의 눈에 띄어 '그'는 '그녀'와 함께 천산갑이 등장하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게 된다. 낭트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그'와 '그녀'도 낭트에 갈 예정이었지만 '그'의 엄마와 동물을 잡으러 갔다가 그만 시간을 놓치고 만다. 수십 년 동안 헤어져서 지내던 두 사람. 동성 연인 J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영화제를 핑계로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 말 때문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말을 뱉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는 그의 몸을 가까이하면서 신호를 보냈었다. 그가 자신을 짜릿하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 시절 그녀는 정말 멍청이였다.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도 그때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게이미가 틀림없이 자기 아들을 짜릿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걸. 게이미에게 감사해야지."  (p.470)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아시아계 여성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성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같은 처지에 놓인 두 남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신선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권력과 자본에 결탁한 한국 개신교가 동성애자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혐오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무척이나 집요하기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옆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동성결혼 접수 거부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만 세계 질서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소설에서 두 사람이 낭트로 향하는 여정은 그나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는 듯 밝은 모습이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큰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인생은 정말 한 편의 곰팡이 핀 옛날 영화다. 필름에 스크래치가 너무 많아서 화면 전체에 비가 내린다. 내리려면 내리라지. 상관없었다. 그 어떤 기술도 없지만, 두 사람의 이 낡은 영화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p.474)


혐오는 혐오로만 남을 뿐 결코 사랑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지금은 큰소리를 칠지언정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떵떵거리던 보수 세력이 지역 정당으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임을 그들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예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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