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김인자 지음 / 푸른영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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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를 읽는 게 여행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행에 대한 욕구나 갈망을 한 바구니 키울 뿐이다. 그렇다고 여행 에세이가 여행을 부추기는 광고 서적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따금 여행 에세이를 읽고, 풍선처럼 부푼 여행 욕구를 안은 채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지로부터 지금 막 돌아왔을 때의 노곤한 피로와 예상을 뛰어넘은 여행 경비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어느 여성 잡지의 연말 부록처럼 '이제 내가 여행을 또 떠나면 성을 갈겠다'는 여행 결별 선언이 짐을 정리하는 내내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긴장감을 날려버리기엔 파파야나 망고향기가 있는 국경도 멋지지 않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나는 그런 국경을 본 적이 없다. 하여 마음 속 국경에 사과나무를 심기로 했으니 훗날 나무가 자라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누구든 와서 따 드시라. 그리고 전해주시라. 지상 어딘가 사과나무가 있는 매우 멋진 국경이 있노라고. 그곳에 가면 당신은 그리운 이에게 사과나무가 있어 등지고 싶은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노라는 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  (p.141)


김인자 시인의 여행 에세이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은 어쩌면 작가의 여행 결산서와도 같은 책이다. 작가가 여행했던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그곳에서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주제로 쓴 것도 아닌, 여행자로 살았던 20년의 여행기록을 묶은 책이기 때문이다. 풍경보다 만났던 사람들의 인물사진을 우선순위에 두고 순수한 인간애를 책에 담으려 했다는 작가의 서문은 꽤나 인상적이어서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과정을 여행하는 초보 여행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나와 직업군이 다른 어느 개인이 아닌, 삶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 메이트'쯤으로 여겨질지도...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당도한 서쪽 바다, 밀항을 꿈꾼 건 아니었다 네비게이션을 무시한 채 달렸고 걸었다. 딴엔 죽음이 나를 앞지르거나 따라오지 못하도록 없는 지도를 만들고 숨은 길을 찾느라 몇 번인가 바퀴가 빠질 뻔했다. 죽음이 멀미처럼 아련해질 무렵 바람이 일러준 대로 작은 포구에 도착했고 울기 좋은 방 하나를 얻어 짐을 풀었다."  (p.330)


1부 '사하라 사막에서 히말라야까지', 2부 '트럭여행과 크루즈와 캠퍼밴', 3부 '삶과 죽음, 나로부터의 결별', 4부 '섬, 천년의 기다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차라리 한 줄 아름다운 '구도(求道)의 서(書)'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웅숭깊은 사색의 결과물이 결합되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내처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음으로써 독서를 갈무리하는 일반적인 독서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문장 앞에서 그 뜻과 의미를 오래 음미하다가 다시 책을 읽는 식으로 독서, 음미, 쉼, 독서, 음미 등 불규칙적인 독서를 이어갔다.


"욕망을 긍정한다고 타락이나 방종을 허락하는 건 아니지만 살면서 행복대신 일등이나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여행은 그런 나를 반성하게 했다. 고통과 시련은 집 밖을 그리워 한 죄의 대가로 달게 받겠다. 그리고 깊고 따스하고 흔들림 없는 영혼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좋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아니오'라고 말해준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p.364)


어제오늘 날씨가 초가을처럼 따사로웠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날씨처럼 밝았다. 그러나 우리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모르는 이의 불행이 우후죽순처럼 발발할 터, 우리가 그들의 눈물마저 닦아줄 수는 없겠지만 너무 티 나게 웃고 있지는 말자. 다만 언제, 어느 곳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나의 행복보다 너의 불행을 우선순위로 생각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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