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틈 사이로 싸늘한 냉기가 스며든다. 겨우내 난방이 너무 덥다며 불만을 쏟아내던 K 과장도 최근 며칠은 전혀 말이 없다. 간간이 눈이 내렸고 살을 에일 듯한 바람이 몰아쳤다. 추위에 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거리는 매우 한산했다. 텅 빈 거리를 제 세상인 양  찬바람만 휩쓸고 지나갔고, 나는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내다보다 으스스 몸을 떨었다. 한겨울에도 햇볕이 좋은 날에는 늘 습관처럼 거닐던 인근 공원도 지금은 눈에 덮여 살풍경한 느낌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먹이를 찾는 새들이 포릉포릉 날고 뼈만 앙상한 나무들이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그 흔한 이어폰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청력 손상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덕분인지 지금도 나는 내 또래의 사람들에 비해 청력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때가 더러 있다. 거리에서 혹은 사무실에서 타인의 전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는 경우, 닭살이 돋을 듯한 사랑의 밀어나 콧소리가 섞인 세 살배기 어린애 말투 등을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하는 것이다. 사랑 표현에 적극적인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 그 빈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그러니 유교보이로 자란 나로서는 목까지 차오르는 역겨움을 시시때때로 눌러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적인 전화를 소음공해라는 명목으로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참으로 난감하다. 그와 같은 고충이 있다 보니 남들처럼 상시로 이어폰을 사용함으로써 청력을 지금보다 낮추어야 하나? 하는 고민 같지 않은 고민을 하게도 된다.


김애란의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있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잘 몰랐었는데 그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김애란 작가가 글을 매우 잘 쓰는 작가 중 한 명이라는 것. 그리고 김애란 작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매우 공들여 쓰는 작가라는 사실. 작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랄까, 아무튼 갑자기 찾아온 기분 좋은 자극으로 인해 독서의 속도는 마냥 더디게 흘러간다.


"초여름 저녁 개수대 앞에 난 책받침만 한 창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총총 반짝였다. 다닥다닥 붙은 현대식 가옥 사이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십자가도 한둘 솟은 덕에 네모난 창틀 속 풍경은 그 자체로 고장 난 멜로디카드처럼 보였다. 하늘은 노랑이었다가 주황에서 보라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검푸르게 변했다. 나는 산 아래 밀집한 온갖 형태의 집들을 바라봤다. 각 건물은 반듯한 듯 삐뚤빼뚤한 윤곽을 드러냈는데 그 경계가 또렷해 가위로 오리면 하늘만 따로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문집의 일부만 옮겨봤는데 이처럼 정제되고 감각적인 표현들이 책의 끝까지 내내 이어진다. 물론 작가 역시 자신이 처음 쓴 글에 퇴고에 퇴고를 거쳐 최종 결과를 책으로 내놓은 것일 테지만 나는 작가의 책을 읽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녀가 작가 지망생 시절 겪었을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애틋한 마음으로 어림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길거리를 거닐며 훔쳐 들었던 어느 행인의 전화 내용처럼 가볍거나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타인의 몸짓이나 말투는 물론 자신을 스쳐가는 온갖 풍경들을 하나의 문장으로 붙잡기 위해 그녀가 들였을 땀과 노력에 괜스레 콧날이 시큰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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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2-07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꼼쥐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아요. 산문집의 문장을 읽으면서 그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한 땀과 노력이 느껴진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훌륭한 작가는 그 보다 더 대단한 안목을 지닌 독자로 부터 발견 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게도 좋은 자극이 되는 것 같아 감사 합니다. 뜻 깊은 주말 되세요!

꼼쥐 2025-02-08 12:43   좋아요 0 | URL
책을 여러 권 낸 작가라 할지라도 문장력이나 표현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감탄하였던 게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평범한 독자로서 작가를 평할 입장은 아니지만 김애란 작가의 솜씨는 새삼 놀랍게 다가온 게 사실입니다. 마힐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