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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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뜬구름 잡기식의 정의를 걷어내면 소설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소설가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깊이가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리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리학적 예의식이 강했던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예법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과감히 행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유교적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금의 유럽 사회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간다는 건 무리가 있을 터이다. 소설은 주로 시대에 반항하는 인물을 내세워 시대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시대와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인물을 창조하기는 어렵고 독자가 허용할 수 잇는 분명한 한계와 테두리가 주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소설 속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인생관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소설에는 작가가 자연인으로서 듣고 보고 겪은 모든 것들이 각색되어 펼쳐지고 초점 화자는 아무래도 작가 자신을 가장 많이 닮는다. 초점 화자를 의도적으로 적역으로 설정한다고 해도 결국 평자는 가장 작가와 닮아 보이는 인물을 찾아낸다. 그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어도 기어이 끌고 나온다. 나는 지금도 나와 가장 닮았다고 믿거나 내가 경멸하는 인간상을 뒤섞어 화자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쓴 산문이나 작가 노트나 심지어 비공개 SNS에 올린 게시물까지 포함해서, 누군가가 어떤 소설이 얼마나 자전적인 이야기인지 재단한다고 해도 그 역시 사실은 평자의 자유다. 작가의 자존심을 걸고 이런 모든 과정에서 개인인 내가 받는 상처 따위는 당연히 무시한다는 전제에서다."  (p.305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중에서)


1917년에 '의심의 소녀'로 문단에 데뷔하여 작품활동을 했던 김명순과 2009년 등단하여 지금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민정 작가는 두 사람 모두 소설가라는 점에서,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듯 보이지만 100여 년이라는 시대의 격차와 달라진 가치관과 상이한 성장 배경에 의해 그들이 쓴 소설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시리즈로 기획된 '소설, 잇다'의 다섯 번째 작품인 <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소설 세 편과 박민정의 소설 한 편과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방탕한 남편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여인의 딸과 그녀의 할아버지가 남편과 첩의 눈을 피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도는 모습을 그린 <의심의 소녀>,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젊은 이학자 효순을 사랑하게 된 소련은 미혼의 신여성이었으나 효순은 이미 은순이라는 처를 둔 유부남이었다. 둘 사이를 눈치챈 은순은 소련의 고모 류애덕 여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고모는 최병서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최병서의 학대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소련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지만 소련은 꿋꿋이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효순과의 영적 연애를 그리게 된다는 내용의 <돌아다볼 때>, 최 씨 가문의 네 남매인 순희, 순철, 상철, 금희를 중심으로 그 시대의 도발적이거나 비극적인 연애사를 다룬 <외로운 사람들>이 김명순의 작품이고, 친구 세윤의 죽음을 '나'의 시선으로 훑어보는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의 작품이다. 그리고 박민정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는 소설가로서 박민정 작가의 솔직한 시선이 담겨 있다.


"살아내려고 이혼을 선택한 세윤에게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자꾸만 불행이 갱신될 줄은 세윤도 나도 미처 몰랐다. 만약 내 충고대로 로사를 멀리했다거나, 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일도 어느새 지겨워졌다. 세윤은 로사가 괴롭히기 시작한 후에도 자기는 더는 어떤 실패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은 가정법원에서 나오는 길에 다른 여자를 차에 태우고 가는 전남편을 보고 우두커니 섰던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p.296 '천사가 날 대신해' 중에서)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시인이자 평론가, 언론인, 번역가 등 다양한 재주를 지닌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서 '첩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언뜻언뜻 가부장적인 결혼 풍습의 폐해가 그려지지만 그녀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공격을 당한 시대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비겁한 조리돌림은 과거에만 존재했던 시대의 산물은 아니었던가 보다. 박민정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세윤 역시 약자라는 이유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이혼을 한 세윤은 이미 '약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로사와 그 무리 속에서 어떠한 수모도 견딜 각오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리 속의 인간은 누군가의 상처를 살뜰히 보살필 만큼 선한 본성의 동물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세윤은 자신의 약점을 지우기 위해 더 철저히 비굴해지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필경 육신과 영혼을 양편으로 가진 사람들은 약함을 끝끝내 이기진 못하고 운명에게 틈을 엿보여서 나라를 깨트리기도 하고 경우를 잃기도 해서 동서에 울고 웃게 되며 남북에 헤매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르러 소련의 운명은 그 갈 곳을 확실히 작정했다."  (p.75 '돌아다볼 때' 중에서)


낮고 우울했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고 있다. 인생의 8할은 인간관계에 있는 것처럼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소설가로서의 성패가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잇다' 시리즈는 시대를 초월한 두 소설가의 만남인 동시에 한 세기를 비껴간 두 소설의 만남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100여 년 전 소설 속 주인공 소련과 현대의 주인공 세윤을 하나의 소설에서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재된 시간 속에서 옳고 그름이 뒤섞인 상상의 시공간 그 어디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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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도가 높아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기온이 높아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고온에 더하여 습도마저 높아지는 대한민국의 여름은 아무리 반복해도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본격적인 여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장마도 다 끝나고 한 줄기 바람마저 없는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스팔트 포장 위로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공포심이 문득 드는 것이다. 무더위에 지쳐가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어서 말매미는 목청을 높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일 울어대고, 털이 긴 반려견들도 에어컨 없이는 단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한 채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숨을 헐떡인다. 열대야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런 극한의 환경에서는 잠을 설치는 것도 예사, 퀭한 눈으로 출근을 하고 피곤에 절어 퇴근을 하는 일이 습관처럼 반복된다. 그렇게 힘겨운 여름을 보내다 보면 한 해가 다 지나간 느낌이 들게 마련이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매리언 울프의 대표작 <프루스트와 오징어(Proust and the Squid)>를 읽고 있다. 2009년 '책 읽는 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책이 원제를 살려 <프루스트와 오징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읽기 연구 분야의 고전으로, 전 세계 언론과 전문가들의 찬사를 받은 책'이라는 소개글도 있지만 디지털 문화로의 전환기에 있는 작금의 시대에 인류의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읽기의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언제라도 비가 쏟아져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날씨. 중동의 어느 나라에서는 성지순례에 나섰던 사람들 중 1000명 이상의 순례객이 폭염으로 숨졌다고 하는데, 올해 우리나라의 여름도 어떤 모습으로 지나갈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가까운 도서관에서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프루스트의 독서>를 빌렸다.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으로 피서를 나온 주민들이 빈 자리가 없이 도서관을 가득 메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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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다 - 인간의 코딩 오류, 경이로운 문명을 만들다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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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칠 때면 언제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책의 목차 부분을 꼼꼼히 읽는 편이다. 책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책을 읽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책의 목차는 저자가 독자들을 향해 '내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당신들을 설득하겠소'라고 하는 선언이자 책의 결론이나 주제를 향해 저자가 세운 일종의 이정표인 셈이다. 목차를 읽은 독자는 그것이 자신의 맘에 들지 않더라도 감수하고 읽어 내려가거나  애저녁에 포기하고 책을 덮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결론에 이르는 더 빠르고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그렇게 빙빙 돌아가는 것이요?'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양방향 소통 매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서 나는 인류의 역사를 깊이 파고들면서 문화와 사회와 문명에서 기본적인 인간성이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탐구할 것이다. 우리 유전학과 생화학, 해부학, 생리학, 심리학의 여러 가지 변화가 어떻게 표출되고, 어떤 결과와 영향을 미쳤을까(단지 중요한 단일 사건들에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중요한 상수와 장기적 추세에)?"  (p.15)


웨스트민스터대학 과학 커뮤니케이션 교수이자 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루이스 다트넬이 쓴 <인간이 되다(Being Human)>는 그가 다루는 주제나 논리의 전개 방식에서도 꽤나 매력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다트넬의 저서 <오리진>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이름만 듣고서도 책에 대한 호감도가 어느 정도 증가하겠지만 말이다. 책의 목차는 '머리말'에 이어 1장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 2장 '가족', 3장 '풍토병', 4장 '유행병', 5장 '인구', 6장 '마음을 변화시키는 물질', 7장 '코딩 오류', 8장 '인지 편향', 그리고 '끝맺는 말'과 '도판 출처' 및 '주석' '참고 문헌'에 이어 '감사의 말'로 끝을 맺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구성이다.


"진화는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행동을 촉진하는 일련의 내면적 추동을 발전시켰다. 배고픈 느낌이 강해지면 우리는 먹을 것을 찾고, 성욕과 오르가즘에 대한 기대는 우리에게 생식을 하도록 촉진한다. 진화는 또한 우리에게 집단생활에서 이득을 가져다주는 행동을 촉진하는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생물학적으로 부호화된 이 반응들(우리가 감정으로 지각하는)에는 가족과 친구를 향한 애정,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공감, 사기 행위에 대한 분노, 이타적 행동이나 정당한 처벌을 통해 얻는 만족감 등이 있다."  (p.55)


안타깝게도 나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샘플북만을 손에 쥐고 있다. 샘플북은 '머리말'과 1장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에서 끝이 난다. 말하자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머리말'과 인류가 문명을 형성할 수 있었던 내재적인 소프트웨어, 즉 인류 문명의 밑바탕이 되는 여러 가지 인간 본성을 설명하는 게 전부인 셈이다. 정작 내가 읽고 싶었던 부분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나는 사실 7장 '코딩 오류'와 8장 '인지 편향'의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읽었던 샘플북은 완결 편 <인간이 되다>를 읽고 싶은 마음을 더욱 감질나게 했을 뿐이다. 아쉬운 마음에 출판사에서 소개한 책의 '끝맺는 말' 중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인류의 역사는 종으로서 우리가 지닌 기능과 결함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펼쳐졌다. 하지만 우리는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의 무력한 노예가 아니다. 인류가 이룬 기술 진보는 우리가 자신의 자연적 능력을 높이고 증대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많은 생물학적 약점을 보완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펼친 노력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p.385 '끝맺는 말' 중에서)


어제는 국민들의 눈과 귀가 온통 국회 청문회장으로 쏠렸던 날이다. 채 해병의 죽음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 이들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외압을 가한 권력자와 국가 시스템에 대한 비리와 작동 오류를 밝혀내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1장에서 저자는 우리의 본성이 평화적인가 폭력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토머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를 등장시켜 설명하면서 '진실은 양자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짓는다. 청문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진실을 밝히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했던 사람들과 어떻게든 진실을 감추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었다. 인류의 진화는 무척이나 더디지만 언제나 공동체의 이익에 우선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나는 믿는다. 저자도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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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극단적인 정의일 수도 있겠지만 장서가로도 유명한 이동진 평론가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 자체를 일컬어 '돈을 내고 꼰대의 얘기를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 역시 일부 동의하는 바이다. 물론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젊은 직장인(혹은 취업 준비생)들이 읽는 책의 80~90%는 자기계발서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물론 개중에는 나이 든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만)은 왜 그렇게 자기계발서를 좋아할까?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의 책도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일까? 나는 이도 저도 아니라고 본다.


내 주변에도 갓 입사했거나 입사한 지 채 5년이 되지 않는 젊은 직장인들이 여럿 있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다른 이가 읽는 책에는 관심이 많은, '독서 관음증' 환자랄 수도 있는 나는 그들이 읽는 책을 볼 때마다 그들의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책의 제목이나 저자를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읽을 것도 아니면서 굳이. 그렇게 입수한 책에 대한 정보에 의하면 십중팔구 최근 유행하는 자기계발서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자기계발서에도 유행이 있어서 유행에 뒤떨어진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추천 도서 목록에도 오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한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크릿>과 같은 도서도 지금은 전국의 어떤 헌책방에서도 구매를 꺼리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의 젊은 직장인들이 자기계발서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목적 지향성 독서를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월급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남들 앞에서 절대 꿇리지 않는, 간지 쩌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자기계발서를 읽어댄다는 것이다. 결국은 간 때문이야가 아니라 결국은 돈 때문에 피곤에 지친 눈을 비벼가며 책을 읽는다는 것인데 올바른 지적이긴 하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조급함'이라는 슬픈 허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내가 조급함을 '슬픈 허방'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에도 한 번 비슷한 얘기를 쓴 적이 있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 계급이 더욱 단단하게 고착화되었거나 그렇게 진행되는 과정 중에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제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부정하지 않는다. 소위 '수저 계급론'은 그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코믹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허방 앞에 슬픈 이라는 관형사를 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현실 때문이다. 사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현실.


내가 생각하는 자기계발서는 자신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위로받거나 부정하는 데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무력감보다는 이것이라도 하고 있으니 앞으로 조금 나아질 수 있을 거야 하는 희망이 언제든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크게 없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깨달은 바를 한 권의 책에 요약본으로 실었을 때 어떤 천재가 그것을 저자처럼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인가. 말도 되지 않는다. 소설처럼 그렇게 두꺼운 책에 단 하나의 깨달음을 자세한 예시와 함께 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들이 아무런 삶의 예시도 없이 수없이 많은 깨달음을 한 줄 경구처럼 요약식으로 전달해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애초부터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젊은 직장인 대부분이 그와 같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미친 듯이 뛰어드는 게 주식과 코인 투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컬어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도전이 아니다. 도전이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주식이나 코인 투자에서 꾸준한 수익을 낸다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반면에 금수저로 태어난 이들은 머리를 싸매가면서 그런 골치 아픈 일에 매달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상속을 받은 재산에서 월급 이외의 꾸준한 부수입이 유입된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투자를 통한 손실을 보는 동안 그들은 오히려 원금이 꾸준히 불어나거나 적어도 투자를 통한 손실은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격차를 줄여보겠다고 노력했던(잠을 줄여가면서 자기계발서를 읽었던) 부류와 상속을 받고 별 노력도 하지 않은 부류의 격차는 점점 더 크게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무리한 투자를 하는 젊은 직장인들에게 원금을 잃지 않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하곤 한다. 꼰대의 이야기로 들리지나 않을까 늘 걱정하면서 말이다. 자기계발서를 읽느라, 주식이나 코인 투자를 하느라 삶을 허비하느니 차라리 베짱이처럼 삶을 즐기는 게 낫다. 그것이 오히려 격차를 줄이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웃기는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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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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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초반부를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책을 덮었다 다시 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내 유년 시절의 힘들었던 삶이 트라우마로 내재되었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 트라우마가 소설 속 주인공의 힘겨운 삶조차 가슴으로부터 완강히 밀어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인 빅토리아가 사고로 엄마와 이모, 다정했던 사촌 오빠를 잃고 무뚝뚝한 아빠와 말썽꾸러기 남동생,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이모부를 돌보며 복숭아 과수원의 수확기에는 농사일까지 도맡아야 했던 현실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열일곱 살의 빅토리아가 이방인이었던 인디언 소년 윌슨 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된 윌슨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다가 결국 동생 세스와 그 패거리에 의해 살해되고, 빅토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숲 속의 산막으로 숨어들게 되는 장면과 어렵사리 아들을 낳아 결국 굶주림에 지친 몸으로 야유회를 나온 젊은 부부의 차에 아들을 버리는 장면까지 읽어내는 데 진이 빠졌던 것이다.


"나는 윌이 저 깊은 산속 산막에서 포근한 누비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고 상상했다. 산막에 하나 있는 자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완벽한 살갗에 보드랍게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p.151)


소설의 초반부를 너무 힘들게 읽었던 탓인지 출산을 한 빅토리아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다시 마을로 돌아온 장면부터는 힘들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빅토리아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집을 나간 이후 대충의 사정을 파악한 아버지는 빅토리아를 찾아 사방을 찾아 헤맸고, 혹시나 세스 패거리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윌슨 문을 살해한 것이 세스와 그 일당이라는 사실을 보안관에게 알렸다. 결국 세스 패거리들은 마을을 떠났고, 휠체어를 타던 이모부마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가족은 오직 아버지 한 사람이었다. 산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빅토리아는 출산을 한 후 어렵게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잃은 후 빅토리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괴짜 노인이라며 늘 무시되고 천대를 받던 루비앨리스와 그녀의 반려 동물들을 돌보며 지낸다. 그러던 중 마을은 댐 건설 계획으로 인해 수몰지구로 변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인근 마을에까지 달콤한 육즙의 내시 복숭아로 이름이 났던 아버지의 과수원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결국 과수원을 팔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릴 수 있는 복숭아나무를 새로운 땅에 옮겨 심는다. 내시 복숭아의 명성은 그렇게 이어지는데...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p.416)


태어난 고장이었던 아이올라에서 파이오나로 이사를 온 빅토리아는 오직 복숭아나무만 돌보며 과수원을 살리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이처럼 젊은 여자가 일만 하는 모습을 이웃인 젤다는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고, 괜찮은 남자를 소개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과수원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 자녀가 없는 젤다 부부는 시간만 나면 여행을 떠났고, 늘 새로운 소식을 갖고 빅토리아의 집을 찾았다. 빅토리아는 아들과 헤어졌던 산속 공터의 바위 위, 젊은 부인이 자신에게 남겨주고 떠났던 커다란 복숭아가 있던 자리에 매년 돌멩이를 하나씩 올려놓았는데 어느 해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메모지를 발견하게 되고...


"윌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 조용히 있다가 한참 뒤 입술을 뗐다.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와 날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불안만 커지고 말았다. 그건 윌의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143)


1940년대부터 1970년대를 배경으로 극심했던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의 시대 상황을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온갖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의 고지에 오르는 전형적인 미국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인류 보편의 정의와 인류애, 가족의 정서와 사랑 등을 주제로 감동적인 서사를 이끌어간다. 12년간 집필해 셸리 리드의 데뷔작으로 선보였다는 이 소설은 34개국에서 출간되어 세계인의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따금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마치 우연처럼 발견하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 다른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일조차 힘겨워서 속으로 속으로만 감추었던 지난 일들이 돌덩이처럼 굳은 트라우마가 되어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을 배척하거나 멀리하게 되는 경험. 소설은 때로 깊이 감추어두었던 나를 불러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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