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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날 대신해 ㅣ 소설, 잇다 5
김명순.박민정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6월
평점 :
'소설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뜬구름 잡기식의 정의를 걷어내면 소설가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소설가에 대한 생각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가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설정하고 조율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고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깊이가 결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무리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리학적 예의식이 강했던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예법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과감히 행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유교적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작금의 유럽 사회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간다는 건 무리가 있을 터이다. 소설은 주로 시대에 반항하는 인물을 내세워 시대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시대와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인물을 창조하기는 어렵고 독자가 허용할 수 잇는 분명한 한계와 테두리가 주어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소설 속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인생관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소설에는 작가가 자연인으로서 듣고 보고 겪은 모든 것들이 각색되어 펼쳐지고 초점 화자는 아무래도 작가 자신을 가장 많이 닮는다. 초점 화자를 의도적으로 적역으로 설정한다고 해도 결국 평자는 가장 작가와 닮아 보이는 인물을 찾아낸다. 그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어도 기어이 끌고 나온다. 나는 지금도 나와 가장 닮았다고 믿거나 내가 경멸하는 인간상을 뒤섞어 화자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내가 쓴 산문이나 작가 노트나 심지어 비공개 SNS에 올린 게시물까지 포함해서, 누군가가 어떤 소설이 얼마나 자전적인 이야기인지 재단한다고 해도 그 역시 사실은 평자의 자유다. 작가의 자존심을 걸고 이런 모든 과정에서 개인인 내가 받는 상처 따위는 당연히 무시한다는 전제에서다." (p.305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중에서)
1917년에 '의심의 소녀'로 문단에 데뷔하여 작품활동을 했던 김명순과 2009년 등단하여 지금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민정 작가는 두 사람 모두 소설가라는 점에서, 여성 작가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듯 보이지만 100여 년이라는 시대의 격차와 달라진 가치관과 상이한 성장 배경에 의해 그들이 쓴 소설은 사뭇 다른 양상이다.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 함께 읽는 시리즈로 기획된 '소설, 잇다'의 다섯 번째 작품인 <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소설 세 편과 박민정의 소설 한 편과 한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방탕한 남편으로 인해 고생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여인의 딸과 그녀의 할아버지가 남편과 첩의 눈을 피해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떠도는 모습을 그린 <의심의 소녀>,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젊은 이학자 효순을 사랑하게 된 소련은 미혼의 신여성이었으나 효순은 이미 은순이라는 처를 둔 유부남이었다. 둘 사이를 눈치챈 은순은 소련의 고모 류애덕 여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고모는 최병서와의 결혼을 서두른다. 최병서의 학대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소련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지만 소련은 꿋꿋이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효순과의 영적 연애를 그리게 된다는 내용의 <돌아다볼 때>, 최 씨 가문의 네 남매인 순희, 순철, 상철, 금희를 중심으로 그 시대의 도발적이거나 비극적인 연애사를 다룬 <외로운 사람들>이 김명순의 작품이고, 친구 세윤의 죽음을 '나'의 시선으로 훑어보는 <천사가 날 대신해>는 박민정의 작품이다. 그리고 박민정의 에세이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는 소설가로서 박민정 작가의 솔직한 시선이 담겨 있다.
"살아내려고 이혼을 선택한 세윤에게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자꾸만 불행이 갱신될 줄은 세윤도 나도 미처 몰랐다. 만약 내 충고대로 로사를 멀리했다거나, 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일도 어느새 지겨워졌다. 세윤은 로사가 괴롭히기 시작한 후에도 자기는 더는 어떤 실패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은 가정법원에서 나오는 길에 다른 여자를 차에 태우고 가는 전남편을 보고 우두커니 섰던 자기가 이겨내지 못할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p.296 '천사가 날 대신해' 중에서)
김명순은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 시인이자 평론가, 언론인, 번역가 등 다양한 재주를 지닌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조선 사회에서 '첩의 딸'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언뜻언뜻 가부장적인 결혼 풍습의 폐해가 그려지지만 그녀 또한 아무런 잘못도 없이 공격을 당한 시대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비겁한 조리돌림은 과거에만 존재했던 시대의 산물은 아니었던가 보다. 박민정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세윤 역시 약자라는 이유로 스스로 삶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이혼을 한 세윤은 이미 '약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로사와 그 무리 속에서 어떠한 수모도 견딜 각오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리 속의 인간은 누군가의 상처를 살뜰히 보살필 만큼 선한 본성의 동물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세윤은 자신의 약점을 지우기 위해 더 철저히 비굴해지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필경 육신과 영혼을 양편으로 가진 사람들은 약함을 끝끝내 이기진 못하고 운명에게 틈을 엿보여서 나라를 깨트리기도 하고 경우를 잃기도 해서 동서에 울고 웃게 되며 남북에 헤매게 되는 것이다. 여기 이르러 소련의 운명은 그 갈 곳을 확실히 작정했다." (p.75 '돌아다볼 때' 중에서)
낮고 우울했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고 있다. 인생의 8할은 인간관계에 있는 것처럼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상호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소설가로서의 성패가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잇다' 시리즈는 시대를 초월한 두 소설가의 만남인 동시에 한 세기를 비껴간 두 소설의 만남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100여 년 전 소설 속 주인공 소련과 현대의 주인공 세윤을 하나의 소설에서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재된 시간 속에서 옳고 그름이 뒤섞인 상상의 시공간 그 어디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