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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평점 :
소설의 초반부를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책을 덮었다 다시 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내 유년 시절의 힘들었던 삶이 트라우마로 내재되었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 트라우마가 소설 속 주인공의 힘겨운 삶조차 가슴으로부터 완강히 밀어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인 빅토리아가 사고로 엄마와 이모, 다정했던 사촌 오빠를 잃고 무뚝뚝한 아빠와 말썽꾸러기 남동생,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이모부를 돌보며 복숭아 과수원의 수확기에는 농사일까지 도맡아야 했던 현실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열일곱 살의 빅토리아가 이방인이었던 인디언 소년 윌슨 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된 윌슨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다가 결국 동생 세스와 그 패거리에 의해 살해되고, 빅토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숲 속의 산막으로 숨어들게 되는 장면과 어렵사리 아들을 낳아 결국 굶주림에 지친 몸으로 야유회를 나온 젊은 부부의 차에 아들을 버리는 장면까지 읽어내는 데 진이 빠졌던 것이다.
"나는 윌이 저 깊은 산속 산막에서 포근한 누비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고 상상했다. 산막에 하나 있는 자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완벽한 살갗에 보드랍게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p.151)
소설의 초반부를 너무 힘들게 읽었던 탓인지 출산을 한 빅토리아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다시 마을로 돌아온 장면부터는 힘들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빅토리아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집을 나간 이후 대충의 사정을 파악한 아버지는 빅토리아를 찾아 사방을 찾아 헤맸고, 혹시나 세스 패거리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윌슨 문을 살해한 것이 세스와 그 일당이라는 사실을 보안관에게 알렸다. 결국 세스 패거리들은 마을을 떠났고, 휠체어를 타던 이모부마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가족은 오직 아버지 한 사람이었다. 산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빅토리아는 출산을 한 후 어렵게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잃은 후 빅토리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괴짜 노인이라며 늘 무시되고 천대를 받던 루비앨리스와 그녀의 반려 동물들을 돌보며 지낸다. 그러던 중 마을은 댐 건설 계획으로 인해 수몰지구로 변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인근 마을에까지 달콤한 육즙의 내시 복숭아로 이름이 났던 아버지의 과수원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결국 과수원을 팔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릴 수 있는 복숭아나무를 새로운 땅에 옮겨 심는다. 내시 복숭아의 명성은 그렇게 이어지는데...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p.416)
태어난 고장이었던 아이올라에서 파이오나로 이사를 온 빅토리아는 오직 복숭아나무만 돌보며 과수원을 살리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이처럼 젊은 여자가 일만 하는 모습을 이웃인 젤다는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고, 괜찮은 남자를 소개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과수원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 자녀가 없는 젤다 부부는 시간만 나면 여행을 떠났고, 늘 새로운 소식을 갖고 빅토리아의 집을 찾았다. 빅토리아는 아들과 헤어졌던 산속 공터의 바위 위, 젊은 부인이 자신에게 남겨주고 떠났던 커다란 복숭아가 있던 자리에 매년 돌멩이를 하나씩 올려놓았는데 어느 해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메모지를 발견하게 되고...
"윌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 조용히 있다가 한참 뒤 입술을 뗐다.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와 날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불안만 커지고 말았다. 그건 윌의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143)
1940년대부터 1970년대를 배경으로 극심했던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의 시대 상황을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온갖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의 고지에 오르는 전형적인 미국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인류 보편의 정의와 인류애, 가족의 정서와 사랑 등을 주제로 감동적인 서사를 이끌어간다. 12년간 집필해 셸리 리드의 데뷔작으로 선보였다는 이 소설은 34개국에서 출간되어 세계인의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따금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마치 우연처럼 발견하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 다른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일조차 힘겨워서 속으로 속으로만 감추었던 지난 일들이 돌덩이처럼 굳은 트라우마가 되어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을 배척하거나 멀리하게 되는 경험. 소설은 때로 깊이 감추어두었던 나를 불러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