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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별세 소식에 애도의 글을 쓴다는 건 좀 낯부끄러운 일이다.

나도 안다.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써야겠다 맘 먹은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별다른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거나 그의 콘서트에서 특별한 일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이른 나이에 맞는 갑작스러운 죽음은 누구에게나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한다. 뭐, 멋있게 보이고 싶다거나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짓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오해는 마시길.(오해는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내가 가수 신해철을 알게 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그가 모 방송국의 라디오 디제이를 맡았던 시기였다. 대중가요 가수라면 으레 '딴따라'로 비하되는 유교주의 잔재가 새끼손가락의 손톱만큼 남아 있던 시기에 그는 단연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실 그의 노래보다는 빼어난 언변에 먼저 매료되어 그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세련된 언어와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던 그의 말은 마치 말이 먼저이고 머릿속에서의 생각이 천천히 뒤따르는 것처럼 보일 만큼 달변이었다. 그의 거침없는 발언과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고 호불호로 분명히 갈렸던 게 사실이지만, 나는 그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가 맘에 들었다.

 

사실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소신을 밝히지 못하거나 자신의 소신과 베치되는 말로 어물쩡 넘어가는 것보다는 돌을 맞더라도 할 말은 하는 게 더 멋있어 보인다.( 한 100배쯤) 그의 생전 노무현 대통령 추모 공연에서도 자신은 가해자라며 그 때문에 영전에 담배 한 대 바치지도 못했고 조문도 못 했으며, 할 줄 아는 게 노래밖에 없어서 노래라도 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전히 '딴따라' 같은 연예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는 특별했고, '마왕'이나 '교주'로 불릴 만큼 당당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그를 좋아하는 많은 팬들을 슬픔에 젖게 했다.(물론 그 와중에 악플을 다는, 자신의 찌질함을 드러내는 일베스러운 짓거리를 하는 자들도 있다.)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고, 앞으로 그의 말과 노래들은 한 줄의 점선을 긋듯 띄엄띄엄 이어지다가 언젠가 점과 점 사이의 간격이 무한히 길어질 때가 되면 처음부터 여백이었던 듯, 빈 허공이었던 듯 잊혀질 것입니다. 박제가 된 그의 말들이 유리창 밖에서 소리도 없이 흔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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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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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과 다듬고 매만져 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매끈해진 소설 중 어느 쪽이 더 현실감있게 느껴지나요?  나는 어떤 작품을 읽든,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수필이든 '현실감'이라는 단어를 늘 생각하곤 합니다.  문학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때. 우리는 종종 현실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그린 작품이 더 현실감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착각이죠.  실상 현실을 조금만 섞고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듬어진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썽둥이처럼 닮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부끄러운 현실, 더럽고 추잡한 인간 군상, 그날이 그날 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누군가의 작품 속에서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이지요.  어쩌면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욕구가 투영된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소설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우리는 이따금 우리가 사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그닥 아름답지 못한 소설을 만나게 됩니다.  현실에서도 늘 보고 듣는 모습을 소설 속에서조차 또 마주한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닐 것입니다.  지겨운 생각마저 들겠지요.  그런 게 내가 사는 현실이 아니다 부정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약간의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즐겨 찾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나 리 차일드, 때로는 빌 브라이슨의 작품이 그것입니다.  감 잡으셨겠지만 오쿠다 히데오나 빌 브라이슨은 자신의 작품 속에 위트와 유머를 적절히 사용하는 작가이고 리 차일드는 한 편의 액션 영화를 보는 듯 박진감있고 스릴 넘치는 스토리 전개로 유명한 작가죠.  그들의 작품을 읽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일종의 기분전환용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이 이들 작가의 책에서 읽는 재미와 함께 생각할 거리도 제공받기 때문입니다.

 

오쿠다 히데오의 <꿈의 도시>는 작가 본인의 성향과는 배치되는 그런 작품입니다.  위트와 유머를 걷어낸, 간결한 스토리에 문학적 수사를 배제한, 오직 작중 인물들을 통하여 현실의 민낯을 보여주고자 시도하는, 다소 엉뚱하고도 지루한, 그러면서도 6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담은 소설입니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만 읽을까 몇 번이나 고민했습니다.  읽은 게 아까워서 그만둘 수 없었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3개 읍이 합병한 인구 12만의 지방 신도시 ‘유메노’시 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통합시라는 게 여간 문제가 많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통합시라며 거창하게 출발했던 창원시도 얼마 전 회의석상에서 시장이 계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까?  통합을 통하여 지역의 이익을 획득하려는 얄팍한 잇속을 버리고  통합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생활리듬을 유지하며 조용히 살았더라면 그런 불상사는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유메노'시는 시의 탄생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외부 인구의 유입과 상권의 변화, 그에 따른 범죄의 증가와 빈부 격차 등 긍정적 변화보다는 부정적 변화가 더 많아 보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나이, 직업, 주변 환경, 가치관 등이 전혀 다른 다섯 주인공의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가 펼쳐집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시청 생활보호과에서 생활보조비 수급 대상자를 상대로 일하는 공무원 아이하라 도모노리는 아내의 외도로 이혼을 한 후 현청으로 옮겨갈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적당히 보내는 인물입니다.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유메노를 떠나고 싶은 여고 2학년생 구보 후미에는 어느 날 갑자기 게임에 빠진 은둔형 외톨이에게 납치됩니다.  폭주족 출신으로, 노인들만 사는 집을 골라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주고 엄청난 돈을 받아 사기를 치는 세일즈맨 가토 유야는 선배가 벌인 살인 사건에 본의 아니게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소매치기를 잡아내는 보안 요원이자 이상한 종교에 빠져 있는 중년의 이혼녀 호리베 다에코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옵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큰 무대에 진출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는 유메노 시의원 야마모토 준이치는 그의 조력자로 친분이 있었던 야쿠자 조직에 의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됩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전체적인 스토리는 무의미한 듯 보입니다.  소설의 끝부분에 발생하는 고통사고에 대부분의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조금 황당해 보이구요.  작가는 소설의 구성이나 문학적 완성도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합니다.  작가는 오직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균형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의 문제점은 물론, 가정 폭력, 은둔형 외톨이, 사이비 신흥 종교, 정치권의 세습, 사기 세일즈,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 유부녀의 원조 교제 등 현대의 부조리한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을 뿐입니다.  후미에를 납치했던 노부히코는 학창시절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여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고, 게임 속의 가상현실을 사는 인물입니다.  자신이 당했던 폭력을 그의 부모에게 행사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한 말은 가슴이 아픕니다.

 

"학교라는 데는 공부 잘하는 놈 아니면 싸움 잘하는 깡패 같은 놈의 전용 놀이터야.  그 밖의 학생들에게는 교도소하고 전혀 다를 게 없어.  날마다 학교에 갇혀서 듣기도 싫은 수업을 듣는 게 무슨 얼어죽을 의무교육이야?  난 이 학교 진짜 죽도록 싫었어.  수학여행 때는 어땠는 줄 알아?  나를 깡패새끼들하고 한 팀에 몰아넣었지.  여행하는 사흘 내내 짐꾼 노릇만 했어.  애초에 수학여행 같은 거 가고 싶지도 않았어.  일주일 전부터 배탈이 났었다고.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느냔 말이야."    (p.590)

 

기분전환 삼아 자신있게 선택했던 책들도 간혹 원래의 목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책으로 귀결될 때가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의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라고 내가 굳게 믿었다가 낭패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죠.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낭패도 경험하면서 살게 마련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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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대한민국은 이제 국가 존립의 근거마저 상실했구나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더군요. 속에서 열불이 날까봐 나는 일부러 한동안 뉴스와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뉴스를 보니 지난 정권에서 자원외교와 4대강 사업이라는 미명 하에 천문학적인 혈세를 탕진하여 국고를 바닥내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겠다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부족한 국고를 메우기 위해 자동차세, 주민세 등 각종 세금을 인상하고, 그에 더하여 지하철 및 버스 요금 인상, 고속도로 통행료 인상, 상하수도 요금 인상 등 각종 공공요금을 인상하겠다고 하더군요.

 

세월호 사건과 판교 사고에서 보았듯 국민의 안전은 뒷전이고 오직 정권 재창출에만 혈안이 된 정부. 빚더미에 앉은 국민의 생활을 도외시한 세금 정책을 펴는 정부, 과연 이 나라가 국민을 위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지요. 국가의 존립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의 생명도, 국민의 재산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국민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대북 전단 살포에도 국가는 수수방관입니다. 다만 대통령의 체면에 손상이 가는 전단 살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체면은 국민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것을 위해 정부의 권력기관이 다 동원된 셈입니다. 국민 전체를 감시하고 사찰하는 데 검찰과 경찰이 동원되는가 하면 이를 비난하는 국민들은 종북, 빨갱이로 매도합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보다 더했을까요.

 

당신의 인내력은 어디까지인가요? 나의 인내력은 또 어디까지 일까요? 국민 모두에게 일일이 묻고 싶은 요즘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의 인내력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요. 보도를 걷는 행인의 축 처진 어깨를 볼 때마다 괜스레 눈물이 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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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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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는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가령 베스트셀러라거나, 추천도서라거나, 제목이 맘에 들었다거나, 한 작가를 유독 좋아한다거나, 누군가의 리뷰를 읽고 갑자기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거나 뭐 그런 것이겠지요.  나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책을 선택하는지라 내가 과연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기는 한건가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기준이나 원칙을 워낙 싫어해야지요.  나의 그런 성격이 독서에도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번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따금 나는 남들이 보면 까탈스런 성격이겠거니 오해할 정도로 책 선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이죠.  내가 생각해도 웃기는 일입니다.  나는 저자가 아닌 역자(譯者)가 누구냐에 따라 책을 고르기도 하고 미련없이 내던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한심지요?  그렇다고 내가 알고 있는 역자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윤기 작가와 김화영 작가가 고작입니다.  프랑스 문학은 김화영 작가가 번역한 책이라면 무조건 고르고, 영미권 문학은 이윤기 작가의 번역서를 고르곤 했습니다.

 

일종의 강박증과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번역가라면 적어도 작품을 보는 안목과 한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현지 언어에 능통하다고 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좋은 번역서를 내놓는다고 믿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읽게 된 책이 파트릭 모디아노가 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였습니다.  번역은 물론 김화영 작가가 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몇 년 뒤에 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리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역자의 이름에 김.화.영. 세 글자만 눈에 띄었을 뿐이니까요. 나는 모디아노가 노벨상을 받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작품의 첫 문장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p.7)

 

멋진 문장이지요?  프랑스 소설이 대개 그렇듯 열린 결말과 스토리 전개가 상당히 복잡하여 한 권을 읽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약간의 지루함을 견뎌야 하는 일이지만 저는 이 아름다운 문장에 매료되어 지루한 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모디아노는 소설의 곳곳에 멋진 문장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소설 속 이야기와 더불어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선물하고 있는 셈입니다.  프랑스어라고는 철자만 겨우 아는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물론 그 공이 순전히 좋은 번역 덕분이었지만 말입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퇴역 탐정입니다.  그의 곁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약간의 힌트라도 줄 만한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언진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지냈던 시간과 대면하게 되는 셈이지요.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한다."    (p.71)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모든 과거를 상실한 세대로 자란 모디아노는 이 책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어두운 기억의 거리를 헤매는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정을 밀도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새로 보태기도 하고 빠뜨리기도 하면서 자신을 구축한다.  우리의 삶이라는 건 읽은 지 오래된 소설처럼 기억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던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내가 나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온 기억의 총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p.241)

 

작중화자는 묻고 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요.  나이만 들었지 그동안의 기억, 그가 살아온 삶의 축적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얼마나 참담하고 막막할지 공감하게 됩니다. 

 

"오히려 나는 어떤 거리감을, 풍경에서 오는 어떤 정밀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 풍경 속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 몸짓과 우리들 생명의 메아리가, 우리들 주위의 성당 지붕 위에, 스케이트장과 묘지 위에, 골짜기를 뚫고 뻗은 긋고 있는 더 어두운 윤곽 위에 가벼운 송이로 떨어지는 저 솜 같은 눈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28~p.229)

 

과거에 내가 살았고,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장소이건만 기억 속에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작중화자의 모습에서 진한 슬픔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타자를 찾는 노력, 언젠가 우리도 그 길 위에 서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내 삶의 기억들이 하나둘 지워지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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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0-28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 하와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꿈꾸는 하와이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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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를 늘 헷갈리곤 한다.  애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름이 비슷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실 내가 아는 일본 여류 작가라야 손으로 꼽을 정도인지라 굳이 헷갈릴 일도 아닌데 두 사람만큼은 이 사람이 저 사람 같고 저 사람이 이사람 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하게도 그들은 태어난 해가 1964년으로 같다.  굳이 공통점을 만들자면 말이다.  물론 에쿠니 가오리가 약 4개월 언니이기는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를 읽으며 잠시 딴생각을 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열혈 팬은 아니지만 얼마 전에 <도토리 자매>에서 읽었던 한국에 대한 묘사는 웬만한 한국 작가의 그것보다 더 세밀하고 생생했다.  아무튼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직설적이면서도 통통 튀는 문체가 맘에 들었다.  한국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 느껴졌고.  실제로 그녀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그녀의 공식 트위터를 통해 "한국 독자 여러분께.  안타깝고 애절한 이번 사고 소식에 제 마음이 아픕니다.  실종자 가족분들 중에 제 독자분도 계신다고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책을 통해서 또 개인적으로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꿈꾸는 하와이>는 작가가 하와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국땅에서 보낸 달달한 여행담을 펼쳐 보이는 책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솔직 담백한 글이 함께 실은 사진과 잘 어우러지는 느낌이다.  와이키키, 사우스포인트, 카이마나힐라 등 하와이 명소에서 받은 그녀의 느낌과 이국땅에서의 신기한 체험들, 그리고 하와이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과 친구와의 우정.  훌라를 배우면서 실력이 늘지 않는 자신이 조금 약오르기도 했을 텐데 그녀의 생각은 조금 특별했다.

 

"역시 이 세상에 편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생은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톱인 장소에서는(그게 일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남편이든 아이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똑같이 힘은 들어도 보기에는 근사하니까.  똑같이 꾹꾹 참고,  할 말을 삼키고, 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그런 매일을 쌓아 간다."    (p.100~p.101)

 

작가의 초긍정적인 마음과 아이처럼 생생한 느낌은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낀다.  이런 느낌은 뭘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가볍게 데워지는 느낌.

 

"수많은 곳을 찾아다니고, 앞으로만 나아가고, 이게 끝나면 다음은 이거, 네, 맞아요.  그렇게 아무 미련 없이 말해 버려야지, 안 그러면 자기 인생을 실현할 수 없다고요.  그런 목소리를 싹 쓸어버리고 우리를 지금 이 시간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이 하와이의 바람, 영원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한없이 이어지는 해변, 한없이 밀려오는 파도.  나와는 인연이 없으니까,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언젠가 신혼여행으로 가지 뭐, 평생 한 번 정도의 추억으로 만들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만약 가고 싶다면 비행기 티켓을 사서 다음 날 아침에는 그 섬에 있어 보자.  정작 해 보면 의외로 간단한 일이다."    (p.160)

 

언젠가 나도 하와이 해변에 서서 요시모토 바나나를 생각하며 가볍게 미소짓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꿈꾸는 하와이>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생각하면서.  정말 모를 일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든 작가는 우리를 꿈꾸게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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