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새해가 밝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세월 참 빠르지요? 저도 지난 연말부터 지금껏 꽤나 바쁜 일정을 보낸 듯합니다. 그러나 2015년이 시작된 후 제가 체감하는 하루 하루는 굼벵이처럼 더디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명절이나 주말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니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몸이 바쁜 시간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한가해진 낮시간이나 늦은 밤 홀로 있을 때 시간은 그야말로 멈춰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체감하는 세월은 40대는 40km, 50대는 50km의 속도로 흐른다는데 저는 마치 없는 시간을 훔쳐오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하루가 느릿느릿 흐르던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느낍입니다.

 

부럽다구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만의 그 비밀스런 방법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세월이 천천히 흐르게 하는 비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중독이 될 만한 대상(담배, 술, 마약, 도박, 섹스 등) 하나를 콕 집어 고른다. 중독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2. 자신이 선택한 대상(예컨대 저는 담배를 선택했었죠)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가급적이면 십 년 이상의 중독 상태를 유지한다.

3. 어느 날 갑자기 중독 상태를 해제한다. 시시각각 자신의 중독성을 실감하며 꿋꿋이 참고 버틴다.

 

이해가 되나요? 2015년의 시작과 함께 금연을 한 저는 하루가 이토록 길다는 걸 처음 느꼈습니다. 눈을 뜨면서부터 시작되는 흡연의 욕구는 잠들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오죽하면 저는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날 요량으로 그토록 열심이던 아침운동도 그만둘까 생각했을까요. 저보다 먼저 금연을 실천했던 분들이라면 지금의 제 상태를 백번 이해하고도 남겠지요.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지요. "담배 끊는 게 제일 쉽다. 나는 100번도 넘게 끊었다. (Quitting smoking is the easiest thing. I’ve done it hundreds of times.) 그는 한때 그런 말도 했습니다. 건강이 나빠진 최후의 순간을 위해서 나쁜 습관 한두 가지를 갖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예컨대 그의 주장은 이런 뜻이었죠. 배가 가라앉을 때 바다에 버릴 짐이 있어야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는 것처럼 건강이 나빠졌을 때를 대비하여 건강에 해로운 어떤 습관(이를테면 흡연이나 음주, 마약 등)중에 무엇인가 버릴 게 있어야 자신의 건강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마크 트웨인의 일화 중에는 재미있는 게 많은데 그가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행동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 중의 80%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조금 썰렁한가요? 아무튼 그도 침대에 누워 있다가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 담배 생각이 날 만한 일은 가급적 삼가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거나, 커피를 마신다거나, 과식을 한다거나... 낮동안에도 아무 생각도 없이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금연한 지 고작 여드레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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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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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넘게 피워오던 담배를 2015년 1월 1일부로 과감히 끊었다. 이제 금연 사 일째. 아직은 성공이다 실패다 논할 단계가 아니지만 나는 금연에 도움을 주는 어떤 약물이나 보조제 없이 순전히 내 의지만으로 흡연 욕구를 억제하고 있다. 그 정도 유혹을 견디지 못한다면 금연 보조제의 도움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흡연 욕구는 생각보다 강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 몸을 지배했던 담배는 내 의지에 굴복하여 선선히 물러날 수 없다는 듯 수시로 나를 유혹 속에 빠져들게 한다. 가장 참기 힘든 시간은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다. 몇 년째 주말부부로 지내는 나는 숙소에서 홀로 보내는 평일 저녁의 고즈넉한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책에 빠져들거나, 이따금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거나, 베란다에 서서 달을 구경하거나, 또는 책을 빌리러 온 아이들과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일상적이지 않은 대화의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늦은 시각까지 그렇게 소일하다가 마지막에는 으레 담배 한 개비를 느긋하게 태우곤 하였다.

 

늦은밤에 피우는 담배는 금세 폐 깊숙이 스며들어 온 몸을 나른하게 만든다. 담배가 가져다준 적당한 피로 덕분에 나는 뒤척임 없이 이내 잠들곤 했었다. 그러나 담배를 끊고 나자 감당할 수 없는 헛헛한 느낌과, 밤이 늦도록 말똥말똥한 의식과, 하룻저녁에도 몇 번씩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미련한 짓거리가 나를 괴롭혔다. 마치 내가 수용소나 교도소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이다. 나는 종종 내 의지를 믿지 못하는 순간에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책을 읽는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충격에 휩싸인다. 같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굶주리고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인간이 얼마나 무뎌지고 하찮은 존재로 추락할 수 있는지... 보통의 삶에서 중시되던 도덕률이나 양심도 극한의 환경에 떨어진 인간에게 그것들은 얼마나 가치없고 헛된 것인지.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동물인지 깨닫게 된다. 문화와 도덕으로 치장한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명백하고 손쉬운 추론을 믿지 않는다. 모든 문명적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인간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우둔하다는 추론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따르면 '해프틀링'은 거리낌이 없는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궁핍과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 앞에서 수많은 사회적 습관과 본능이 침묵에 빠진다는 것뿐이다." (p.132)

 

<이것이 인간인가>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함께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에 의해 씌어진 증언문학의 고전에 속하는 책이다. 저자는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세파라딤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민병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포솔리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2월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5년 1월 '붉은 군대'에 의해 구출되기까지 저자는 약 11개월 간의 수용소 생활을 겪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록은 히틀러와 그를 추종했던 일부 세력들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게 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것만을 사실적이고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p.187)

 

잠재된 인간 정신의 밑바닥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저자가 지적하듯 인간성이 파괴된 극한의 환경인 수용소는 인간 영혼의 추락을 목격할 수 있는 실험장이다. 희망과 미래가 거세된 수인들에게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미래는 장벽처럼 그들 앞에 서 있다. 오히려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이 미래보다 가깝다. 증오로 무장된 지배자와 영혼과 자유를 빼앗긴 피지배자가 공존하는 수용소의 삶은 황폐하다.

 

"오늘도 우리는, 아침에는 영원처럼 까마득해 보였던 하루의 분초를 통과했다. 이제 오늘 하루는 끝이 났고 곧 잊혀진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하루가 아니며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 우리는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것을 안다.(...중략...)기억이란 희미한 도구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아주 오래 전 내 친구가 내게 써줬던 시 두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느 날, '내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

이곳이 바로 그렇다. 수용소의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내일 아침이다." (p.204)

 

육체 노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저자가 극한의 추위 속에서 영원처럼 더디게 흐르는 분초를 견딘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 화학자였던 그가 수용소에서의 삶을 글로 옮기게 된 것도 어쩌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와 같은 인간간에 대한 집단적 광기는 히틀러 한 사람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요, 저항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수많은 독일인들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그런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박정희를 신처럼 떠받드는 수많은 동조자뿐만 아니라 불의에 눈 감았던 다수의 국민들도 군부 독재의 당사자들이었음을 시인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p.303~p.304)

 

프리모 레비는 이 책에서 히틀러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고 썼다. 그것이 좋은 의미였든 나쁜 의미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박정희도, 전두환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였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추종하거나 동조했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인간성 파괴의 현장은 히틀러와 그의 추종 세력이 했던 짓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나를 지배하던 담배의 유혹과 싸우면서 '까마득해 보였던 하루의 분초를 통과'하고 있고, 내일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는 걸 안다. ''내일'이라고 말하는 게 아무 의미를 갖지 않을 때까지'는 아닐지라도 당분간 나는 나를 괴롭히는 유혹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하루의 분초를 통과하는 경험을 수없이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본디 나약한 동물이라고 말한다면 조금쯤 위안이 될까? 나처럼 금연을 결심한 사람들 모두가 '중독의 수용소'에 있는 이 순간을 무사히 벗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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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달라 보인다.

단순히 해가 바뀌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십여 년 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담배의 지배력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해마다 이맘때면 금연을 한답시고 호들갑을 떨 때도 나만 홀로 초연했었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아내의 잔소리가 있기는 했으나 그냥 견딜 만했다.  그랬던 내가 금연을 결심하고 담배를 끊자 아내는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아무튼 내게 세상은 흡연을 할 때의 세상과 흡연을 하지 않을 때의 세상, 단 두 개의 세상으로 보일 뿐이다.  서서히 금단증상이 나타나는 까닭에 글을 쓸 때는 가급적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12월에 출간된 에세이 중에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다.

 

 

나는 결국 <정글만리>를 읽고 리뷰를 쓰지 못했다.  쓰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조정래 작가도 이제 끝이 보이는구나 생각했었다.  아끼는 작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상상력의 발현보다는 중국에 대한 면밀한 취재에 스토리를 슬쩍 얹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던 <정글만리>.  그의 산문집은 어떤 내용일지...  또 다른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만 하다.

 

 

 

 

 

 

 

<오프라 윈프리 쇼>를 단 한 번이라도 보았던 사람이라면 그녀의 긍정적 에너지에 쉽게 동화되리라 생각한다.  방청객뿐만 아니라 시청자들 모두를 쥐락펴락 했던 그녀의 탁월한 진행 능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결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았던, 강인한 인간의 표본과 같았던 오프라 윈프리의 삶에서 얻어진 귀한 교훈들, 이 책은 그런 책일 것이라 믿는다.

 

 

 

 

 

 

장르가 다른 예술계의 두 거장이 나누는 대화는 가벼운 듯하면서도 그 깊이가 다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여러 곡의 음악 제목이 등장한다.  주로 재즈 음악이 많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화를 실은 이 책은 하루키의 열혈팬인 내게 설렘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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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0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정글만리를 보며 썩 좋은것은 아니였는데 꼼쥐님의 글을 읽으니 저만 그런 생각을 갖었던게 아니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저는 처음 읽어본 조정래 작가님의 글이였는데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였거든요.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태백산맥은 구입해놨는데 아직 펼쳐보진 못했어요. 오프라윈프리의 책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되네요^^ 긍정적 에너지를 받기 위해서라도 읽어보고 싶어요^^

꼼쥐 2015-01-04 15:46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태백산맥>은 대작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아마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정글만리>는 마치 오랫동안 중국을 취재한 어느 기자의 다큐멘터리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소설이라고 말하기도 조금 민망한 그런 작품이었죠. 이렇게 말하면 작가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중국발 미세먼지 탓인지 목 안이 칼칼하고 가슴이 답답하지만 요 며칠 푸근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이제 내일 하루만 지나면 2014년은 과거의 기억 속으로 영원히 묻힐 것입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한 해를 잘 보냈다는 뿌듯함보다는 왠지 모를 헛헛함이 밀려오는 게 사실입니다. 처음과 끝은 항상 맞물려 돌아가는 것임에도 '처음'보다는 '끝'에 오랜 시간 눈길이 머물고 떨쳐버릴 수 없는 진한 아쉬움과 미련을 품게 마련이지요.

 

세월의 흐름은 몸보다 먼저 사람의 마음을 늙게 하나 봅니다. 까닭도 없이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걸 보면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 한 살이라도 더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는 남보다 뒤처진다는 것,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머지않은 미래에 폐기처분의 신세를 면키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기 위해 기를 쓰게 되는가 봅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쓴 <오래된 미래>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라다크에서 늙어감은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연 순환의 일부로 여겨진다. 흔히 한동안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라다크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은 "지난번 보았을 때보다 많이 늙었네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 말을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를 말하듯 아무렇지 않게 할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내가 더 늙어 보인다는 말을 듣기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나이를 겁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의 이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중에서)

 

나도 모르게 왠지 헛헛하고 쓸쓸해지는 이 즈음에는 의지가 될 만한 무언가가 절실해지곤 합니다. 그 대상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좋아하는 음악이나 그림이든, 혹은 책이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 다가오는 2015년에는 라다크 사람들처럼 평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월에 쫓기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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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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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소설을 즐겨 읽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과거의 어느 한때 나는 소설 이외의 다른 책에 매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진 정의나 명제, 진리라고 믿어 의심지 않았던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내 가슴을 뛰게 했던가. 간혹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기억하는 멋진 문장을 그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또 얼마나 달콤했던지. 나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지식, 세상의 모든 진리를 내 머릿속에 모두 지니고 있는 양 제 분수도 모르고 으스대며 철없이 굴었던지.

 

그러나 내가 굳게 믿었던 진리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새롭게 등장한 이론에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을 때 나는 구시대의 인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한낱 허섭스레기로 치부되기 일쑤였으니 내가 한때 불변하는 진리로 믿었던 어떤 것들도 다만 한 개인의 주장, 한 사람의 목청에 불과했음을 부득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나의 현학은 찰나와 같은 짧은 시간 동안에만 유효했던 한시적인 어떤 것, 바람처럼 가벼운 유행에 지나지 않았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그와 같은 것임을 나는 뒤늦게 깨우쳤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다. 소설은 적어도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명제에 이르게 하거나 정의되지 않은 삶의 방식을 제멋대로 강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삶, 이런 인생도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작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같은 진리의 가변성, 지식의 다양성, 하나로 취합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무지에 대한 인식,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전제 없이는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소설은 백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요즘 안다는 건 무엇이고 모른다는 건 또 무엇인지 혼자 곰곰이 생각할 때가 많다. 안다는 건 경험에서 나오니 사실 아는 건 과거에 안 것이다. 과거에 알았다고 해서 지금도 아는 건 아니다. 지금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어떤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걸 가장 잘 표현하는 동사는 아마도 '산다生'가 아닐까? 산다는 건 경험을 통해 몰랐다가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미래에 어울리는 동사는 '모른다'뿐이다. 정리하자면 '과거-안다. 현재-산다. 미래-모른다'의 공식이다." (p.202)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나 자신 혹은 나 아닌 타인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마음 지도(地圖)'쯤으로 읽힌다. 내가 소설가가 될 가능성이 단 일 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란 인간은 평생 나 자신조차도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대충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고, 이렇게 살아갈 것 같다는 개연성은 있지만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래서 어떤 결과를 보았고 결국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하는 문제에는 영 자신이 없다. 작가의 말마따나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없다.'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전제가 없다면 선을 행하는 게 어려워진다.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윤리적 행위는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시작된다." (p.157)

 

소설가 중에는 작정하고 나서서 된 사람도 있겠지만 우연찮게 된 사람도 많은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무지에 대한 인식 또는 좌절에 대한 반동(reaction)'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그야말로 살아지는 것이지 단순히 머리로 사고되거나 생각하는 것이 곧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즉 소설에서의 삶도, 우리의 삶도 인식론적 차원의 삶이 아니라 경험론적 차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p.218)

 

마음만 먹는다고 누구나 다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 자신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무지(無知)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소설을 쓰기 위한 기술적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소설은 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을 쓴다는 것 혹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다만 모를 뿐'이라는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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