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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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요즘 소설을 즐겨 읽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과거의 어느 한때 나는 소설 이외의 다른 책에 매료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이루어진 정의나 명제, 진리라고 믿어 의심지 않았던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내 가슴을 뛰게 했던가. 간혹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기억하는 멋진 문장을 그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또 얼마나 달콤했던지. 나는 마치 세상의 모든 지식, 세상의 모든 진리를 내 머릿속에 모두 지니고 있는 양 제 분수도 모르고 으스대며 철없이 굴었던지.

 

그러나 내가 굳게 믿었던 진리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한순간에 뒤집어지고 새롭게 등장한 이론에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을 때 나는 구시대의 인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한낱 허섭스레기로 치부되기 일쑤였으니 내가 한때 불변하는 진리로 믿었던 어떤 것들도 다만 한 개인의 주장, 한 사람의 목청에 불과했음을 부득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나의 현학은 찰나와 같은 짧은 시간 동안에만 유효했던 한시적인 어떤 것, 바람처럼 가벼운 유행에 지나지 않았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그와 같은 것임을 나는 뒤늦게 깨우쳤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그런 것이다. 소설은 적어도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해석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명제에 이르게 하거나 정의되지 않은 삶의 방식을 제멋대로 강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삶, 이런 인생도 있음을 독자들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작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와 같은 진리의 가변성, 지식의 다양성, 하나로 취합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인식하는 일일 것이다. 무지에 대한 인식,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전제 없이는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소설은 백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요즘 안다는 건 무엇이고 모른다는 건 또 무엇인지 혼자 곰곰이 생각할 때가 많다. 안다는 건 경험에서 나오니 사실 아는 건 과거에 안 것이다. 과거에 알았다고 해서 지금도 아는 건 아니다. 지금은 '모른다'에서 '안다'로 가는 어떤 과정 속에 있을 뿐이다. 그걸 가장 잘 표현하는 동사는 아마도 '산다生'가 아닐까? 산다는 건 경험을 통해 몰랐다가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런 식으로 보자면, 미래에 어울리는 동사는 '모른다'뿐이다. 정리하자면 '과거-안다. 현재-산다. 미래-모른다'의 공식이다." (p.202)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소설 작법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나 자신 혹은 나 아닌 타인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마음 지도(地圖)'쯤으로 읽힌다. 내가 소설가가 될 가능성이 단 일 퍼센트도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란 인간은 평생 나 자신조차도 속속들이 다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대충 이렇게 살아왔고, 이렇게 살고 있고, 이렇게 살아갈 것 같다는 개연성은 있지만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래서 어떤 결과를 보았고 결국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하는 문제에는 영 자신이 없다. 작가의 말마따나 '개연성은 있지만 핍진성이 없다.'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르며,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서로의 본심에 가 닿을 수 없다는 전제가 없다면 선을 행하는 게 어려워진다.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윤리적 행위는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시작된다." (p.157)

 

소설가 중에는 작정하고 나서서 된 사람도 있겠지만 우연찮게 된 사람도 많은 듯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계기로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내 생각에 그것은 '무지에 대한 인식 또는 좌절에 대한 반동(reaction)'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삶은 그야말로 살아지는 것이지 단순히 머리로 사고되거나 생각하는 것이 곧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즉 소설에서의 삶도, 우리의 삶도 인식론적 차원의 삶이 아니라 경험론적 차원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어로는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언어로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감각적인 것들 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예요." (p.218)

 

마음만 먹는다고 누구나 다 소설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관찰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 자신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무지(無知)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소설을 쓰기 위한 기술적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소설은 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을 쓴다는 것 혹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다만 모를 뿐'이라는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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