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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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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혼한 친구의 재혼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이혼한 전 부인에 비하면 미모나 교양이 형편없다는 둥 나은 게 있다면 젊다는 것뿐이라는 둥 당사자도 없는 자리에서 한참을 찧고 까불다가 다들 제풀에 지쳐 스러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재혼한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요즘 재혼한 커플이 한두 쌍일까마는 그렇게 말했다가는 나 또한 이상한 놈으로 몰릴 분위기였다.

 

남자에게 있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수태능력을 끝없이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어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나이가 들면 순간순간 확인해 봐야 안심이 되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큼 나이가 든 남자에게는 미모나 능력보다는 상대방의 젊음, 즉 생명력이 먼저 눈에 띄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재혼한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으로만.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나이 든다는 것은 '풍화된 자만심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질료로 화(化)하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자만심이 강했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자만심만은 굽히지 않았다.  그 절정은 아마도 대학시절이었겠지.  나이가 들면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되자 산처럼 솟았던 자만심은 하루가 다르게 깎여나갔었다.  그리고 나 이외의 타인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가볍고 유쾌한 책이지만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사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잔뜩 무게를 잡고 뭔가 거창한 것을 얘기하게 마련이지 작가처럼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일들로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나 하루 종일 수다를 떨며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남자들의 삶이라는 게 문득 불쌍하게 보였다.  단순하고 경직된, 그러면서도 변화가 없고 늘 비슷한 모습의 삶.  그게 남자들의 삶이라고 말한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것일까?

 

"그중에는 젊은 여성들에게만 나눠주는 휴대용 티슈나 전단도 있다.  광고 대상이 그렇게 한정된 것이리라.  나눠주는 사람은 대부분 젊은 남성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인파 속에 서서 '이 사람, 줘야 할 사람, 저 사람 주지 않아도 될 사람'을 판단한다.  그들 앞을 지날 때, 나는 매번 시험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불과 3,4년 전까지는 떠맡기듯이 해서 받았던 티슈였는데 지금은 거들떠봐주지도 않는다.  내 마흔두 살의 외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p.52~p,53)

 

이따금 미소를 지으며 읽다가도 어느 순간 짠해지는 느낌이 든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란 게 이런 걸까.  누구나 나이가 들고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우울한 느낌만 울컥울컥 솟는다.  사랑은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 믿다가도 어느 날 길거리에서 거침없이 뽀뽀를 하는 연인이라도 만날라치면 '저게 뭐하는 짓거리야. 버릇없는 것들.'하고 괜한 심술에 욕부터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웬간히 나이를 먹었나 보다 느낀다.

 

"대화에 꼭 노후를 소재로 넣는 것은 웃어넘기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 누구도 장래희망이 뭐냐고 묻지 않지만, 어른이 되어도 장래는 있다.  연금은 얼마 받을 수 있을까, 소비세도 오를 것 같은데.  병에 걸리면 어쩌지......  이것저것 불안하다.  그렇지만 마지막 전철을 앞두고 가까운 역에서 헤어질 때는 다음달 열리는 불꽃놀이 대회 일정을 서로 확인하는 우리였다."    (p.197~p.198) 

 

언젠가 나는 공원 벤치에 옹기종기 앉아 무언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어르신들을 본 적이 있다.  대화 내용이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들어보니 별로 신통치도 않은 옛날 이야기를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말하고 그 얘기를 또 골똘히 듣고 있었다.  그분들이 서로 자주 만나는 사이라면 아마도 수도 없이 들었을지도 모를 그 얘기를 마치 처음 듣는 얘기처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나도 언젠가는 그분들처럼 먼 과거를 현재처럼 살게 되는 게 아닐까?

 

"자신이 하는 말을 상대가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는 그 두려움, 민망함, 미안함, 고마움, 기쁨, 과분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늙었다는 증거다."    (p.181)

 

즐겁게 나이든다는 것(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은 작가처럼 나이를 잊고 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따금씩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으며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에는 인생은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심각하지 않게, 즐거운 마음으로,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하루하루즐 즐기며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리라.  작가 마스다 미리처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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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5-08 12:36   좋아요 0 | URL
전 여자라 그런지 완전 공감했어요

꼼쥐 2014-05-08 19:54   좋아요 0 | URL
그러셨을 것 같아요.
저로서는 정말 부러운 일이지만.
 
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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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생활하는 데 기본이 되는 의식주의 문제를 타인의 손에 의존하면서부터 현대인의 질병은 깊어진 듯하다.  나는 그것을 '중독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중독'은 비단 담배나 마약, 또는 술과 같은 직접적이고도 인식 가능한 사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종교, 성형, 범죄, 섹스, 권력, 허세, 게임, 사치, 독서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와 양상은 다양하고도 포괄적이다.

 

나는 주변에서 종교에 중독된 사람들을 가끔 본다.  그들은 마치 신의 숨결이 한 번 스치기라도 하면 현실의 상처들이 말끔히 해소될 것만 같은 상상 속에서 종교를 믿는다.  알량한 헌금이나 시주의 대가로 그들이 얻는 상상의 쾌감은 실로 큰 것이다.  그러나 그 효력은 며칠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약발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들이 믿는 종교 신전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중독'은 무한반복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결코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독서도 일종의 중독으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독서는 모름지기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쉽게 중독으로 이어진다.  자기 계발서에 대한 탐닉이 좋은 예이다.  현실의 습관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구장창 자기 계발서만 읽는 사람들은 대개 독서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책만 읽음으로써 이사로 승진하거나, 억만장자가 된다거나, 토익 만점을 받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현대인에게 좋은 책이란 무엇보다도 중독의 늪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상상이나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영혼의 동아줄, 그것이 바로 책이어야 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책의 진정한 효용이 아니겠는가.  문학 평론가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는 내가 생각하는 책의 효용에 걸맞는 책이다.  280여 쪽에 이르는 보통의 두께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내용을 음미하고 곱씹으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리지 싶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이 너무 아파, 한참을 망설이다 늦어진 답장은 이렇다.  인생을 확 바꾸는 책은 없지만, 인생을 확 바꾸는 절실한 물음은 있다고.  당신이 그 질문을 시작한 그 순간, 인생은 이미 바뀌기 시작했다고.  머리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채 연못을 찾는 심정으로, 내게 맞는 책을 찾는다면, 내게 전혀 안 맞는 책조차 커다란 스승이 된다고."    (p.11)

 

맞는 말이다.  나는 저자의 말에서 책은 곧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의 고통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뒤돌아서거나 회피하고 싶은 현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인내심, 상실의 고통마저 의연히 감수하며 먼먼 세월의 뒤안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책이란 본디 그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그랬지만 세월호의 참사를 겪으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걸린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건전한 태도가 아니다.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무기력해지는 모습은 부끄럽다.  슬픔을 안으로 갈무리한 채 의연하고도 강건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오래전에 다 읽었었고 최근에 다시 꺼내어 읽었다.  말하자면 두 번을 읽은 셈인데 그래도 뭔가 확연히 떠오르거나 손에 확실히 쥐어지는 게 없다.  책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내 능력이 모자라는 탓이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애도와 우울>에 따르면, 대상의 상실로 인한 우울증이 여타의 슬픔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자애심의 추락'이라고 한다.  대상의 상실을 곧 자아의 상실로 인식하면서, 타인은 물론 자기를 사랑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리는 것이 우울증의 치명적 위험이다.  슬픔의 경우는 세상이 빈곤해지지만, 우울증의 경우는 자아가 빈곤해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 생각하는 순간, 우울의 칼날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  급기야 '누군가 나를 처벌해주었으면'하는 망상에 빠지면서, 고통이 기다리는 장소를 향해 자발적으로 떠나기까지 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자원하는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p.81)

 

세상의 모든 '중독 현상'의 기저에는 고통이나 불편한 심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고통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회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고통과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그 힘을 배양하는 데 있다.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가 좋은 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작가가 우리에게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끝없이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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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리턴드 The Returned
제이슨 모트 지음, 안종설 옮김 / 맥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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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으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지난 인생이 남들보다 더 혹독했다거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을 건너뛴 다른 시공간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지금의 사람들이 좋을 뿐이다.

 

제이슨 모트의 소설 <더 리턴드(The returned)>는 죽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나는 상황을 가정하여 쓴 책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벗어나기 힘든 감정이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차 흐릿해지게 마련이고, 우리가 사는 동안 그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소중함을, 삶의 의미를,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상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카디아는 미국에 있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그곳에는 일흔이 넘은 노부부 루실과 해럴드가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이콥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이콥은 1966년 여덟 살 생일에 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제이콥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고 그들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고 있었다.  이렇듯 평온했던 부부의 삶을 뒤바꾼 것은 아들 제이콥이 여덟 살의 나이로 그들 앞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악마 - 그들의 특정한 악마 - 가 눈물이 글썽이는 갈색 눈동자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부모와 헤어져 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온 아이 특유의 안도감을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작고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그들의 현관 앞에 나타났을 때,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살아난 루실의 단단히 닫혔던 마음은 사무국에서 나온 잘 차려입은 남자 앞에서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p.21)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이 세상으로 귀환하는 것은 비단 제이콥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귀환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이 전대미문의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또한 그 누구도 왜, 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이 기적인지, 또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급기야 국제 귀환자 사무국이 결성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귀환자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아카디아의 초등학교에 귀환자들을 모아 놓고 감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귀환자 수용소가 세워진 셈이다.  해럴드는 어린 제이콥을 수용소에 혼자 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자청하여 수용소에 남는다.  그 순간에도 귀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새로운 귀환자들은 사무국 요원들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사람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귀환자의 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과 갈등도 심해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은 제이콥이 1966년 8월의 그 여름날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녀석이 말을 하면, 내 귀는 그가 내 아들이라고 말해.  내 눈도 마찬가지고.  그 오래전, 까마득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해럴드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p.222)

 

귀환자 사태는 세상이 의도하고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해럴드와 제이콥이 떠난 빈집에 홀로 남은 루실은 그들을 위해 매일 음식을 준비하여 날랐다.  그러던 중 1963년에 죽었던 윌슨 일가족이 귀환하여 루실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된다.  윌슨 일가는 루실과는 먼 친척뻘이었다.  귀환자 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귀환자의 수가 증가하고 수용되지 않은 귀환자도 증가하면서 산 사람들과의 마찰은 점차 심해졌다.  이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귀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렇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한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정부도, 성직자도, 과학자도, 그 누구도.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이렇다.  귀환자의 가족이면서 귀환자에게 우호적인 해럴드 가족,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무국 요원 벨러미와 윌리스 대령, 성직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피터즈 목사, 정상인들을 지지하며 귀환자를 적대시 하는 프레드 그린 등.  나는 소설의 뒷부분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설일 뿐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이야기.  단지 그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어떤 것들이 한순간에 뒤바뀌었을 때의 혼란과 갈등, 그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탐욕과 비열함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의 역할도.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들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정부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적의 치료법을 제시해야 하고, 필요하면 단호한 군사조치라도 취해야 한다."    (p.80)      

 

우리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다만 모름으로써 죽음을 그저 수용할 뿐이다.  예컨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만약 우리가 상상하는 지상천국이라면  현실의 삶을 서둘러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속출할 테고, 만일 그것이 불구덩이 속의 지옥이라면 사는 내내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 모름으로써 기대와 공포의 중간자적 입장에 놓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절묘한 신의 한 수이다.  그렇다면 죽었던 자의 생환은 과연 축복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작가 제이슨 모트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우리에게 또 하나의 철학적 난제를 던져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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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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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를 만난다는 것은 '소설을 통한 인문학적 채험'을 하는 색다른 경험입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증폭시켜 대담하게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도록 만드는,  설렘과 기대로 '인문학'에 한발 다가서게 하는 그런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게 해준 책은 <내말 좀 들어봐>였습니다.  출간된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군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소설임에도 결코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과 재치가 넘치는 표현들, 무엇보다도 철학과 상식을 넘나드는 작가의 지성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줄리언 반스의 신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제 예상대로 호평이 쏟아지더군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은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예사로 넘기기 힘든, 말하자면 소설을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하는 소설이지만 리뷰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는 그런 짓거리는 통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쓰는 리뷰에 제가 특히 마음에 두었던 작품 속의 구절을 최대한 많이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음의 인용문부터 보시죠.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 같은 구절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컨대 그 시절의 나는 경험이 부족해서, 보통의 젊은이가 갖는 치기 어린 과대한 감정 표출로 인하여, 혹은 으스대며 뻐기고 싶은 영웅심의 발로였다는 말로 우리의 과오나 실수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조금쯤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과거의 사실을 가감하고, 기름을 치며, 때로는 망각이라는 그늘 뒤로 숨기도 합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미약하고 터무니 없는 것인지요.  게다가 그 기억을 바로잡아 줄 친구들도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결국엔 그 기억들이라는 게 나 스스로에게 했던 독백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p.106~p.107)

 

위에 인용한 글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는 학창 시절 '역사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른 그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고 번복합니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다른 인물인 에이드리언은 같은 질문에 대해'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선생님은 덧붙입니다.  '역사는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p.141)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는 평번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시간과 역사 속에 존재했었지만 기록되지도, 또는 기억되지도 않는 개인의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남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삶은 역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며,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까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확신하는 순간 삶을 거부해야 마땅할까요?  소설 속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친구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저주에 가득찬 편지를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토니가 편지에 썼던 예언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에이드리언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노년에 이르러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편지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토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p.153)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주인공 토니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견 회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자에게는 또 다른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토니의 아내였던 마거릿은 말합니다.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입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시절의 과오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토니의 노년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 애기의 요지는,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거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회한을 단순한 죄책감의 문제로 바꾸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을 방도가 있다면?  베로니카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그를 믿어준다면?"    (p.186) 

 

저는 이렇게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이진 이 소설은 제 리뷰와는 다르게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군요.  제 바람입니다.  부디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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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이 세월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잠시 팔랑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 아스라한 순간을 하릴없이 지켜보아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정녕 내 뜻이 아니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엊그제 있었던 세월호의 침몰 사고 순간부터 나는 눈과 귀를 막은 채 TV와 멀어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입마저 막을 방법은 내게 없었습니다.  잔인하게도 나는 여린 생명이 죽어가는 소식을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듣고야 말았습니다.  그것도 실시간 중계로 말입니다.  어쩌면 나는 사고 수습이 다 마무리 된, 마치 조문객이 다 물러 간 슬픔의 언저리에 주저앉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고 소식을 접했던 순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 입니다.  슬픔으로부터 멀어지려던 원래의 계획은 책을 몇 장 읽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책을 덮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날 테니 안심 해.'라고 말해 줄 악마의 스포일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고 소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 때문이었는지 분간도 되지 않았지만 나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에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자식을 잃은 어느 학부모의 핏빛 오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남자 주인공 '윌'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영국 시골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윌'은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하여 부와 명예, 아름다운 연인까지 그야말로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인해 그는 사지마비 환자가 되고, 자신의 삶을 저주하며 살게 됩니다.  '윌'의 자살 기도가 실패한 이후 부모님과 '윌'은 6개월이라는 한시적 유예기간을 두는 데 합의하였고, 그래도 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병원에 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윌'이 태어난 시골 마을의 치안판사로 재직중인 어머니는 그 약속된 시간마저 지켜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윌'의 추가적인 자살 시도를 방지하고, 삶의 의지를 되살려줄 간병인을 찾는 과정에서 '윌'과 만나게 된 사람이 여자 주인공 '루이자 클라크'입니다.  고향 마을을 단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전형적인 시골뜨기였습니다.  '루이자'는 간병인 모집 공고가 났을 때 자신의 직장이었던 카페가 문을 닫아 실직 상태에 있었고, 그녀의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던 루이자는 새로운 직업이 절실했었습니다.  그러나 6개월 간의 한시적인 고용 의무를 다하려던 루이자는 '윌'의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 탓에 간병을 포기하려는 생각도 합니다.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p.84)

 

어느 날 '루이자'는 6개월이라는 자신의 한시적 고용 관계가 끝나면 '윌'과 그의 가족들이 '윌'의 자발적 죽음에 동의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루이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 후로 '루이자'는 '윌'이 안쓰러워 그 결정을 돌리기 위해 헌신합니다.  반면에 '윌'은 그런 '루이자'가 불쌍합니다.  작은 시골 마을에 갇혀 평생을 살아갈 '루이자'가 말입니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배려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합니다.

 

"보통 사람의 시간이 있고 병자의 시간이 따로 있다.  시간은 정체되거나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삶은, 진짜 삶은, 한 발짝 떨어져 멀찌감치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p.114)

 

변심한 '윌'의 옛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루이자'의 생일 파티에도 초대하고, 혼자서는 시도조차 어려웠던 문신도 합니다.  행복했던 추억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급기야 사랑의 감정까지 싹트게 됩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윌'과 엉뚱하고 순진한 '루이자'의 사랑은 그렇게 깊어갑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약 기간의 끝이 다가오면서 '루이자'의 마음은 초조해집니다.  '루이자'는 '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긴 여행을 계획합니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겼던 '윌'을 위해 사지마비 환자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꼼꼼히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결국 '윌'의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인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 바람에 '루이자'는 7년이나 사귀었던 애인과도 결별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쓸쓸하지도 않았고, 감당 못할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몇 년씩 사귄 연애를 끝장낼 때 응당 느껴야 할 감정들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몹시 차분했고, 약간은 서글펐고, 어쩌면 조금은 죄책감을 느꼈다.  헤어진 데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도 들고 이토록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도 죄스러웠다."    (p.436)

 

'윌'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루이자'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합니다.  열흘 간의 꿈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초조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한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였음에도 '윌'은 끝내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절망한 '루이자'는 '윌'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항에서 결별합니다.  '윌'의 죽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에서 삶을 마감하려는 '윌'과 자신의 집에서 '윌'을 그리워하는 '루이자'.  '윌'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은 '루이자는 결국 스위스로 향합니다.  '윌'과의 마지막 인사를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이자'의 동생 '카트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 토머스를 생각하며.

 

"나는 언니가 윌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론 남자를 좋아했던 적도 있고 같이 자고 싶었던 적도 있지만, 가끔은 나한테 무슨 감수성 칩이 결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귀던 남자들 때문에 운다는 건 상상이 잘 안 된다.  내게 유일하게 그 비슷한 사람은 토머스일 텐데, 그 애가 낯선 나라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지만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내 마음 속에서 뭔가 펄떡 뒤집어졌고, 그게 너무나 섬뜩하게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 깊은 곳 정신적인 서류철에다가 그 생각을 꽂아 정리해두고 '생각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닫아버렸다."    (p.502)

 

차마  쳐다볼 수조차 없는 상실의 아픔을 외면하기 위해 선택했던 책.  그러나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더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진 듯했습니다.  어쩌면 나는 직시하는 슬픔보다는 유예된 슬픔을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명이 소생하는 계절에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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