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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정환 옮김 / 자유문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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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간혹 우리는 주변에서 처음 만난 누군가에 대하여 '그는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그의 판단을 영민한 감각으로 오인하여 부러워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대개는 그런 일들이 자신에 대한 지나친 믿음이나 지적 오만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더 이상의 기대를 접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피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책을 읽을 때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작가의 작품을 기껏해야 단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도 마치 그 작가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떠벌리는 그런 경우지요.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경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위가 아니라 사후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나의 직감이나 추론에서 비롯된 작가에 대한 일차 평가를 나는 그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을 읽을 때에도 똑 같이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선입견으로 굳어지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평가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독자가 무심히 내렸던 평가를 아무런 비판도 없이 내 것인 양 그대로 따르는 것이지요.  그 중에는 하루키에 대한 선망이나 경외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경멸이나 근거 없는 부정에서 비롯된 것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 근거를 파고들면 확증할 수 있는 정확한 근거를 발견하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한 측면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저는 그동안 국내에 번역된 하루키 작품의 대부분을 읽었습니다.  그 중에는 수필집도 더러 섞이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소설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하루키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문학적 깊이가 없이 지나치게 상업주의적이라던가, 성적인 묘사를 위주로 독자의 관심을 유도하는 선정성이라던가 뭐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죠.  그러나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 전반에 흐르는 놀라운 상상력과 사고의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그에 반비례하여 상상력은 고갈되게 마련인데 예순을 넘긴 그가 아직도 젊은 작가의 상상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제가 오늘 읽었던 책은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었습니다.  소설 전체를 이루는 이야기의 뼈대는 비교적 간결합니다.  스미레에 대한 ‘나’의 일방적인 사랑과, 17세 연상인 뮤에 대한 스미레의 일방적인 사랑이 서로 대비되어 그려지고 있습니다.  좀 더 부연하자면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나'와 대학을 중퇴하고 직업 작가를 꿈꾸는 스미레,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뮤'가 등장합니다.  '나'는 스미레를 이성으로 좋아하지만 스미레는 '나'를 동성 친구처럼 편하게 대합니다.  어느 날 스미레는 한국계 일본인인 '뮤'의 제안을 받고 그녀의 비서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같은 여자인 '뮤'를 사랑하는 스미레는 이제 소설을 쓰지 않고 오직 '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여자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성욕을 느낄 수는 없다고 했다.  스미레는 이 여자를 사랑하고 성욕도 느끼고 있다.  나는 스미레를 사랑하고 성욕을 느끼고 있다.  스미레는 나를 좋아하기는 해도 사랑하지는 않고 성욕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익명의 여자에게 성욕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복잡하다.  마치 실존주의 연극의 줄거리 같다.  모든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어 어느 누구도,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p.169)

 

유학 시절에 마음에도 없는 성적 체험을 한 '뮤'는 그 누구에게도 성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심지어 유부녀인 '뮤'는 남편에게도 그렇습니다.  남편은 이미 '뮤'의 그런 사정을 알고 결혼했기 때문이었죠.  성욕이 뭔지도 모르던 스미레는 '뮤'를 만난 이후 그녀에게 급격히 이끌립니다.  스미레는 '뮤'와 동행했던 유럽 여행 도중 그리스의 한 섬에서 '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 갑자기 사라집니다.  당황한 '뮤'는 '나'를 그 섬으로 와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스미레는 찾지 못하고 나는 돌아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다시 교사의 업무로 복귀하고 어느 날 스미레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혼자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면 결국 한 명분의 생각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외톨이로 지낸다는 것은 굉장히 외로운 생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야.  외톨이로 지낸다는 건 비내리는 저녁에 커다란 강 입구에 서서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야."    (p.263 ~ p.264)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다양한 것을 욕망합니다.  사랑도 그 중 하나이겠지요.  그러나 나와 같은 것을 욕망하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우연과 같은 기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우주를 유영하는 인공위성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스푸트니크는 러시아가 발사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으로서 특히 개 한 마리를 태워서 쏘아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지닌 스푸트니크는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생명을 다할 때까지 정해진 궤도를 따라 무작정 도는 인공위성.  그렇다고 하여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바다에 이르는 강물처럼.  외롭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강물처럼 흐르는 타인의 삶을 그저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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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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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서관에 들러 책을 읽고 있는데 옆 좌석에는 중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 아이가 자신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동영상을 보며 낄낄대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어쩌면 그 아이는 지금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독립된 자신의 방으로 착각했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가 처음 보는  그 아이를 중학교 1학년이라고 인정했던 이유는 너무 서둘러 중학생이 되는 바람에 미처 버리고 오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의 장난기가 그의 얼굴에 두서너 개 붙어 있었고, 코밑에는 이제 막 자란 듯한 콧수염이 어린 새싹처럼 돋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드폰을 끼고 있었지만 어찌나 소리가 크던지 나는 좀처럼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사적인 의식 세계를 침범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였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두들겼다.  그리고 평소에 내는 목소리의 한 옥타브쯤 낮춘 낮은 목소리로 컴퓨터의 소리 좀 줄여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동전을 구걸하는 어느 거리의 노숙자를 보는 시선으로 내 얼굴 어디쯤에 한동안 머물다가 적선이라도 하는 양 소리를 줄여주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미처 다 하지 못한 :감광석 에세이>이다.  나처럼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조차 어쩌다 그의 노래를 들을라치면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의 고요를 떠올리게 된다. 오늘 내가 저질렀던 한 아이와의 작은 풍파를 생각하면(이런 일은 내게 수시로 벌어지는 일이지만) 가수 김광석은 지구가 아닌 딴 세상에 살다 간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말이다.  우리가 겪는 세상은 이토록 거친 곳인데, 그 거칠고 험한 모습을 은행에 비치된 파쇄기처럼 곱고 잔잔하게 뽑아내려면 그의 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튼 김광석의 노래는 입자가 곱다.  나는 오늘 그 고움의 기원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  가수로서의 그의 목소리에서 비롯된 듯도 하고, 지난했던 그의 삶에서 비롯된 듯도 하고, 급기야는 그가 바라보았던 세상에서 비롯된 듯도 하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의 거친 풍경을 그 작은 체구로 그렇게 곱게 갈아내려면 그는 어지간히도 힘에 부쳤으리라.  오선지에 나붓나붓 그려지는 음표들이 적잖이 힘겨웠으리라.

 

<미처 다 하지 못한 :감광석 에세이>는 그 힘겨움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가 남겼던 일기와 메모, 편지, 노랫말 등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때 묻은 운동화는 끝없이 삶을 밟아가고 있다.'고 썼던 어느 날의 기록에서 나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

 

"나도 서른을 넘어설 무렵 심한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이십 대에 가졌던 기대나 가능성이나 이런 것들이 많이 없어지고, 삶에 대한 근본적인 허무가 몰려왔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서른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처음으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p.100 ~ p.101)

 

가수로서의 김광석이 있기 전, 그러니까 이 책의 1부에 실린 그의 기록들에서 음악에 대한 열망과 궁핍했던 생활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자고, 먹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삶의 질료들은 비슷할지라도 완성되는 그 이미지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고, 환영과 같은 그 이미지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삶을 평가하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는 어느 쪽이었을까?

 

"하루의 아침을 바쁘게 시작하여 하릴없는 오후를 지나 멍청한 내 눈 위에 눈이 내렸다.  땅으로 내리는지 하늘로 오르는지 분간하기 힘든 눈이 자꾸 흩날리며 세상을 촉촉이 적셨다.  예전엔 그래도 여기저기 조금이나마 하얗게 쌓이더니 오늘 눈은 전혀 쌓일 기미조차 없이 땅에 닿는 순간 물로 변했다.  눈답지 않은 눈, 별 싱거운 눈.  나 같은 눈이 땅으로 내리는지 하늘로 오르는지 자꾸 흩날리며 아무 생각 없는 무료한 오후 한때를 스쳤다."    (p.39)

 

2부에서는 그의 대학 시절과 큰형님의 죽음으로 인해 짧아졌던 군 시절, 딸을 자신의 손으로 받았던 경험, [사랑했지만]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등병의 편지] 등의 노래를 부르게 된 계기 등을 설명하고 있다.  딸이 태어나고 바빠진 일정 속에서 그는 몹시 힘들어 했었던 듯하다.  마흔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던 그는, 환갑 때는 연애를 하고 싶다던 그는 그 나이에 이르지도 못한 채 너무도 쉽게 우리 곁을 떠났다.

 

"내 딸이 태어날 때 처음 본 얼굴은 의사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딸을 직접 받아냈기 때문이다.  의사는 출근 전이었고 간호사는 무슨 준비하러 간다고 나간 사이에 내가 아이를 받아냈다.  아주 놀라웠다.  아!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그 놀라운 광경은 괴기영화보다 더했다.  참 신기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게."    (p.126)

 

3부의 소제목은 "꽃이 지네 눈물같이 -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노래로 화하지 못한 노랫말들을 모은 것이다.  언젠가는 노래가 되어 그의 목소리로 되살아났을 그 노랫말들은 쓸쓸하다 못해 슬프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버려진 운동화처럼 그렇게 어색하다.

 

"산허리 돌면 굽이쳐 나를 부르고

 시냇가에 구르던 돌처럼 나도 구르고

 내가 나인지도 모르고 굽은 길만 탓했지

 내가 나인지도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    (p.239  '하늘을 쳐다보며' 중에서)

 

문학이든 음악이든 삶의 저 깊은 심연에서 건져올린 듯한 것들에는 깊은 울림이 있게 마련이다.  비록 그런 삶을 사는 당사자는 외롭고 쓸쓸할지라도 그 글을 읽고, 그 노래를 듣는 우리들은 행복한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추억하면서 세상의 풍파를 잊는다.  아름다움은 결국 누군가를 사랑함이다.  사랑이 깊었던 가수, 김광석이 그리운 이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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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댄스 댄스 - 하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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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삶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인정하지 않는 한 삶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삶은 꽤나 고집스러운 데가 있다.  그러므로 사업의 실패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같은 일들로 인하여 겪게되는 상실감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인생을 몇 가지 단계로 나눈다면 1년, 1년 나이를 먹는 시계열적 추세 변화와 삶은 하등의 관련성이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극구 피하려 하지만 말이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애먼 거미를 기피하는 것처럼.

 

나는 녹색의 여린 잎을 내밀고 있는 양지쪽의 철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어리숙한 사람도 이따금 제법 그럴 듯한 생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도 떠오르는 그 순간에 적어두지 않으면 금세 잊혀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지만 말이다.  한번 떠오른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진득하니 눌러 앉는 법이란 결코 없다.  마치 대기표를 뽑아 들고 기다리는 다른 여러 생각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이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변심한 여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냉정하게 자리를 뜨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있노라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카를 융의 '그림자 이론'을 소설로 각색한 듯한 느낌마저 들 때가 있다.  하루키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주인공은 현실 속의 사람들과 한 발짝 멀어져 있다.  자발적 소외.  그렇다.  그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경제적으로나, 능력으로나 그닥 뒤처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한 발 물러서는 것이다.  주인공의 의식은 때로 원시의 신화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짙은 암흑은 폭력의 입자를 내 주위로 떠돌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바다뱀처럼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걸 볼 수조차 없다.  구제할 수 없는 무력감이 나를 지배한다.  온몸의 모공이 송두리째 어둠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셔츠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다.  목구멍이 칼칼해진다.  침을 삼키기도 힘들어진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일까?"    (상권 p.132)

 

책에서 주인공인 '나'는 잡지사의 자유 기고가로서 이혼 경력이 있는 34살의 사내다.  작품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들은 그 성향에 따라 '환상의 세계(또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과 '영혼의 세계(또는 관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뚜렷이 구분된다.  내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그랬다.  배우이자 학창 시절 친구인 '고탄다', 고급 콜걸이자 환상의 여인 '키키', '키키의 친구 '메이', 외팔이 시인 '딕 노스'가 이미지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면 주인공인 '나'와 예지능력이 있는 열세 살의 소녀 '유키', 그녀의 어머니인 '아메'는 관념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가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키키'와 만났던 삿포로의 돌핀 호텔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키키'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으로 도쿄에서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삿포로로 향한다.  그러나 돌핀 호텔은 예전의 그 호텔이 아닌 새로운 호텔로 개축되었다.  다만 그 이름만 그대로인 채.  그 호텔에 머물면서 '나'는 예전에 사라진 돌핀 호텔의 관념 속에서 '양 사나이'를 만난다.  '양 사나이'는 '나'에게  "춤추어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되도록 멋있게 춤을 추어라" 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나는 호텔 여직원 '유미요시'가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나'는 '양 사나이'의 충고에 따라 운명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긴 채 춤을 추듯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과 의문의 죽음이 이어진다.  '아메'가 죽고, '고탄다'가 죽고, '딕 노스'도 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애적 표현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  대신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무력감이 조용히 소리도 없이 물처럼 방 안에 차 있었다.  나는 그 무력감을 밀어 헤치듯이 목욕실로 가서 <레드 클레이>를 휘파람으로 불면서 샤워를 하고, 부엌에 선 채로 캔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고 스페인 어로 하나에서 열까지 센 다음,「끝났다」하고 소리 내어 말하고는 손뼉을 치자 무력감은 바람에 날려가듯이 휙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나의 주술(呪術)이다."    (하권 P.19)

 

"죽은 '정어리'와 마찬가지로, 결국 키키는 당연히 죽어야 했기에 죽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내게는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체념이었다.  광대한 해면에 내리 쏟아지는 비처럼 조용한 체념이었다.  나는 슬픔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영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어루만지면, 산뜻하고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든 게 소리도 없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모래 위에 그려진 표지를 바람이 날려 버리듯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하권 P.229)

 

'나'는 환상의 세계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현실을 조화롭게 인식한다.  그것은 일종의 춤을 추는 과정과 비슷하였다.  작게 스텝을 밟으며 서서히 빠져드는 춤처럼, 관념의 세계로 침잠하던 의식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이다.  비록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환상의 세계에서 하나 둘 사라지지만.  '나'는 결국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가 '유미요시'를 만나고 현실의 사랑을 이룬다.  '유미요시'는 '나에게 사라지지 않는 현실의 구원자였다.  그들도 물론 언젠가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말이다.

 

"메이의 죽음이 내게 가져온 것은, 오래된 꿈의 죽음 및 그 상실감이었다.  딕 노스의 죽음은 내게 어떤 체념을 가져왔다.  그러나 고혼다(고탄다)의 죽음이 가져온 것은, 출구가 없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와 같은 절망이었다.  고혼다의 죽음에는 구원이라는 게 없었다.  고혼다는 자신 속의 충동을, 자기 자신에 잘 동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힘이 그를 극한적인 장소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의식의 영역의 제일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어둠의 세계까지."    (하권 P.249) 

 

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성지 순례를 갔던 관광객들이 폭탄 테러를 당하고, 무고한 사람이 간첩 누명을 쓰는 이런 세상에 때로는 어둠 속에 갇혀 '양 사나이'를 만나고 싶지만 인생은, 삶은 우리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렇게 세상으로 나아가 춤을 추듯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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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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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하지요.  책을 읽다 보면 그 계절과 딱 맞는 그런 책과 만날 수 있다는 게.  혼잡한 거리에서 우연히 친한 친구와 마주치는 그런 경우처럼 말입니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과 나날이 도타워지는 봄의 기운이 나를 인도했던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요.  숨죽였던 계절이 기지개를 켜는 이맘때면 세월의 켯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추억 한토막쯤 풀어내어 한나절 그 추억 속에서 노닐고 싶은 심정.

 

박완서 작가의 유고집 <노란집>은 그런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와 나는 일면식도 없고 생전에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엮여진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 양 스스럼없이 내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봄의 기운이 소리가 되어 터져나오기에는 조금 이른 이 계절에 작가가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의 추억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 그 이야기들이 얼음장 같던 내 마음을 사르르 녹입니다.  나는 저으기 안심하며 푸근해지는 것입니다. 

 

"설이 지나고 제법 해가 길어진 어느 날 아침이었다.  곧 해가 뜨려나, 파스텔 조의 노을빛을 받은 숲의 나무들이 흡사 꼼지락대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내 맨몸으로 삭풍을 견딘 늠름하고도 날카로운 가장귀들이 마치 간지럼을 참듯이 들썩이고 있는 게 암만해도 수상쩍었다.  나는 숲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마당 끝까지 걸어갔다.  우리 집 마당 끝은 조그만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숲과 연결돼 있다.  바람 없는 조용한 새벽이었다."    (p.126)

 

어느 책이건 글에서 작가 자신의 성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참 드문 경우입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또렷이 그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서(그것이 소설이든 산문이든 간에)는 언제나 살아생전의 작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솔직한 성격과 똘망한 기억력 덕분이겠지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굳이 감추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이자 잘 씌어진 한 권의 산문집일 것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대가족 속에서 자랄 때부터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거짓을 말하거나 남의 것에 손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걸로 교육받았고 구태여 그걸 어길 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 된 것이었을 텐데도,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쟤는 제 털 빼, 제 구멍에 넣을 애'로 통했다.  엄마도 칭찬의 뜻보다는 융통성 없음에 대한 한탄 비슷하게 그런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런 나를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예뻐하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234)

 

삶의 질곡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다정한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포동한 손을 붙잡고 자신의 삶을 차분히 들려주는 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정의 찌꺼기들일랑 흐르는 세월에 훠이훠이 날려보내고 맑고 투명한 이야기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경리 작가가 박완서 작가를 아껴하셨던 까닭도 그런 이유겠지요.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    (p.121~p.213)

 

밤이 깊었습니다.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순한 달빛입니다.  어쩌면 나는 오늘 그렇게 순한 잠을 잘 듯합니다.  꿈결에서 새싹의 수런거림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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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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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19: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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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추운 날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춥다는 말을 먼저 하더군요.  입춘이라는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냐구 말이죠.  마치 누군가에게 떼를 쓰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두메 산골에서 보냈던 터라 어지간한 추위쯤이야 그럭저럭 잘 견딘다고 자신하지만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때보다 더한 추위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저의 생각도 한낱 인간의 오만함에 불과한 것일지도요.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뭇하지만 아마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나 봅니다.  어찌나 추웠던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손과 발에 동상을 달고 살았었고, 손등이 터서 쩍쩍 갈라지곤 했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지냈었는데 그날은 추워도 너무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으로 꽁꽁 언 손과 발을 넣었을 때 어찌나 아리고 아프던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잘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요즘은 저도 이따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무작정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이른 나이여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이 더 행복한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을 하기 어렵지만 제게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엄정한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오늘 저는 최인호 작가의 유고집 <눈물>을 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그 고통을 같이 할 수 없겠지요.  그 절대 고독의 순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것인지, 허망한 인간 삶을 손에서 놓고나면 나는 그 무엇에 의지한 채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인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작가의 <산중일기>를 읽고 리뷰를 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작가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고 남아 있는 우리들은 그의 유고집을 읽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확한 것이겠지요.  2008년에 침샘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웠던 고 최인호 작가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인간이 갖는 숙명적인 나약함 앞에서 절규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p.13)

 

그렇습니다.  작가는 1987년 6월에 세례성사를 받았고 2013년 9월에 세상을 마치기까지 그는 오직 하느님을 의지하여  살았던 듯합니다.  '최인호 베드로'로서 말입니다.  5년여의 투병기간을 작가는 '고통의 축제'라고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작가는 그 축제를 온전히 즐겼다고 저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너무도 미약하고, 너무도 쉽게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마주한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는 그가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먼저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증거들을 말이죠.

 

끝없이 이어지는 신앙고백에 읽는 독자에 따라 혹 불편하다 느끼실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닌 것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작가처럼 죽음을 맞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고, 그때 우리들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신앙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나 자책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그렇게 대물림하듯 배우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이런 구절에서 저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용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발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똑같이 비를 맞고 똑같이 햇빛을 받는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있어서는 이미 용서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면 베드로처럼 일곱 번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 형제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만 번이라도 너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10)

 

참으로 재주가 많은 작가였습니다.  살아서의 작가는 누군가로부터 질시와 원망을 듣기도 했을 터이고, 인간으로서의 잘못도 많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것들도 서서히 잊혀지겠지요.  다만 그의 작품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읽히고 또 읽혀질 것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부여받은 재능을 다 펼치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닐까요?

 

입춘이라는데 봄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느끼셨나요?  바람이 휩쓸고 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구름 한 점 없었던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봄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듯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오늘 우리는 각자의 삶을 또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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