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적당한'이라는 말은 그 말이 갖는 의미의 모호성으로 인해 쓰는 이들이 부담을 느낀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온도', '적당한 애정' 등 쓰기에 따라서는 꽤나 근사한 글이 될 듯한데 우리는 '적당한'이라는 단어 앞에서 그만 숨이 콱 막히는 것이다. 얼마쯤 떨어져야 적당한 거리인지, 보일러의 온도를 얼마나 높여야 적당한 온도인지, 아이에게 얼마만큼의 애정을 쏟아야 적당한 애정인지 도통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이렇듯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번번이 가벼운 절망을 느낀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데 말이다.

 

"나와 동생은 죽음은 평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죽음은 언젠가 우리를 맞으러 와 줄 베이비시터 같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신의 철모르는 갓난아기다."  (p.45)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절망'이란 미래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의 하루하루는 무미건조하고 탁하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웨하스 의자>는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독신녀의 일상을 기록한다. 잠을 자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고, 때로는 섹스를 하고... 그렇다. 그것은 소설이랄 수도 없는 일종의 기록에 가깝다.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는 한 여인의 일상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속기사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소설에서 서른여덟 살의 '나'는 몇 사람의 애인을 거쳐 지금의 애인을 만났고, 그는 골동품 가게와 헌책방을 하는, 딸과 아들을 하나씩 둔 유부남이다.

 

"내게 인생이란 운동장 같은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고, 물론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무질서하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 모두들 그곳에서, 그저 운동을 할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p.77)

 

주인공인 '나'는 무의미한 현재의 일상 속에 과거의 기억을 더한다. 화가였던 어머니, 친절하지만 때론 엄했던 아버지, 동생과 나로 이루어진 한 가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동생과 나.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일찍 죽고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그렇게 세 여인이 독립하여 각자의 삶을 살다가 4년 전 어머니마저 뇌출혈로 사망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적은 나의 집에는 택배 아저씨와 미술상, 내가 디자인한 스카프와 우산을 판매하는 부티크상, 길고양이와 7년째 만나고 있는 애인 등. 그런 환경에서 절망은 언제나 나와 가까웠다.

 

"나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왜 자살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곤 한다. 복잡하게 얽혔다가 풀리는가 하면 어지러울 정도로 방 안 공기를 휘젓는 교향곡을 들으면서, 나는 자신이 아주 홀가분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죽음은 가벼움으로 나를 유혹한다."  (p.118)

 

우리는 각자의 고독을 서로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것은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켜를 이루고, 마침내 어찌할 수 없는 더께로 엉겨 눌어붙으면, 서로의 틈은 고독의 더께만큼 멀어진다. 기대가 멀어질수록 우리의 삶이 허점투성이의 무엇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지면 삶은 속절없이 가벼워진다는 걸 에쿠니 가오리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틀 안에 가두어지고 길들여질수록 안온함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걸 작가는 은연중에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절망이 기대하지 않는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고독은 얽매이지 않는 삶에서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한낱 누군가의 삶을 간섭하고 내 뜻대로 다스리려는 욕망에 불과하지만 인간이란 그 틀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헌납하려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이 유한한 인간이 나의 기억을 타인에게 이식하려는 작은 몸부림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 중 사뭇 진지하고 읽기에 따라서는 철학적 질문이 가득한 이 소설은 겨울로 가는 어느 길목에서 삶과 죽음에 대해 잠시 사색할 수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가까운 사람을 잃고 나면 그제야 보이는 게 관계의 중요성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관계가 이어지는 한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삶의 가치를 채 깨닫기도 전에 자신의 인생을 서둘러 마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청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인간의 미련함을 조금이나마 희석해보려는 게 아닐까. 깨달음 이전에 후회와 아쉬움을 먼저 경험하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픈 삶의 욕구를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버킷리스트 속에 암묵적인 기록으로 남긴 채 살고 있으니까.

 

허태연 작가가 쓴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관계의 중요성과 가족의 의마를 깨닫게 하는 멋진 소설이다. 물론 우리들 인생에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가치이기에 어느 철학서나 도덕 교과서에서 읽었더라면 시큰둥했을 내용이지만, 67세의 주인공 허남훈 씨의 인생을 통해 울고 웃고 아쉬워하면서 반나절 남짓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이야기로 바뀌고, 바쁘다는 핑계로 손도 대지 않았던 지난날의 작은 꿈들이 새싹처럼 푸릇푸릇 되살아난다. 망각이 덮어버렸던 '나'라는 인간에 대해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뜨거운 피가 돌게 하며, 하나하나의 세포에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건 한 권의 소설이 기능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업이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온 남훈 씨는 곧바로 '청년일지'를 폈다. 그는 '과제3. 외국어 배우고 해외여행 하기'에 세모 표시를 하고 네 번째 과제를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과제4. 건강한 체력 기르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 춤을 배우는 거다! 바로 플라멩코를!' 남훈 씨는 다짐했다."  (p.61~p.62)

 

67세의 가장이자 굴착기 기사로 반평생을 살아온 허남훈 씨. 그는 이제 은퇴를 결심하고 자신의 생계수단이었던 중고 굴착기를 팔아 치우려 한다. 그에게는 마흔셋에 만나 결혼을 한 지금의 아내와 마흔넷의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 있다. 지나친 음주로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었던 그에게는 마흔한 살의 나이에 하숙집을 옮기며 쓰기 시작한 '청춘일지'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청춘일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했던 것이다. 딸 선아를 얻은 후 일지의 작성은 뜸해졌지만 거기에는 남은 생애 꼭 이루고픈 목표들을 적어뒀다는 사실과 젊은 시절의 각오가 담겨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남훈 씨는 작업자들과 커피를 마시고 잡풀이 제거된 공터를 10여 분 거닐었다. 큰 구덩이는 큰 구덩이대로 작은 구덩이는 작은 구덩이대로 울퉁불퉁 파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남훈 씨에 의해 보기 좋게 메워질 터였다. '지나온 생의 잘못도 그렇게 메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훈 씨는 종이컵을 구겨 쥐었다."  (p.105~p.106)

 

매매에 실패한 남훈 씨는 결국 자신의 굴착기를 한 청년에게 임대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은퇴 아닌 은퇴를 한 남훈 씨는 딸의 소개로 스페인어 강사인 카를로스를 만나고, 자신의 '청춘일지'에 있었던 '체력 기르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플라멩코 강습소에 들른다. 강사의 춤사위에서 뜨거운 열정을 체감한 남훈 씨는 악착같이 그것들을 배워나가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뜻하지 않게 찾아온 건강 이상,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자서전으로 인해 남훈 씨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젊은 시절 자신과 이혼한 전처와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보연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남훈 씨는 여러 날 갈등한다. 아빠라는 이유로 어렸을 때 헤어진 딸을 찾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남훈 씨는 자신이 만나고 있는 스페인어 강사 카를로스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성인이 된 딸 보연을 만나보기로 결심한다.

 

"남훈 씨는 겁이 났다. 어둠 속에서 그는 보연을 다시 봤다. 보연은 더 이상 열일곱이 아니었다. 예전처럼 돈가스 한 번 사주고 돈 10만 원 쥐여 보낸 뒤 끊어낼 수 있는,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가롭게 여유를 부렸단 걸 깨달았다. 버려둔 자식을 만난다는 건, 늙은이의 호기로 덤벼들 일이 절대 아니었다."  (p.192)

 

소설은 결국 다시 찾은 딸 보연과 남훈 씨의 스페인 여행으로 귀결되지만, 그 과정 역시 순탄한 것은 아니어서 독자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그리고 끊어졌던 부녀의 관계와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의 일지에 대한 기대는 책을 내려놓는 그 순간까지 한껏 부풀게 한다. 우리는 종종 '다 끝났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며,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높은 벽을 체감하는 순간 새로운 장이 열렸던 과거를 기억한다. 삶은 언제나 경험을 통한 후행성의 깨달음으로 인해 조금은 답답하고 미숙한 듯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때로는 우리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을 펼쳐놓는 게 우리네 삶이기에 한 번쯤 살아볼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제목에 이끌려서 읽게 되었던 책. 우리는 때로 누군가에게 슬쩍 자신의 마음을 던져주기도 하고, 예전에 주었던 마음을 슬몃 거둬들이기도 하면서 세상과 연을 맺고 살아가지만 소중한 깨달음은 언제나 우리의 경험 뒤에 한발 늦게 찾아온다는 걸 명심하자.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는 어떤 기억이 당신의 삶에 대한 과분한 훈장일지도 모른다는 한 줄 논평이 소설의 주인공인 남훈 씨에게 주고픈 나의 메시지이리라. 그것은 또한 소설을 읽은 독자로서 내게 하는 큰 다짐이자 각오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쩌면 동화는 어른을 위한 것 - 지친 너에게 권하는 동화속 명언 320가지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 지치거나 힘든 시간이 지속될 때면 나도 모르게 찾게 되는 곳이 있다. 예컨대 고향이라든가, 부모님 혹은 위안이 되는 다른 가족의 품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의 저편 너머로 유년 시절의 특정한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마치 자석에 이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말이다. 시간의 미끄럼틀이 처음 시작되는 저 높은 곳의 과거를 향해 치닫는 우리의 회귀 본능은 온 힘을 다해 물살을 가르는 연어의 몸짓과 비슷하다. 죽음에 이르는 시간의 지면에 닿을 때까지 우리는 자신이 지나쳐 온 시간의 미끄럼틀을 몇 번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려는지...


<어쩌면 동화는 어른을 위한 것>(이서희 지음, 리텍콘텐츠)은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다섯 개의 주제로 파트를 나누고, 각 파트에 다섯 권의 동화를 선정하여 각각의 동화에서 발췌한 문장을 위주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각 파트의 주제를 살펴보면 PART 1 잃어버린 가치를 찾아..., PART 2 불안한 시간을 위하여..., PART 3 모험과 불확실함 속에서..., PART 4 특별한 세상을 마주하여..., PART 5 소중한 이들을 떠올리며...이고 각각의 주제에는 우리가 한번쯤 읽어보았거나 대강의 내용을 들어봤음직한 동화 다섯 편씩을 배치하고 있다.


"지친 일상 속에서, 막막한 삶의 가운데서, 친절이 무시당하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자신을 다독이고 타인을 위해 용기 내는 법을 잊어버린 당신에게 동화는 따뜻한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읽힌 고전부터 세상에 나온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야기까지, 수많은 '당신'과 '우리'를 위한 아름다운 동화 25편을 이곳에 모아보았습니다. 주인공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또 안타까워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다양한 감정을 맛볼 수 있도록 그들의 여정을 정리하였습니다."  (p.5~p.6 'Prologue' 중에서)


삶이 힘겨울 때마다 반복하여 찾는 장소가 고향이라면, 삶이 고되고 막막하다고 느낄 때마다 하시라도 되돌아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시기는 동화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 시절이 아닐까 싶다. 어린 왕자, 크리스마스 캐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빨간 머리 앤,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세암, 아름다운 아이,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키다리 아저씨 등 지금 다시 읽어도 금세라도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동화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얼굴에는 온통 주름이 깊게 파였다 할지라도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을 어찌 다 잊을 수 있을까. 다만 그러들 줄 모르던 용기와 자신감만 조금씩 퇴색되어 갈 뿐...


"난 이 세상 모든 것에 마법이 있다고 믿어. 다만 우리한테 감각이 부족해서 그 마법을 발견하고 유용하게 쓰지 못하는 거야. 전기나 말이나 증기처럼."  (p.69 '비밀의 화원' 중에서)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의 어느 날,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톰 소여의 모험',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쏟아지는 졸음을 쫓아가며 읽었던 '모모' 등 동화를 통해 삶의 방식들을 하나둘 깨쳐가던 내 지난날의 어린 시절.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가진 것 없어도 마냥 행복했던 그 시절의 기억만으로도 나는 언제든 다시 용기를 낼 수 있고, 삭막한 인생길에서도 따뜻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좋은 성격은 추위나 서리에 상처받으며 풀이 죽기도 하지만 따뜻한 햇살을 만나면 쑥쑥 자랄 수 있어요.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역경과 슬픔과 좌절이 정신을 강하게 한다는 의견에 반대해요. 자신이 행복해야 비로소 상대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는 법이에요."  (p.208 '키다리 아저씨' 중에서)


오늘은 겨울의 초입이라는 입동. 그러나 날씨는 더없이 포근했고 가지 않은 가을의 풍취가 만연했다. 11월의 둘째 주 월요일인 내일은 비와 함께 오후 들어 북서쪽에서는 찬 공기가 내려오고 산지에는 대설특보가 내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예보가 있다. 바야흐로 2021년의 끝자락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또 한 살 나이를 더하고, 기쁘고 행복한 추억과 더불어 슬프고 아쉬운 기억들을 혹은 화나고 절망적인 경험들을 시간의 미끄럼틀 위에 버려둔 채 미래를 향해 모험을 떠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서로를 위한 격려의 말일지도 모른다. 엘리너 H. 포터가 쓴 <폴리애나>에 나오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이다."  (p.219 '폴리애나'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낀대세이 - 7090 사이에 껴 버린 80세대 젊은 꼰대, 낀대를 위한 에세이
김정훈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은 비슷한 감성과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좋든 싫든 말이다. 60년대생은 60년대생만의 감성이, 70년대생은 70년대생만의 감성이, 그리고 80년대생은 80년대생만의 감성과 추억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추세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10년 단위에서 5년 단위로, 5년 단위에서 3년 단위로, 혹은 1년 단위로 빠르게 재편되고는 있지만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왠지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80년대생 낀대. 위로는 70년대 기성세대가 있고 아래로는 90년대 신세대가 있다는데, 요즘엔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성세대가 든든한 발판이 되어, 신세대를 우러러봐야 한다. 신세대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신세대는 아닌 세대. 신세대라는 단어를 쓰는 것 자체에서 스멀스멀 풍겨 오는 왠지 모를 꼰대 스멜을 감지하는 센스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세대라는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세대. 그렇게 구린 걸 알면서도 구린 걸 행할 수밖에 없는 세대. 그게 낀대다."  (p.20~p.21)

 

연공서열에 민감한 우리나라의 직장 내 풍속도에서 세대 구분과 자신이 속하게 될 세대를 인지한다는 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작은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윗사람으로부터 나댄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아랫사람으로부터 '꼰대'라는 비아냥을 듣지 않기 위해서 10년 단위의 동년배들 틈에 두루뭉술 몸을 숨긴다는 건 왠지 비겁한 느낌이 들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생존전략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는 현실. 김정훈이 쓴 <낀대세이>는 80년대생 젊은 꼰대, 7090 사이에 껴 버린 80세대의 이야기를 질펀하게 풀어놓는다. 말하자면 이 책은 다른 어떤 세대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80세대만의 비밀인 동시에 그들만의 애잔한 푸념이다.

 

"회사 생활을 하기 위해선 동기부여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그것이 월급일지, 승진일지, 혹은 칼퇴일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하지만 이직의 이유 중 가장 큰 퍼센티지를 차지하는 게 회사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다. 그 스트레스를 줄여보겠다고 힘든 일을 힘들지 않은 일처럼 포장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낀대들이여."  (p.234)

 

책을 읽다 보면 감칠맛 나는 작가의 입담에 정신없이 웃다가도 어느 순간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애잔한 슬픔이 밀려온다. 세대가 다를지라도, 성별이 다를지라도, 21세기를 힘겹게 살아가는 동시대의 지구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작가의 이야기에 백 번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시대에 인간은 한낱 로봇을 보조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여 필요도 없이 밥만 축내는 '잉여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는 인격체임을 잊지 말라고 작가는 누누이 주장하고 있는 듯했다.

 

"삶도 결국 연기 아닌가. 괜찮다는 연기. 잘 될 거라는 연기. 그러니 그 연기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선 How보단 Why를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진정성이 생긴다."  (p.166)

 

낙엽이 쌓인 거리를 젊은 부부와 그들의 자식인 듯 보이는 어린아이가 걷고 있다. 아이는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은 채 공중으로 붕 떠올라 해맑게 웃고 있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또"를 외치는 아이. 부모는 힘들다는 말도 숨긴 채 아이의 몸을 힘껏 끌어올려 서너 발자국을 내딛는다. 아이는 연거푸 "또"를 외치고, 부모의 힘듦은 아이의 웃음으로 대체된다. 나는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멀찌기서 바라보았다. 아주 한참 동안. 부모의 손에 매달려 하늘을 날던 아이는 훗날 자라서 어떤 세대와 공감하며 살까? 그도 역시 낀 세대의 고단함을 푸념처럼 늘어놓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순간을 추억처럼 회상하게 될까? 10월의 마지막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잊혀진 계절'을 부른 가수가 이용이 아닌, 아이유나 임영웅, 혹은 다른 어떤 가수로 기억하지나 않을까? <낀대세이>를 쓴 어느 작가의 푸념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
김지선 지음 / 새벽감성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관계자'라는 말은 꽤나 근사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가 어느 집 문패처럼 손쉽게 마주할 수 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에서 보듯 '관계자'는 언제나 남들이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을 무시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말하자면 보통의 일반인들과는 차별되는 어떤 특수한 권한을 부여받은 소수의 몇몇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자'는 사실 권한보다는 책임을 더 크게 떠안은 사람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근사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면서 우리가 무시로 드나들던 대부분의 공간들조차 이제는 몇몇 '관계자'들의 전유물로 변한 느낌이 든다. 그중 하나가 도서관이나 서점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약속 시간까지는 한참의 여유가 있을 때에도 내 집인 양 주저 없이 들어가 빈 시간을 편하게 보내곤 하던 공간인데 이제는 '관계자'로부터 출입에 필요한 허가를 득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스러운 공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지선 작가의 소설 <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를 읽는 동안 나는 마치 몇십 년 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책방지기가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곰인형이 내게 왔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책방에서 일했던 알바생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다. 소설 속 화자를 주인이 아닌 알바생으로 정한 것은 책방을 잘 모르는 사람의 입장으로 책방에서의 일 년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업무만 하면 되는 알바생의 입장으로 책방을 묘사하고 싶었다."  (p.194 '나·김지선' 중에서)


책방에서 근무하는 알바생의 시점으로 1월부터 12월까지의 소소한 일상을 마치 한 권의 에세이처럼 엮은 이 소설은 나처럼 둔한 독자에게는 어쩌면 에세이라고 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듯하다. 나도 그렇게 알고 읽었는데 뒷부분에 실린 '일 년이라는 인연'과 '일 년의 나에게'를 읽고 나서 그제야 비로소 이 책은 작가의 이야기를 알바생에게 투영하여 쓴 한 권의 소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양천구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독립서점 '새벽감성1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작가는 여행작가로 지내다가 독립서점의 사장님이 된 케이스.


"인생을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처음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던 때는 내 삶에서 가장 힘들던 시기였다.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사라질 수 없었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이면 나를 의지하는 가족들조차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에 기를 쓰고 버텼다. 그러다 우연히 책방에 알바 자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적당히 외진 곳에 있고 적당히 숨을 수 있으며, 알바의 업무는 매출을 상승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장의 빈자리를 그저 메워주는 역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p.35)


소설은 그렇게 특별할 것 같지 않은 책방 알바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일월, 이월, 삼월, 사월... 특별할 것도 없는 한 달 한 달의 소제목을 따라 책방 알바가 겪고 느끼는 특별한 일상과 생각들이 특별하지 않은 소제목 밑에 채워지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돌이켜보면 특별하지 않은 이름 밑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경험들로 채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래하지 않은 앞으로의 일 년을, 오 년을, 혹은 십 년을 걱정하곤 한다.


"사장은 이곳에서 십 년 동안 책방을 하고 싶다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십 년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오던 곳이 갑자기 생각나 고등학생이 된 지금 찾아왔다는 손님의 말에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이 아이가 대학교에 간 후에 갑자기 생각나 찾아오거나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찾아왔는데 여전히 이곳에 책방이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언제 와도 늘 그대로인 이곳이 남아 있다면 어떨까?"  (p.146 '시 월' 중에서)


사실 이 소설은 책방 알바의 경험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책방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한 사람이 겪는 특별한 인연에 관한 책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는 건 그 사람의 삶의 빗장을 열과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관계를 득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모르던 누군가의 삶에 '관계자'가 되는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관계자'가 되어 그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 여행을 하듯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