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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추는 남자 (벚꽃에디션) -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허태연 지음 / 다산북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가까운 사람을 잃고 나면 그제야 보이는 게 관계의 중요성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관계가 이어지는 한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삶의 가치를 채 깨닫기도 전에 자신의 인생을 서둘러 마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누군가로부터 가르침을 청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인간의 미련함을 조금이나마 희석해보려는 게 아닐까. 깨달음 이전에 후회와 아쉬움을 먼저 경험하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픈 삶의 욕구를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버킷리스트 속에 암묵적인 기록으로 남긴 채 살고 있으니까.
허태연 작가가 쓴 <플라멩코 추는 남자>는 관계의 중요성과 가족의 의마를 깨닫게 하는 멋진 소설이다. 물론 우리들 인생에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가치이기에 어느 철학서나 도덕 교과서에서 읽었더라면 시큰둥했을 내용이지만, 67세의 주인공 허남훈 씨의 인생을 통해 울고 웃고 아쉬워하면서 반나절 남짓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이야기로 바뀌고, 바쁘다는 핑계로 손도 대지 않았던 지난날의 작은 꿈들이 새싹처럼 푸릇푸릇 되살아난다. 망각이 덮어버렸던 '나'라는 인간에 대해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뜨거운 피가 돌게 하며, 하나하나의 세포에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건 한 권의 소설이 기능할 수 있는 최대치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수업이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온 남훈 씨는 곧바로 '청년일지'를 폈다. 그는 '과제3. 외국어 배우고 해외여행 하기'에 세모 표시를 하고 네 번째 과제를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과제4. 건강한 체력 기르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 춤을 배우는 거다! 바로 플라멩코를!' 남훈 씨는 다짐했다." (p.61~p.62)
67세의 가장이자 굴착기 기사로 반평생을 살아온 허남훈 씨. 그는 이제 은퇴를 결심하고 자신의 생계수단이었던 중고 굴착기를 팔아 치우려 한다. 그에게는 마흔셋에 만나 결혼을 한 지금의 아내와 마흔넷의 늦은 나이에 얻은 딸이 있다. 지나친 음주로 죽다 살아난 경험이 있었던 그에게는 마흔한 살의 나이에 하숙집을 옮기며 쓰기 시작한 '청춘일지'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청춘일지'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다짐했던 것이다. 딸 선아를 얻은 후 일지의 작성은 뜸해졌지만 거기에는 남은 생애 꼭 이루고픈 목표들을 적어뒀다는 사실과 젊은 시절의 각오가 담겨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남훈 씨는 작업자들과 커피를 마시고 잡풀이 제거된 공터를 10여 분 거닐었다. 큰 구덩이는 큰 구덩이대로 작은 구덩이는 작은 구덩이대로 울퉁불퉁 파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남훈 씨에 의해 보기 좋게 메워질 터였다. '지나온 생의 잘못도 그렇게 메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훈 씨는 종이컵을 구겨 쥐었다." (p.105~p.106)
매매에 실패한 남훈 씨는 결국 자신의 굴착기를 한 청년에게 임대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은퇴 아닌 은퇴를 한 남훈 씨는 딸의 소개로 스페인어 강사인 카를로스를 만나고, 자신의 '청춘일지'에 있었던 '체력 기르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플라멩코 강습소에 들른다. 강사의 춤사위에서 뜨거운 열정을 체감한 남훈 씨는 악착같이 그것들을 배워나가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뜻하지 않게 찾아온 건강 이상,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자서전으로 인해 남훈 씨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젊은 시절 자신과 이혼한 전처와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보연에 대한 갈등으로 인해 남훈 씨는 여러 날 갈등한다. 아빠라는 이유로 어렸을 때 헤어진 딸을 찾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남훈 씨는 자신이 만나고 있는 스페인어 강사 카를로스와 다른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성인이 된 딸 보연을 만나보기로 결심한다.
"남훈 씨는 겁이 났다. 어둠 속에서 그는 보연을 다시 봤다. 보연은 더 이상 열일곱이 아니었다. 예전처럼 돈가스 한 번 사주고 돈 10만 원 쥐여 보낸 뒤 끊어낼 수 있는, 그런 인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한가롭게 여유를 부렸단 걸 깨달았다. 버려둔 자식을 만난다는 건, 늙은이의 호기로 덤벼들 일이 절대 아니었다." (p.192)
소설은 결국 다시 찾은 딸 보연과 남훈 씨의 스페인 여행으로 귀결되지만, 그 과정 역시 순탄한 것은 아니어서 독자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한다. 그리고 끊어졌던 부녀의 관계와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의 일지에 대한 기대는 책을 내려놓는 그 순간까지 한껏 부풀게 한다. 우리는 종종 '다 끝났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며,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높은 벽을 체감하는 순간 새로운 장이 열렸던 과거를 기억한다. 삶은 언제나 경험을 통한 후행성의 깨달음으로 인해 조금은 답답하고 미숙한 듯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때로는 우리 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을 펼쳐놓는 게 우리네 삶이기에 한 번쯤 살아볼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책의 제목에 이끌려서 읽게 되었던 책. 우리는 때로 누군가에게 슬쩍 자신의 마음을 던져주기도 하고, 예전에 주었던 마음을 슬몃 거둬들이기도 하면서 세상과 연을 맺고 살아가지만 소중한 깨달음은 언제나 우리의 경험 뒤에 한발 늦게 찾아온다는 걸 명심하자. 어쩌면 그것은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는 어떤 기억이 당신의 삶에 대한 과분한 훈장일지도 모른다는 한 줄 논평이 소설의 주인공인 남훈 씨에게 주고픈 나의 메시지이리라. 그것은 또한 소설을 읽은 독자로서 내게 하는 큰 다짐이자 각오이기도 하다.